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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Jun 03. 2023

외할머니의 시화집

닳고 닳은 인생, 그 삶을 닮은 시

▲글쓰기 저항감 줄이기


오래간만에 쓰는 글. 최근 글쓰기에 대한 저항감이 높아졌다. 원치 않는 활자를 많이 접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핑계인 것 같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도 유튜브를 보거나 멍을 때리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한다. 나이가 들수록 핑곗거리만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 같다.



글을 완벽하게,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이 글쓰기에 대한 저항감을 높였는 지도 모른다.


강원국 작가는 그랬다.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쓰는 사람 같은 건 없으며 오직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쓰는 사람의 향기만이 남는다고. 이 말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외할머니의 시화집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글쓰기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글이 주는 신비한 능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 더 크다. 글이 무슨 신비한 능력을 가졌나 싶겠지만 오랜 경험상 글은 분명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독서나 글쓰기를 통해 편안함을 느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얼마 전 다녀온 외할머니댁에서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요 근래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께선  늘 학교 공부를 하고 계신다. 


특히 산수와 한글에 열정적이시다. 가끔 수학 문제풀이를 옆에서 도와드리곤 하는데 한 문제도 빼먹지 않고 꼼꼼히 푸시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할머니의 열정에 마음이 겸허해진다.



외할머니께선 시화전에 낼 시 쓰기 숙제를 해야 한다며 불쑥 내게 도화지 크기의 큰 종이를 내미셨다. 그리곤 자신이 불러줄 테니 대신 적어달라고 하셨다.


단호하면서도 순수한 할머니의 요청에 불러 주시는 글을 가만히 적어 내려갔다.


"공부하고 오니 마당에 풀이 많다.

뽑아도 뽑아도 필요 없는 풀이 많다.

공부도 끝이 없는 것처럼 풀도 끝이 없다.

선생님, 저는 손이 아파서 글을 못써요.

손이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단양 소백산 학교, 81세 황00




몇 년 전 손을 다치신 할머니는 도통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글을 쓰기가 힘들다고 하셨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손이 튼튼했던 젊은 시절에는 홀로 네 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공부할 여유가 없으셨을 터, 그 손은 온통 자식들의 삶에 바쳐졌다. 어쩌면 고장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짧은 시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 5줄의 문장이 외할머니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이런 게 좋은 시인가 싶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그리고 글쓴이의 삶을 담을 수 있는 것.


외할머니의 책상 위에 놓인 시화집을 펼쳤다. '단양 소백산 문학 학교 시화집'.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써 내려간 할머님들의 시를 읽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황혼의 때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신의 삶에 건네는 작은 위로와 격려. 근래 내가 고민했들이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겠구나 하는 용기도 얻었다.




삶의 많은 것을 경험한 할머님들의 시에는 그 어떤 허영이나 포장된 표현이 없었다. 마치 아이들의 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슴에 포근히 스며들었다.




충북 단양의 전경. 대교와 단양강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도 저렇게 깨끗하고 맑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쓰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어렵다. 지금의 내가 할머니처럼 오랜 세월을 담은 글을 쓸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 속에서 이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경험들을 아름답게 담아낼 순 있을 것이다. 광활한 자연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새로운 경험이든, 아픈 상처든, 무엇이 됐든 삶을 어여삐 담아낸다면.


글쓰기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고 내 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해 주신 외할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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