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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Aug 28. 2019

'사랑의 기술'을 읽고

에리히 프롬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이란 뭘까?" 드라마 '연애시대'에 나온 대사다. 이런 생각, 당신도 한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던, 연인에게던, 친구에게던,


나는 삶에서 '사랑'이 가장 중하다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 전부일 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말하는 사랑은 남녀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요즘 그 아픔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느낀다. '사랑'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사랑의 실체는 뭘까? 사랑이란 뭘까? 사랑에도 기술이 있을까? 그럼, 사랑도 배워야 잘 할 수 있는걸까?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서로 전혀 모르고 지냈던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흥미 있는 경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고립되어 사랑 없이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멋지고 기적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특히 성적 매력과 성적결합에 의해 주도되고 이와 결합될 때 더욱 촉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랑은 그 성격상 지속적이지 못하다. 
사랑의 기술 中



                       

우리는 살면서 각자의 부모, 친구, 연인에게 '사랑'을 받고,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곤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틀이 형성되고, 그것이 사랑의 실체라고 서서히 믿게 됀다. 하지만 한 관계의 울타리를 벗어나 또 다른 사람과 만나면, 자신이 생각하던 사랑과 전혀 다른 사랑의 모습을 보고 부딫히고, 때론 그 괴리감을 견딜 수 없어 떠나기도 한다. 최초의 사랑의 경험, 감정, 느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닐수도 있는데 그 순간 감정의 강도만 보고 그게 사랑의 전부인 양 심취하는 것이다.  



                                   

그들은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 있다'는 것을 그들은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다.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없을 것이다.
사랑의기술 中



                           

사랑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몇번의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이는 사랑에 지친 게 아니라 사랑을 더 잘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라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랑 잘 한다'는 말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잘 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싸우지 않는 관계? 철저히 이성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관계? 낭만적이고 즉흥적인 관계? 기준이 애매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주변에 꼭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이 한두명씩 있다. 그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중략)...
시장형의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 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사랑의 기술 中



     


                                 

사랑의 능동성,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능동적이다. 살아서 움직이고, 생명력을 띄고 있어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려 한다. 스스로 움직인다. 사랑의 본질이 능동성, 즉 '주는 것'에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에는 '나는 너를 위해 나의 소중한 뭔가를 줄 수 있다'는 말이 내포돼 있다고 믿는다. 주는 것에 인색해질수록 우리는 마음을 더 꽁꽁 싸맨다. '나'를 보여주기 싫어하고, 타인과의 깊은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 나의 속을 내보였을 때, 상대가 칼을 꼽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있냐, 없냐의 기준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모든 인간은 한 가지의 동일한 문제의 해결에 직면해왔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루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는 동굴에 사는 원시인에게도, 양떼를 돌보는 유목민에게도, 이집트의 농부에게도, 페니키아의 상인에게도, 로마의 병사에게도, 중세의 수도사나 일본의 사무라이에게도, 현대의 사무원이나 공장 직공에게도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사랑의 기술 中

  



분리불안, 무엇인가와 떨어진 느낌, 외로움, 공허감, 인간은 누구나 분리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는 최초의 경험에서부터 점차 쌓여, 동일한 일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럼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만일 내가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을 갈망해야 하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한 상황에 대해 민감해져야 한다. 
사랑의 기술 中



                            

그동안 '사랑'이 '빠져드는 것, 순간의 충동, 불안을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삶을 경험하며 자꾸 느끼는 건, '사랑의 완성'은 앞에 말한 것들과는 분명 다르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며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해와 편견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리고 새삼 '사랑'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사랑은 도대체 뭘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살아받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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