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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브런 Oct 31. 2023

'명예제복' 반기는
6.25 참전용사 아버지

대물림된 실향민 애환과 정체성

지난 6월, ‘6.25 전쟁일’을 며칠 앞두고 국가보훈부가 제작한 '영웅의 제복'을 전달받았다. 6.25 참전용사인 아버지(93) 앞으로 온 ‘명예제복’이다. 집배원은 별도로 “참전용사가 있는 우리 집에 경의와 축하를 드린다”는 말을 덧붙였다.


□명예제복 반기는 6.25 참전용사 아버지


연갈색 재킷과 청색 하의, 넥타이로 구성된 제복을 접한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새 옷을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뻐하셨다. 얼마 전 사드린 운동복과 운동화를 받을 때 모습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요청한 치수대로 몸에 잘 맞았다. 색깔도 얼굴과 어울렸다. 거울 앞에 선 아버지는 "옷이 날개 같다"며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제복에는 참전용사의 자부심과 호국보훈의 숭고한 가치가 들어있다. 아버지가 유난히 반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명예제복을 증정받은 참전용사 모두 아버지와 비슷한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6.25 참전 해외군인들의 멋있는 제복이 내심 부러웠는데 우리도 비로소 참전용사 제복을 마련한 것이다.  

    

'제복의 힘'이랄까. 구순의 아버지는 나이도 잊은 채 허리를 곧추 세우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었다. 마치 출병을 기다리는 용사가 연상됐다. 노병의 아버지는 젊은 군대 시절의 기백을 되살리려고 한참이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1950년 6.25 전쟁 직후 입대해 1967년까지 직업 군인으로 복무한 아버지가 명예제복에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은 뜻밖이었다. 제복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지만 뿌듯한 마음을 애써 숨기지 않는 아버지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감상(感傷)에 젖는 것 같았다.   

  

제복 입은 아버지를 바라보니 불현듯 실향민 아버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아버지는 6.25 전쟁을 맞아 이북에 선산과 가족 모두를 남겨 두고 혈혈단신 월남했다. 전쟁은 실향과 이산의 시작이었다.  

    

아버지 고향은 서울에서 가까운 개성 인근 개풍군이다. 전쟁 전만 해도 대한민국 땅이었다. 아버지가 정전 후에도 군에 계속 남은 것은 전쟁이 다시 개시되면 고향에 금방 찾아갈 수 있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나 깨나 귀향과 수복을 애타게 기다린 지 벌써 73년이 흘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제 만행을 경험하고 해방과 6.25 전쟁까지 겪은 아버지는 기구한 세대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나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것은 6.25 참전용사 등 국가유공자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이다. 나 같이 전쟁의 참상을 겪지 못했거나 전후 세대들이 유감스럽게도 전쟁의 교훈을 종종 폄하하는데 이에 아버지는 ”역사는 사실대로 기억돼야 한다 “고 강조한다. 

    

아버지가 참전을 통해 얻은 또 다른 교훈은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만약 미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피와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점에서 한미동맹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궁극적인 소망은 ‘남북통일’이다. 통일 이후 고향방문과 가족상봉은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다. 이 땅에 다시는 실향민이 없어야 하며 이들이 하루빨리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애’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대물림된 실향민 정체성


아버지는 전형적인 실향민으로 살아왔다. 전쟁 때문에 고향을 등져야 했고 가족상실의 아픔에다 굶주림은 다반사였다. 이처럼 아버지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그의 삶이 다르게 보였다. 외롭고 힘들더라도 실향민은 굳세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과 행동은 어느새 우리 집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고스란히 내게로 대물림됐다.  

  

그렇다고 내가 실향민 가족에 대해 실망하거나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도리어 이산가족의 애환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조그만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나아가 나는 아버지 고향이 ‘내 자랑스러운 뿌리’라 여기고 있다.   

 

실향민 아버지는 살면서 외로운 눈물을 많이 흘렸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 가족을 떠올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내가 어릴 때 들었던 아버지 푸념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소환해 본다. “내게 부모와 형제가 있었다면 뭐든 자신 있을 것이며 더 이상의 행복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태생적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연로한 아버지가 옆에 계시며, 아내와 자식들까지 두고 있지 않은가, 실향민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때로는 헛된 미망에 휘둘리지 않게 따끔한 회초리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 덕에 나는 주리지 않고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향수병’은 전후 지금까지 고향을 그리는 개풍군 군민회원들의 친목을 결속하고 귀향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내가 대를 이어 사명감을 갖고 실향민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아버지 영향이 매우 크다.   

   

끝으로 아버지의 명예제복은 함께 참전한 아버지 전우들을 떠오르게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자주 뵙던 어르신들이다. 몇 년 전까지도 만남과 교류를 지속하셨는데 모두 돌아가셨다. 제복 입은 분은 전우 중에 아버지가 유일하다. 명예제복은 아버지의 '공식적인 외출복'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제복 입은 아버지께서 전우가 잠든 서울현충원을 참배하시도록 도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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