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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누룽지 Jul 10. 2020

Ep3.나는 오늘도 넘어지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화창한 날씨가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여행처럼 즐거운 게 어딨어?' '즐거우려고 여행에 가는 거 아냐?' '왜 고생해서 여행을 가?'


엉뚱한 답을 내놓은 제목은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나 나는 여전히 넘어지기 위해 여행을 간다. 힘든 길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다시 넘어지곤 한다.


나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하나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굴곡이다. 굴곡진 것은 인생뿐만이 아니라 여행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믿고 있다.


언젠가 하락세를 타다가도 올라오는 상승곡선을 타는 인생처럼 흐린 하늘에 비가 내리는 것도 여행이며,
찬란하며 화창한 날씨가 우리를 감싸는 것도 여행임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여행을 나선다.

때는 2018년 11월. 오스트리아의 찬 겨울이었다. 가족과 떠난 첫 유럽여행으로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슬로베니아로 넘어가기 전 '그랏츠(Graz)'라는 도시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해 가기로 했다.


그랏츠는 을씨년스러운 도시였다. 낙엽이 젖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색감이 어두운 도시의 모습이 그렇게 느껴졌다. 우리가 찾아간 조용하고 한적한 그랏츠의 3시 30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한 백화점 지하에 차를 댔다. ‘Krebsenkeller’ 그랏츠의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한국인들의 방문이 잦은 곳이라고 하여 찾아간 이곳은 조용한 길 안쪽에 자리해 있었다.


식당 내부는 레스토랑 바의 느낌이었고 늦은 점심시간임에도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웨이터는 지금 말로 하면 상남자이면서 본인 식당의 음식에 아주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앉자마자 빠르게 테이블 세팅 후에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메뉴판에 없는 랍스터를 추천해줬는데 그냥 음식을 먹겠다고 했다. (랍스터를 먹었어야 했다.) 생선요리와 샐러드, 리소토를 주문했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보이는 리소또..

받아 든 음식은 정갈하고 깔끔했으나 짜고 조금은 어려웠다. 그 결과 엄마가 주문한 리소토는 한 입을 제외하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영어를 한 마디 정도, 그마저도 겁이 나서 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남긴 음식에 대한 자부심 넘치는 웨이터의 추문은 나에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 말투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감정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누구보다 빨리 백화점 주차장을 향하여 걸었다.

(실제 외부인의 출입금지 구역이었던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허리춤에 권총을 찬 큰 체구의 남자였다.

그의 손이 권총을 향해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내 심장은 터질 것 만 같았으며, 목소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나:'On my way to parking lot'

남자: 'What?'

나:'Parking lot!'

남자:'That way'(길을 잘못 들었음을 똑똑히 각인시켜주었다.)

그사람의 우람한 덩치와 목소리를 상상할 때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심적인 스트레스와 감정의 조절 실패가 쳇바퀴를 돌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우 차에 올라 주차장을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차단기가 우리 앞에서 멈춰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를 뒤로 한 줄을 길게 서있었는데, 후진을 할 수도 없었다. 답답했던 바로 뒷 차의 운전자가 내려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로 쏘아붙혔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 쏘아붙이던 그의 목소리가 더욱 냉소적이고 무섭게 느껴졌다.


결국 그 남자가 뒤의 차 모두를 후진시키고 주차장 정산 기를 따로 이용해 나갈 수 있다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지친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정산기를 향해 달렸다.


되는 일이 없으려니. 핀번호를 정산기에 입력해야 하는 것을 알고는 다시 차로 뛰어왔다. 겨우 빠져나온 주차장에서부터 슬로베니아까지는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랐다.


비가 잦아들던 저녁의 슬로베니아는 한적했다. 숙소에서 오늘의 일은 잊고 내일의 또 다른 해가 뜨길 바라며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 어둑했던 도시에 점점 새파란 하늘이 찾아왔다. 맑은 기분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어제 달린 차가 힘이 없어서 기름으로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주기로 했다.


주유소는 자신이 직접 주유를 하고 마트에 가서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새 기름으로 달릴 준비에 신이 났다. 주유구가 안 맞아서 고생은 했으나, 정산을 마치고 시동을 거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휘발유였던 이 차에 경유를 혼유 한 것이었다.

분명 NO Diesel이라고 쓰여있는 주유구를 무시한 채 계속 욱여넣은 것이었다. 망연자실했다.


비용은 물론이고 우리의 자동차 여행과 일정 모두 포기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어제에 이어 멘탈이 산산조각이 났다.


렌트회사에 연락을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전달이 됐는지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돌아오는 대답은 현지에서 해결하길 바란 다였다. 최악이었다.


주유소에서 겨우 서비스 센터와 연락이 되어 상담을 한참 받고 견인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가족 모두가 패닉 상태였고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자책했다.


아빠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저 조용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나도 지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행의 실패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몰랐고, 내가 또다시 감당해야 할 일정의 실패가 나의 부족함과 책임감의 무게 때문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추진한 이 여행의 끝이 어렴풋이 치켜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니 이것은 더욱이나 첫 가족여행의 단추를 단단히 잘못 꿴 것이었다.


이 순간, 단 이틀 사이에 넘어진 몇 번의 고비로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확신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무엇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울리는 진동만이 그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30분 후, 견인차가 도착했다. 우리 가족은 둘 둘로 찢어졌다. 가는 내내 견인차의 라디오만이 이따금씩 정적을 깰뿐이었다.


나와 아빠만 견인차를 타고 정비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판 모르는 견인소와 장소에 아시아인이라고는 아빠와 내가 전부였다.


언제나 그렇듯 아시아인이 극히 드문 곳에서는 시선이 우리에게로 꽂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정비소의 그들은 호의적이었다.


빠른 서비스와 저렴한 가격으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빠와 정비를 기다리며 아무것도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간판도 없는 식당에서 먹었던 요리를 아직까지도 유럽에서 가장 입맛에 맞는 요리로 손꼽을 수 있다.


정비소에서 차를 타고 3시간 만에 나올 수 있었다. 일정이 밀렸지만 다시 시작했다.


몽환적인 블레드 성의 모습과 다음날의 포스토이나 동굴, 프레드 야마 성의 위용이 실패라고 생각했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아다 줬다.

블레드 성의 몽환적인 모습
돌벽과 같은 색감의 프레드 야마 성. 견고한 위용이 돋보인다.

'피란(Piran)'에서는 화창한 날씨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이 곳에서의 탄성을 지르며 맡은 그곳의 향기와 공기가 온몸에 전율을 일게 했다. '아름답다' 이 한마디만큼 잘 담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 '피란(Piran)'

몇 번의 고비로 넘어졌던 내가 다리에 묻은 흙을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짜릿하게 털어버린 그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다시는 내게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이미 털어낸 마음의 짐이 그리울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후의 짐을 털어내는 짜릿함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토록 그리운 여행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넘어지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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