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가면 꼭 봐야할 명소들
세상에 태어나 살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몇 개나 될까. 나는 지금 측정할 수 없이 큰 우주에서, 그 속에서도 생명체가 있는 행성, 지구의 아주 작은 나라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봐도 많은 게 달라 보인다. 주어진 삶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은 지극히 일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선택'은 참 어렵다. 인생은 'Birth(탄생)'과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에 달려있다고 하는데 완벽한 선택은 또 없다고 하니 말이다. 매일 맞이해도 익숙치 않다. 하지만 그 선택 하나가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이 얼마나 두렵고 기이한 일인가.
여행에서 마주한 파리에도 선택으로 이뤄낸 역사와 예술이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생트샤펠과 개선문은 특히나 아름다웠다.
파리 1구의 중앙에 위치한 생트샤펠 성당은 고급스러움 그 자체다. 여러 건물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 멀리서는 선명히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지붕이 뾰족하게 솟아 다른 건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생트샤펠의 창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화려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가지만 무려 1000개가 넘는데 구약성서의 장면과 예수님의 가시면류관 조각 같은 성유물을 성당으로 가져오기 위한 여정들이 기록돼 있다.
화려함 속에 새긴 믿음의 역사, 루이 9세는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창에 새겨진 그림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신에게 바치고 싶었던 선물, 신에게서 얻고 싶었던 선물. 당시 믿음의 중심은 어디에 있었을지가 궁금해졌다.
이튿날 저녁, 프랑스 혁명의 기념비이자 역사의 상징인 '개선문'을 만나러 갔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오는데 얼음장 같은 공기가 코를 스쳤다. 칼바람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개선문 앞에는 도로 양 옆으로 그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오~ 샹젤리제~" 하고 어릴 적 불렀던 샹송의 본거지다. 개선문은 파리에 있는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다. 영화 '존윅 5'의 치열한 격투씬에 나왔던 바로 그 문이다.
개선문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그리고 아주 정교했다. 사방에는 프랑스혁명과 전쟁 영웅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모습은 바로 전장에 나서는 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마치 그 순간을 멈춰 봉인해 놓을 것 같이 말이다. 물론 어떤 역사도 그렇듯 미화된 이야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흠 없는 권력과 완벽한 영웅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역사의 한 장면을 도심 한 복판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들에게는 큰 복이 아닐까.
개선문을 등지고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매웠다. 춤을 추는 흑인 친구들부터, 꽁꽁 언 손을 녹이며 서로를 꼭 껴안은 아메리칸 커플, 히잡과 패딩으로 온몸을 싸맨 채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아랍인 가족까지. 그들 위로 가로수를 두른 전구의 불빛들이 환하게 빛났다. 샹젤리제 거리 중앙 한쪽에는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의 매장이 있다. 화려한 가방 모양으로 누가 봐도 루이뷔통 건물임을 알 수 있다. 2km여 걸었을까. 샹젤리제의 끝이 보였다. 뒤돌아보니 저 멀리 개선문의 자태가 보였다. 차도를 아슬하게 넘나들며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칼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인증샷을 남겼다.
숙소로 가기 전, 출출함에 식당을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영웅들이 안식하는 낙원의 평원'이라는 의미의 샹젤리제. 그곳은 파리의 낙원이었지만, 배가 고픈 이방인에게는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반쪽 짜리 낙원에 불과했다.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다.
12월 25일,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향한 곳은 '순교자들의 언덕'이라 불리는 '몽마르트르'였다. 오래전 가톨릭의 한 주교가 이 언덕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해가 진 후의 몽마르트르는 치안이 별로 좋지 않다는 말에 낮으로 일정을 잡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화려하지만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당대의 정치적 타락을 종교적 의미로 승화한 이 건물은 속죄와 참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몽마르트르로 가는 길, 하늘이 정말 맑았다. 그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을 만큼 예뻤다. 골목과 계단, 주변의 건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쭉 뻗은 길 위로 펼쳐진 하얀 구름과 그 사이를 옅게 채운 색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몽마르트르에서 영감을 떠올렸던 예술가들의 심정도 이랬을까. 물론 그때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만 자연은 늘 같은 풍경을 보여줬을 테니, 그들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몽마르트르에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는데, 한 잡상인이 능글맞은 미소로 하트 모양의 자물쇠를 건넸다. 언젠가 남산에서 보았던 상술이다. 여행 전 길거리에서 파는 건 절대 사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10유로? 하나 남기고 갈까?"
"음... 그래!"
머나먼 이국의 언덕에서. 우리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올지도 모르니. 그때에 이 흔적을 다시 본다면 어떨까? 다시 올지도 모르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에는 '사랑해 벽'이 있다. 수백 개의 언어로 기록한 사랑. 순교자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의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내 안에도 저렇게 넘칠 만큼 많은 양의 사랑이 있으면 좋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기를. 고갈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을 축적해 놓고, 그녀가 지칠 때마다 꺼내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