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사성, 나보나 광장 그리고 맥도널드?
3월의 끝자락, 서울에는 봄이 오고 있다. 새벽의 스산한 바람은 따스한 햇살과 함께 포근한 온기로 바뀌고, 나무들은 꽃피울 준비를 한다. 꽃봉오리가 곳곳에 보인다. 봄이 오는 것만으로 우리의 감각은 살아난다. 로마에서의 하루하루도 그랬던 것 같다. 낯선 도시는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곳곳에 세워진 유적들을 보며 쉴 새 없이 걸었다. 생각해 보면 12월임에도 날씨가 초봄처럼 포근했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처음에 신혼여행지를 선택할 때, 난 동남아 같은 휴양지나 노르웨이 같은 대자연을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럽을 꼭 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특히 파리의 에펠탑 스냅에 꽂혔다. 나도 한 번쯤 가보고 싶었지만 물가가 비싸고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기에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걷고 또 걸으며 유럽의 역사를 직접 느끼고 나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황제가 군림했던 로마에서는 걷는 내내 그들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판테온 신전 다음으로 들른 '성천사성(산탄젤로성)'은 첫인상부터 웅장했다. 이건 서울 강남에서 본 거대한 빌딩과는 전혀 다르다. 고층 빌딩이 네이비색 양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동양의 신사 같다면, 성천사성은 고대 컴투사의의 복장을 하고 앉아있는 백발의 철학자 같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현자의 느낌이라고 할까.
성천사성이라는 이름은 '성스러운 천사의 성'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590년 무렵, 당시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성 위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는 환시를 보았다는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s://maps.app.goo.gl/4Z8TNcJhPKaHGu2g8
로마 도심을 흐르는 테베레강을 건너 성천사성으로 들어가는 성 천사의 다리에는 천사의 형상을 한 많은 동상이 서 있다. 그들은 마치 성을 지키기라도 하듯 지나는 행인들을 내려다본다.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 쌓인 성 꼭대기에는 검을 들고 있는 미카엘 천사의 동상이 있다.
성천사성 안은 거대한 요새 속 미로처럼 되어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통로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는 구조다. 이 건물은 로마의 역사를 담고 있다. 황제의 무덤에서 요새로, 또 교황의 피난처로, 그리고 현대에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여러 고궁들과 같이 오랜 역사를 담고 있다. 파리의 루브르가 그랬듯 정치와 종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성 곳곳에 난 구멍과 훼손된 형상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워낙 크다 보니, 성천사성에서는 로마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프랑스 파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해 질 녘이라 그런지 분홍빛 하늘과 회색빛의 도시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어떤 도시만의 색깔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서로 다른 역사를 품고 살아왔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또 거기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니까.
성천사성을 나오니 시계는 오후 5시 해가 지고 있엇다. 유럽의 해는 짧다. 일정을 짜두었던 '나보나 광장'으로 향했다. 로마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나보나 광장에는 거대한 분수가 3개나 있다. 이 광장은 로마가 황제의 도시에서 교황의 도시로 바뀌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초기에는 운동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광장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https://maps.app.goo.gl/h9HJtsgLjPtUXGPs8
사대강 분수는 전 세계에 있는 4개의 강(나일강, 다뉴브강, 갠지스강, 리오 데라 플라타강)을 상징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상당히 거대하다. 4개의 강의를 거대한 동상으로 의인화해서 묘사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분수 중앙에는 삼각형 모양의 긴 탑이 있는데 이는 '오벨리스크'로 이집트의 기념비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당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이다. 분수대 위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이유는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력과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교황 권력의 상징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모든 문명은 강의 발달과 함께 시작됐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한강을 포함해 정말 다양한 강이 있는데 강이 많이 흐른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어떤 지역을 가던 강을 만날 수 있다. 도심 사이로 흐르는 강을 보면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결국 참지 못하고 김치를 찾았다. 낮동안 먹은 젤라토와 젤리의 여파였을까. 독특한 디저트였지만, 다시 한식이 당겼다. 하지만 근처에 한식은 없었다. 구글맵을 뒤지다가 숙소 옆에 있는 한 일본 라멘집을 찾았다. 저녁이 되니 날씨도 쌀쌀했다. 서울보다는 훨씬 따뜻했지만 겨울은 겨울이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매콤한 국물을 허겁지겁 삼켰다. 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능글맞고 친절한 종업원 아저씨는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옆 테이블에는 동남아 쪽 나라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가족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녀가 남긴 면은 나의 몫이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라멘집에도 역시 김치는 없었다는 점이다. 집 냉장고에는 늘 가득 차 있어 든든한 김치가, 이 넓은 로마땅에는 왜 없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참 웃긴 일이다. 늘 김치를 제공해 주시는 장모님과 어머니께 감사를 표한다.
한 가지 더 신기했던 게 있다. 로마 시내에는 맥도널드가 많다. 핵심은 햄버거 세트 메뉴에 감자튀김이 아닌 샐러드가 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신선한 채소를 감자튀김 대신 먹을 수 있다고? 심지어 샐러드에 올리브 오일도 충분히 제공해 준다. 채소 공급이 아주 잘되는 건가? 별 일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