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 오현 선시'를 읽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숲, 오현 스님
내 말을 잘라버린 그 설도 참마검
내 넋을 다 앗아간 그 요염한 독버섯도
젠장할 봄날 밤에는 꽃망울을 맺더라
-봄의 역사, 오현 스님
살다보면 참 별 것 아닌 듯한 일들도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고 떠올려 보면 웃음만 나지만, 당시에는 왜 그리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또 "그려려니 언젠가 지나가겠지"하며 많은 일들을 흘려보낸다.
오현 스님의 시들이 그랬다. 정원의 화려한 꽃도, 도시를 밝히는 네온사인도 아닌, 저 깊은 산 속 흙의 기운을 머금고 돋은 새순처럼 맑고 짙었다. 불도에 몸을 담고 문학에 이름을 올린 스님들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나치게 깨긋하고 단순하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수도승이나 성직자들의 깊은 삶이 점점 궁금할 때가 많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우리 어머니께선 학창시절 내게 신부가 되면 좋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어머니께서 왜 그러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들의 심성과 성향을 가장 잘 아는 엄마였기에 오히려 부모라면 하기 힘들 수 있는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글로 나아가는 이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어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에서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도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中, 오현 스님
일본 임제종의 다쿠안 선사는 항상 마른 나뭇가지나 차가운 바위처럼 보여
한 젊은이가 짓궂은 생각이 들어 이쁜 창녀의 나체화를 선사 앞에 내놓으며 찬을 청하고
선사의 표정을 삐뚜름히 살피니 다쿠안 선사는 뻥긋뻥긋 웃으며 찬을 써내려갔습니다.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밤마다 물 위로 달이 지나가지만
마음은 머무르지 않고 그림자 남기지 않는도다.
-나는 부처를 팔고 그대는 몸을 팔고, 오현 스님
우리가 원하는 진짜 행복은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면 '마음'에 있다는 뻔한 소리가 나온다. 아무리 식상하다 해도 이만큼 확실한 진리가 어디있을까. 앞서 말한 세상 모든 일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구태여 높은 수준의 고귀함을 쫓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구질구질하게 삶을 비관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삶. 일상,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성실히 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찾아오고는 한다.
하지만 그 행복을 또 계속 잡아둘 순 없다. 한마리 철새처럼 마음의 계절과 온도가 합이 맞으면 찾아오는 터, 떠날 때는 또 마음 편히 보내줘야할 일이다. 하지만 글은 이렇게 써도 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행복.
오현 스님은 2018년에 타계하셨다고 한다. 그의 시가 남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하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다. 스님, 좋은 산새 같은 시들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로 나아가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