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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Sep 22. 2023

#2 이별이 남긴 것들    

[연재] 사랑, 낭만 혹은 현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아왔을 때 소희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다. 3달이란 시간은 그녀를 잊기에 충분했다. 아니, 3달도 아니다. 단 한 순간. 하루 만에 잊었다. 잊으려면 잊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방학 동안 답답한 가슴을 털어내기 위해 배낭여행을 떠났다. 불쑥 떠난 여행은 정말 좋았다. 그렇게 모든 걸 털어낸 줄 알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어느 날 오후, 어머니가 갖다 주신 사과를 먹으며 글을 쓰고 있었다. 사과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맛은 달았다.




"올해 과일들은 왜 이렇게 상처가 많니?"  

"그러게요..."


때부터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기쁜 일이든 아픈 일이든 기록해놓지 않으면 모두 기억 저편으로 증발해 버린다는 걸 알게 됐다. 소희는 소나기처럼 왔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잿빛이 맴도는 창 밖에는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창틀 너머로 오래 문을 닫은 유치원의 하얀 대문이 보였다. 빗물들은 대문 앞으로 힘껏 추락했다. 한동안 시꺼먼 아스팔트 위로 투신하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혼자 거실에 누워 있었다. TV 소리가 주문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옆으로 돌아누워 멍하니 창 밖을 보았다. 진남색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이 부풀어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가에 눈물이 고여왔다.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분명 괜찮았는데, 범람하듯 눈물이 자꾸 흘렀다.



방에 계신 어머니께 들릴까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신음을 으로 집어삼켰다. 그렇게 30여분을 울었다. 그리움이었을까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나온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날 이후 내가 소희를 조금 덜 생각하게 됐다는 것.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거나 기억 속에서 지우려 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불쑥 떠난 배낭여행은 정말 좋았다. 당시에는 한창 저속행 기차를 타고 몇 날 며칠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지금과 다르게 낭만이 조금이나마 살아 숨 쉬었던 시절. 낭만은 필히 불편함과 기다림을 동반한다. 스마트폰과 고속열차와 같이 빠른 세상 속에서는 낭만을 붙잡아놓을 수 없다.


어쩌면, (여행이) 좋았다는 표현보다 편안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 지도 모른다. 편안했던 건 일상을 떠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희는 나의 일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희가 떠난 후 한동안 내게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인터넷 카페에서 함께 여행할 일행을 구했다. 방학이라 이내 많은 댓글이 달렸고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동행이 꾸려졌다. 미용을 공부하는 22살의 여학생 미희, 여행에 미쳐 있는 23살의 자유로운 영혼 수아, 취업을 준비하는 26살의 정훈까지.



밤이 저물지 않은 새벽 4시, 정동진으로 떠나는 새벽기차를 탔다. 밖은 온통 초겨울의 한기로 가득했다. 내가 산 여행용 티켓으로는 정해진 좌석 없이 빈자리에 앉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였지만 쥐색의 두터운 바람막이 하나만 걸쳤다. 소희와 함께 맞춘 옷이었다. 우린 함께 그 옷을 입고 캠퍼스를 누볐다. 옷은 증표였다. 캠퍼스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오직 바람막이와 서로 뿐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빈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입지 않은 바람막이에서 쾌쾌한 냄새가 났지만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옷을 계기로 소희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떠오르면 그때 마음껏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스치는 창 밖으로는 산들 너머로 태양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일정한 속도와 높이로 태양이 나를 따라왔다. 난 그 빛을 보려고 억지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낭만에 대한 집착. 그 버릇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지하철이 한강을 지날 때면 풍경을 내 안에 잡아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때마다 '오늘 하루도 잃어버린 게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잠깐 잠에 들었다. 한층 강해진 햇살이 나를 깨웠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카페에 올렸던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저, 동대구역에서 탔어요!' 발랄한 문체의 주인공은 수아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기차는 만석이었다. 배낭을 꺼내 수아가 있는 입석칸으로 갔다. 구석 한편에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선 이어폰을 꽂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오랜 방황을 즐겨온 방랑자 같았다.


"안녕하세요."


수아는 수줍은 듯 작은 목례를 건넸다. 그 후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아무 말없이 구석에 앉아 각자의 음악을 들었다. 2시간여 흘렀을까 기차는 거대한 계곡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굽이진 철로를 따라 정해진 종착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의 숨소리는 한없이 편안했다. 창가로 드러난 기차의 옆태는 마치 거대한 공원을 산책하는 조랑말 같았다. 내가 어릴 적부터 기차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기다림 속의 편안함이 있어서. 승강장에서, 주어진 객실에서, 그리고 우리가 만날지도 모를 종착역에서.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존재에 대한 기다림. 어쩌면 그건 기약 없이 떠나버린 소희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10분 정도 남았어요."

"그렇네요."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웃음)"


그녀는 쑥스러움이 많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떠나기 전 누구를 만나든 내 얘기를 털어놓겠다고 다짐했기에. 기다림에 익숙해진 나였다. 기다리는 연습은 인생의 전반기에 배워놓는 것이 좋다. 그리고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실연과 상실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별이 많은 세상이라면 상실에 익숙한 사람이 조금 더 묵묵히 살아갈 수 있을 터, 나는 하루빨리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랬다.     



도착 5분 전, 정동진역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도쏟아지는  키스하듯 집어삼켰다.


(후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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