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작가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추천해 주신 책이라 정성껏 읽었지만 그 심오한 언어의 맛을 느끼기엔 아직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존 욕구와 현실의 무게에 눌린 의식으로 마주하기에는 조금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읽고 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참 많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글을 쓰고 싶다"라는 욕구가 늘 솟구친다. 하지만 막상 쓰려 하면 막히고 만다. 훈련을 게을리한 것 같다. 황현산 선생님처럼 어떤 사안, 사건, 생각에 대해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의 견해와 느낀 바를 막힘없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가 막힘없이 썼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읽다 보면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글에 얼마나 솔직한 마음과 진심 어린 조언을 담았는지.
훈련되지 않은 채 글을 쓰고, 짧든 길든 그 글을 독자에게 내놓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물론 내놓는 것만에 혈안이 되어 온갖 루머와 자극적인 콘텐츠를 동원한 인스턴트식 글은 좋지 않겠지만, 매번 순도 100%의 레시피로 글을 짓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이런 다짐을 한다. 잘 쓰려 하기보다 솔직하게. 그리고 읽는 사람이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만 쓰자고. 그리고 내 글에 대한 지나친 검열은 자제하자고.
-글로 나아가는 이
한국이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가장 빨리 낡아버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는 뜻도 있다. 어제 빛났던 물건이 오늘 낡은 버전이 되어버리며, 내 결정이 모레는 벌써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요란을 떨며 장만했던 가구와 전자 제품들은 손때가 묻기도 전에 돈을 들여 처리해야 할 쓰게 어리 더미로 전락하고, 10년을 살았던 아파트도 거기 쌓인 추억이 없다. 심지어는 주소를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밤은 선생이다 中, 황현산
"빨리, 빨리" 모든 걸 빠르게 하려다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 세계 최빈국에서 가장 빠르게 세계 10위권의 부국으로 올라선 나라. 배달도 빨리, 입시도 빨리, 인생도 빨리. 공부도 빨리, 취업도 빨리, 결혼도 빨리, 성공도 빨리, 노후 준비도 빨리, 입장 정리도 빨리. 인생 정리도 빨리...
우리 국민들 인생에서 느리게 해도 되는 건 뭐가 있을까. 마음은 생각보다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않는데 급격히 멀어진 머리와 가슴의 간극이 지금의 우리를 이토록 힘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말한 한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앞서나가기 보다 머리와 가슴이 함께, 일과 휴식이 함께, 1등과 나머지가 함께 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글로 나아가는 이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 성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 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 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밤이 선생이다 中, 황현산
읽으며 가장 크게 공감됐던 부분 중 하나. 세상의 시선과 사회의 기준을 떠나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는 은밀한 시간을 확보할 것. 나에게도 계명과 지키려 하는 것 중 하나다. 머릿속을 맴도는 수많은 생각들은 결코 그 안을 더 빠르게 회전시키기 거나 새로운 생각을 넣는다고 정리되지 않는다. 오롯이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 정돈이 되기 시작한다.
자연의 질서는 사람이 지은 인공의 무언가로는 결코 깨끗히 회복될 수 없다. 또 누군가의 숨겨진 욕망을 통해 쾌쾌한 시멘트 가루와 플라스틱 봉투로 변모할 뿐이다.
숲이 숲이기 위해서는 흙이 아닌 것들을 들여서는 안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시도는 숲을 파괴할 뿐이다. 숲을 찾고 싶다면 숲을 떠난 후 숲에게 은밀한 시간을 주면 된다. 그건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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