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나아가는 이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 中, 심보선 시인
심보선 시인을 알게 된 지는 좀 됐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고 시집으로 만나 뵙고 있다. 일전에 토크 콘서트에서 그의 실물을 본 적이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다. 아저씨의 시에는 아저씨만이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으니까.
그의 시를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평소 내가 느낀 감정들을 너무도 선명하게 기록해 준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소외된 장면,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갑작스레 떠오른 망상, 하지만 속을 헤집어보면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하는 그런 세계. 모든 걸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는 느낄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맘에 와닿았던 구절들을 공유하려 한다. 시를 읽을 때는 모든 에너지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야 한다. 심호흡을 하듯 계산하지 않고 가장 슬펐던 자신을. 그리고 그 순간을 떠올려야 한다.
"나는 아이가 없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 앞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애야, 하고 불러 멈춰 세운다는 것은,
그때 저 앞에 정지한 그림자가 내게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룩임을 알아챈다는 것은
아이의 머리칼에 붙은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다는 것은"
-축복은 무엇일까 中, 심보선
요즘 길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가는 아이를 보면 왠지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저 조그만 아이가 한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서 태어나 저렇게 생동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명의 신비'라는 말은 이런데 쓰는 게 아닐까 싶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독서의 시간 中, 심보선 시인
우리는 이력서에
특기는 돌발적 충동
경력은 끝없는 욕망
성격은 불안장애라고 쓰고
그것을 면접관 앞에서 깃발처럼 흔들어요
그리고 제 발로 문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거예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지독히 외롭게.
-예술가들 中
예전에 시인의 이력서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부서지지 않는 문장을 배우고 싶다. 시인의 이력은 언제나 가난하나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썼었다. 나에게 질문한다. 너는 지금 시인인가? 증거는 무엇인가? 알 수 없다. 내가 시인이라는 증거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리고 먼 훗날 쓸 시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구토를 하세요. 회오리치는 성운을 변기 속에 창조하세요. 그대 화장실의 여호와여.
웃는 얼굴에 침을 뱉어라. 당신 아버지의 얼굴이라면 더더욱.
오늘의 과업. 적막해지고 적막해져라. 절망이 그대를 환대할 때까지.
세상의 모든 법이 권장하는 마약이 있습니다. 바로 행복 추구의 권리라는 것입니다.
맘껏 처드세요.
-브라운이 브라운에게 中, 심보선
격정, 분노 등 거친 감정을 쏟아내고 싶을 때가 있다. 분명하다. 시를 통해 나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때론 행복하려고 과하게 노력하지 않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
왜 시를 쓰세요? '그냥'이라고 답한다. 그냥이라는 말은 파도처럼 가슴에 서서히 와닿는다. 짜다. 그리고 때론 달다. 차갑다. 또 때론 뜨겁다. 마치 사정 후 한없이 식어버리는 정액처럼. 생명의 간극이란 그런 게 아닌가.
아무렴, 심보선 시인의 시집은 오랫동안 나의 책장에 꼽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