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적이라서, 그래서 좋아

비를 알았던 유일한 시절의 이야기

by 글로


▲비가 좋은 이유


아침이 촉촉이 젖었다. 머리 위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하루가 시작됐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힘껏 숨을 들이켠다. 비가 온다. 비를 느낀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긴다. 나 또한 젖을 수 있는, 그리고 때론 흠뻑 젖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실감한다.


비는 자연의 외침이다. 온갖 회색 건물과 휘황찬란한 불빛을 무기력하게 만드니까. 그래서 좋다. 때로 비는 인간의 욕구를 좌절시킨다. 비를 맞으며 섹스를 하는 인간은 없는 것처럼.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에 여기저기 지붕 아래로 몸을 피하는 인간에게, 비는 말한다.


"언제까지 앞만 보고 달릴래? 조금 멈출 때도 되지 않았어?"


라고.


비가 오면 유난히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적 비를 참 좋아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비가 강압적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비가 왜 강압적이냐고?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연인도, 대통령도, 재벌도, 그 누구도 비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오면 하늘 아래 모든 이들은 겸손해진다. 그래서 좋다. 당신도, 나도, 누구도 거부할 수 없기에. 다 함께 작아질 수 있으니까. 우리는 한낱 인간이라 서로 의지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비를 알았던 유일한 시절


'비'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억수 같은 비를 맞았던 날. 비가 오면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


7살쯤이었나, 우리 가족은 시골에 갓 지어진 신식 아파트(당시는 최신식이었다)로 이사를 갔다. 당시 막 이사를 온 사람들이 많았다. 동네 앞에는 큰 못이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그 못을 따라 둑길을 넘어야 했다. 학교를 오가면서 연못에 있는 도롱뇽도 구경하고 큰 느티나무 아래서 쉬어 가기도 했다.


고향, 경북 경산시 진량읍 황제리 창신황제아파트 황제못


당시 막 이사를 와서 알게 된 이웃 중에 '솔이'라는 누나가 있었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우린 자주 같이 놀았다.


어느 날은, 혼자 단지 앞 공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원래는 빗방울을 보자마자 집으로 도망가는데, 왠지 그날은 그러기가 싫었다.


비를 맞으며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솔이 누나가 보였다. 아마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난 이미 흠뻑 젖어 있었고, 우린 비를 맞으며 같이 놀기로 했다.

"같이 놀래?"

"음, 집에 가야 하는데... 그럼 조금만 놀자!"

그냥 비를 맞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거센 빗줄기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린 비와 하나가 된 채 동네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정말 미친것처럼 물장구를 쳤다.



한참이 지나고 빗줄기가 잦아들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감기를 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솔이 누나는 다시 이사를 갔다. 금방 왔다가 떠나버렸다. 그때 그 소나기처럼.


그때의 기억은 삶에서 가장 강렬한 추억 중 하나로 여전히 남아있다. 비와 하나가 됐던 유일한 시절.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게 비와 하나가 될 순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더 그립다.


생각해보면, 그날의 비도 강압적이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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