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월요일의 시 읽기

<구구>, 고영민, 2015, 문학동네


시인은 일부러 다른 사람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 살아 보는 사람이다. 다들 자신의 삶을 사는 것도 바쁜데,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자신만을 사는 삶이 결국 자신만의 삶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선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봄으로써 오히려 온전히 자신이 결국 누구인가를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삶은 온전치 않다.


     




반가사유


     


가족을 찾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연을 듣고 있다보면

왜 모두 내  얘기 같지

헤어진 적이 없는 내가 가족과 헤어졌고

손을 놓친 적이 없는 내가

손을 놓쳐버린

기억을 더듬어 커다란 도화지에 그려 나온

네가 살았던 마을

마을 뒤로 기차가 지나가고

담배밭 너머 다리 건너엔 방앗간이 있었다는

그곳, 붉은 함석집

나도 살았던가

왜 모두 다 내 얘기 같지?

방송국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정말 미숙이 맞니?

등에 커다란 점?

맞아요, 맞아요

왜 나만 두고 가버렸어, 엉엉 울면서 따질 때

아직도 나는 그곳에서

옛날의 얼굴로

울면서 옛날의 얼굴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슬픈 사연을 가진 사람에게 공감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나는 이 시의 소재가 되는 프로그램이 무슨 프로그램인지 알 수 없다. 육이오를 상정한 것인지, 실종 아동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슬플 것이다. 시인은 자꾸 왜 내 얘가 같지,라고 물으며 자신의 시인됨을 고백한다. 자꾸 내 얘기 같은 마음. 그것이 슬프구나, 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내 얘기 같은 마음. 그것이 시인의 출발이다. 그는 그 알 수 없는 슬픔의 한 복판에서 길을 잃은 채 울고 있다. 그는 단순히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연의 주인공이 되어 울고 있다. 이것이 다른 글과 시의 차이점이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살아본 적 없는 옛날의 얼굴이 되어 그는 운다.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반가사유>라고 붙였다. 그는 그의 시인됨에 대해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 알 수 없는 시인됨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그는 그를 사로잡는 일상의 슬픔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이 시는 그러니까 이산가족의 슬픔에 대한 시가 아니라 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삶에 이처럼 슬픈지를 고민하는 자기 고백의 시이다. 그래서 이 시는 기교 없이 순박하고 순수하다. 독자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이 작가는 슬픔이 왜 슬픈지를 고민하고 있구나. 이 시인은 자신의 시적 출발이 바로 다른 사람의 슬픔이 속절없이 자신의 삶으로 침투해 버리고 마는 그 속에서 살고 있구나. 이 시가 주는 감동은 시인의 시인됨을 독자에게 너무나 솔직하게, 가릴 것 없이 보여줘 버리는 시라는 것을 느끼는 데에서 온다. 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아마도, 시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비로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게 되는 때이다. 아저씨는 아이를 낳아 기른 적이 없고, 또 태생적으로 어리숙해서, 다른 사람의 삶은 고사하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아 본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어리다. 나는 나의 어림을 반성한다.


     




중년(中年)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중년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어제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옛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고스란히 불려나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닌,

아버지를 부축했다

잠결에 아버지가 내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죽은 아버지가 내 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시는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내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렇게 대체된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피로와 슬픔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온다. 아버지가 아닌 사람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아이가 있어서 아버지의 입장이 되고 보니 아버지를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라는 상투어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의 몸을 더듬는다, 라는 문장도 가능하다. 이 짧은 문장은 ‘아버지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입장을 잘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 선언이다. 아버지를 살면서 아버지를 받아들이겠다는 시적 고백인 것이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 그래서 이런 시도 가능하다.


     




출산

 


화구(火口)가 열리고


어머니가 나왔다


분쇄사의 손을 거친 어머니는


작은 오동나무 함에 담겨 있었다


함은 뜨거웠다


어머니를 받아 안았다


갓 태어난 어머니가


목 없이 잔뜩 으깨진 채


내 품 안에서


응애, 첫울음을 터뜨렸다



이 시의 감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시인의 어머니는 2018년도에 돌아가셨고, 이 시집은 2015년도에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실제 어머니의 화장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시인가. 이 시는 출산과 죽음을 기술적으로 병기하여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 따위가 아니라, 내 생각에, 시인의 자의식이 출산의 장면이 이입된 말하자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죽박죽은 다른 사람의 삶에 이입되어 살아가는 시인이 느끼는 운명 같은 뒤죽박죽인데, 그 속에서 간신히 무엇인가 질서를 찾아내려다 보니 뭔가 의미가 확 와 닿지 않는 어떤 상태의 뼈가 부서져 버린 상태의 어떤 순간을 묘사한 짧은 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행 한 행 띄어 쓰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지만 어쨌거나 불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시의 이 불분명함이 좋았다. 이러한 불분명함을 한 편의 시라고 발표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역시 그 어쩔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구구는 비둘기의 울음을 우는 자신의 시인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이다. 그는 사람으로 울지 않고 비둘기로 운다. 그가 비둘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둘기이면서 아버지이고, 그는 죽은(죽지 않은) 어머니이면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연의 주인공이면서 갓 태어난 딸아이이다. 그는 그 상태에 대해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어떤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그는 심지어 버려진 빈 박스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그래서 빈 박스이다. 시는 그 순간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진다. 이 아름다움은 자신의 삶만을 살아가는 아둔한 아저씨와 같은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너무나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저 골목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행인 1인 반면에 시인은 그 골목의 빈 스티로폼 박스인 것이다.    


     




첫사랑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빈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밤새 그리 뒹굴 것 같아

커다란 돌멩이 하나 주워와


그 안에

넣어주었다





작가의 이전글 화요일의 영화 만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