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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간이지만, 너도 인간이야" 그럼 어떡해?

인간을 혐오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우리는 인간이다

by 글로


간만에 극장에서 마주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그의 작품 중 최근에 재개봉한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2003)'를 보고 왔다. 아주 오랜만이라 그런지 여운이 깊게 남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그렇다. 심오하고 어렵지만 영화가 끝난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짧고 더 짧게 모든 콘텐츠들이 빠르게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시대에 한 작품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란 쉽지 않다. 특히 하나의 서사시로 여운을 남기려면, 인간의 본성을 아주 깊게 파고드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작품이 뭘 말하려는지 답을 알려줘선 안된다. 그런 측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을 소재로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게 만든다.


재작년에 보았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도 그랬다. 일상을 떠난 새로운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다양한 인간상. 욕심을 지닌 인간에게 느끼는 혐오까지.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을 향한 애정.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야자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사는 세계를 떠나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가 현실에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게 아니겠지" 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영화 '원령공주' 中, 아시타가


늑대와 함께 살아온 원령공주는 숲을 파괴한 인간이 끔찍이도 싫지만 결국 자신도 인간이란 사실은 결코 부정하지 못한다. 지나친 감정 이입일지도 모르지만 나 또한 그럴 때가 있다.


사람이 싫어 한동안 도시를 떠나고 싶은 순간이 온다. 그 미움은 종종 나 자신에게로 번지기도 한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욕심과 무관심으로 물든 마음이 심연 속에 비칠 때가 있다. 지하철 역사 내에 고갤 푹 숙인 채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힐긋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때, 그 순간 나는 무관심을 품은, 그 옆을 지나친 수천 명의 인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왔고, 무관심이란 차갑다 못해 냉기가 흐르는 일종의 (정신적) 죽음을 마주한다.


난 원령공주가 늑대의 딸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모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악한 모습을 보고 그걸 역겨워하고 또 자신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시타가(극 중 남자 주인공)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원령공주에게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시타카를 신뢰하게 된다. 원령공주는 "아시타카는 좋지만 인간들은 싫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아시타카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마음을 연 것이니까.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인간을 미워하고 혐오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때론 참 별로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기적이고 파괴적이고 지루하고 인위적이고 부질없어서. 하지만 어렵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건 또 아니니까. 원령공주나 자연인들처럼 숲에 들어가 살 용기는 없기에. 어떻게든 인간으로서 인간(나 자신을 포함한)을 혐오하고, 때론 또 인간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더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존재의 무게가 이렇게 가볍게 또는 무겁게 느껴질 수가. 모르겠다. 내일이면 또 나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 순간도 금세 별일 아닌 일에 행복감과 감사함으로 바뀔 테니까. 인간으로서 인간을 바른 뉸으로 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어려운 일이다.


영화 '원령공주' 中, 원령공주와 두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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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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