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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08. 2024

당신이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나도 그래. 하지만..

류시화 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를 읽고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 아름다움을 보려 노력하라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니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과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 온전히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가지에서 미소 짓지 않는 꽃은 시든 꽃'


-류시화 시인,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中


끝없이 고민하거나, 빨리 털어버리거나...  물밀듯 몰려오는 모든 생각을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아니, 아니다. 이런 끔찍한 생각이 또 어디 있나? 인간이 컴퓨터인가? 지금 드는 생각들조차 걷잡을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또 한편으론 축복이다.


10년 전(23세경)만 해도 난 내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의 삶이 잘못됐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순간순간 최선의 다해 선택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지금의 나와 삶을 만들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현재의 삶에 100% 만족한다고 선뜻 말하진 못하겠다. 그저 흙과 같이 흩어진 순간에서 꽃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할 뿐이다.



AI 화가 '달리(DALLE)' 그림

 



● 새의 가벼움으로 인생을 날아라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 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짐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 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 있지. 두려움과 자기 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 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류시화 시인, '깃털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으로' 中


내게는 생각을 무겁게 만드는 습관이 있다. 이는 나의 성향이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이기도 하다. 자기 상담과 메타인지를 시작한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알아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동굴. 때론 그 탐험이 지나치게 삶을 어둡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요즘은 의식하고 행동함으로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려 노력한다. 3번 생각할 것을 2번만 생각하고, 1번은 먼저 움직인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행하는 새처럼, 머리는 무겁더라도 몸은 가볍게 말이다.


몸을 움직이다 보면 머리도 어느새 가벼워진다. 이내 잡생각은 사라지고 해야겠다는 의지만 남는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호흡도 안정된다.


무겁게 생각해서 해결될 일이 뭐가 있을까? 무거울지, 가벼울지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AI 화가 '달리(DALLE)' 그림




● 찾아오지 않으면 '찾아간다는 마음'으로


고통은 주로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이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비록 이것을 깨닫는데 생의 반이 걸렸지만, 꽃이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삶에서 고립을 경험하고, 그때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나름의 몸짓을 한다. 우리에게는 그 몸짓을 읽는 연민과 공감의 눈이 필요하다. 홀로 된 그녀의 싸움 역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비록 방법은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그 몸짓이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어요. 나는 연결되고 싶어요.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에요."


-류시화 시인, '찾아오지 않으면 찾아가기' 中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고립이 길어질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기도 더 쉽다. 물론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고 해서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세계가 지나치게 깊어지면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부쩍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면, 그건 누군가와 제대로 연결된 느낌을 받지 못했거나 같이 있으며 상처받았다고 느낀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생각이 다르거나 수용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관계가 많아질수록,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나를 자꾸 더 고립시킬 뿐이었다.


수용해 주면 고마운 것이고, 아니어쩔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모두에게 수용받을 순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인정하면 편하다.


저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를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발버둥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내가 먼저 연결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관계도 한 층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AI 화가 '달리(DALLE)' 그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축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주어야 한다.(조셉 캠벨)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시키는 것과 같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플랜 A보다 플랜 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 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 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류시화 시인, '플랜 A는 나의 계획, 플랜 B는 신의 계획' 中


예전에 한 종교인에게 들었던 일화가 떠오른다. 천주교 수도원에서 신부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는 수도자들은 "계단을 아래서부터 위로 쓸어라"는 지시에도 그 말을 따른다는 것이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듣고 처음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단은 당연히 아래에서 쓸어내려야 하는데도 그 말을 따른다니...


하지만 이유를 들어보니 조금은 이해가 됐다. 바로 예비 수도자들에게 교의 규율과 수칙을 따르는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삶의 규칙과 생각과 아집을 벗어던지고 오직 신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수도자가 아니지만, 때론 우리에게도 그런 수도자식 훈련이 필요해 보인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아집과, 내 뜻대로 돼야 한다는 욕심으로 고통받고 있는가? 그리고 때론 그 욕구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를 압박으로 몰아넣는가?


내 뜻대로 돼서 정말로 잘 된 일이 무엇인지, 그 결과는 정말 잘 된 일인지 번쯤 고민해봐야 한다.


AI 화가 '달리(DALLE)'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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