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 Oct 15. 2023

#3 너를 잠재운 시간들

[연재] 사랑, 낭만 혹은 현실


정동진에는 일출 후 갓 잠을 깬 태양이 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역 앞으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겨울 바다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건 마치 스물세살의 젊은 남자에게 건네는 오래된 바람의 인사 같았다. 차가운 포근함. 자연은 언제나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오묘한 멋을 선사한다.


수아와 나는 역근처에 위치한 국밥집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게 국밥집이라지만 머나먼 타지에서 만나 그런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일부로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을 만나러 온듯한 기분이라고 할까. 우린 어색한 공기를 중앙에 두고 마주앉아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국밥을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세어보면 얼마되지 않는 말들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우린 각자의 삶 속에서 우연히 만난 하나의 여백에 불과했기에 서로에게 어떤 부담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국밥집에서 나와 역에서 정훈과 미희를 기다렸다. 가끔씩 얼굴을 볼 때마다 수아는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과하다고 느낄만큼 밝은 미소였다. 그녀의 미소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 일방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마냥 행복한 형태의 미소는 아니었다. 상투적일지 모르는 연애와 결혼, 취업 같은 얘기들을 늘어놓았을 때 그녀는 그것들을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여겼다. 수아에게 모든 현실은 구속의 종류일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어요?" 


사실은 "왜 그렇게 자유롭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가 가진 자유를 나도 갈망하고 있었으니까. 내 안에 숨겨진 자유.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여행을 결심하게 것도 그놈의 자유 때문이었다.


소희를 상실했다는 표현은 이상하다. 그녀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자아를 가진 채 스스로 떠났다. 잃었든 상실했든 그건 내 입장에서의 감정이다. 소희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간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상실감을 느낀다. 자유는 소희와 다르게 실체가 없다. 그리고 그 부피는 점점 커져간다. 상실 후에는 필히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일까?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왜 자유롭냐니? 이런 질문에 답이 있을리 없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에게 왜 자유롭냐고 묻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이 어디있는가? 그건 새에게 왜 날고 싶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서요."

"살고 싶은대로 살 수 있다니 부러워요."

"왜요?"

"모르겠어요. 어쩌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아직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죠."

"여행 많이 해보셨어요?"

"아니요. 제대로 된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 그렇구나..."


뭔가 할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수아는 말을 아꼈다. 그녀는 꽤 긴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여행 매니아들이 들법한 배낭과 아웃도어까지. 얇은 청바지 하나와 투박한 바람막이만 걸친 나와는 달랐다. 20대의 나이에 긴 여행을 즐기게 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 구체적으로 물어보진 없었다. 그냥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누구든 마찬가지니까. 여행은 복잡한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어떤 거대한 반작용의 힘과 같았다. 떠나고 싶을 땐 떠나야 한다. 삶의 잔인함이 우리를 밀어낸 만큼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 힘으로 고통을 다시 튕겨내지 않으면 삶의 혈이 막혀 어떠한 모양으로든 다시 돌아오고 만다.     



40분쯤 흘렀을까 미희와 정훈이 도착했다. 정훈은 마치 손님을 맞이하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처럼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미희는 작은 목례를 건넸다. 두 사람에게는 도시의 냄새가 났다. 오랬동안 도시에 산 이들에게서는 그 특유의 향이 난다. 그건 냄새라기보단 분위기에 가깝다. 드높은 회색 건물 사이를 오래 드나들었으며 원치 않는 웃음을 많이 짓고 자신도 모르게 쓸어내린 감정들이 묵어 녹아내리지 않은 것. 한겨울 꽁꽁 언 얼어버린 얼굴처럼. 어쩌면 도시 사람들이 잘 웃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언 얼굴을 녹이려 자꾸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바다를 보며 풀어내는 얼굴은 도시에서의 미소보다는 편안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은 마치 하늘에 붕하고 떠 있는 미지의 섬처럼 낭만적이었다. 잠시 현실을 떠나온 느낌에 침묵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떠나온 여행 속에서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공간 때문이든, 새롭게 시작될 어떤 인연에 대한 기대 때문이든, 낭만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소하거나 야릇한 상상 때문이었지도 모른다. 짝을 지어 떠나는 여행. 젊은 날 낯선 땅에서 낯선 이성과 마주한 기분은 불쾌하면서도 설렐 수 밖에 없다. 아니, 불쾌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어떠한 도덕성이 쌓아놓은 벽 앞에서 문을 열까 말까 고심하는 한 인간의 어리숙함. 나의 자아는 분명 딱 그만큼만 성숙해 있었다.    



우린 강릉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해안도로 산자락에 위치한 산(山) 박물관. 나에게는 예술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 그래서 맨 뒤에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우린 어느정도 간격을 유지하며 각자 작품을 감상했다. 서로를 잃어버릴 이유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거리에서 딱 그 정도의 인연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건 어떤걸까? 밥을 먹는 일, 연인과 키스를 하는 일과는 분명 다른 부류의 일일텐데, 나에게는 그보다도 왠지 모르게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전시장의 코너를 돌고 돌아 창밖으로 이어진 베란다 공간에 다다랐다. 건물 옆으로는 겨울 산새 사이로 덜 녹은 눈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분명 누군가 아름답다고 할 만한 완벽한 자연의 모습은 아니었다. 펼쳐진 풍경으로 잠시 눈을 돌렸다. 겨울산과 예술 작품의 차이점은 감상 포인트를 따로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연에 대해 이렇게 감상해야 한다고 긴 설교를 늘어놓는 사람은 없다. 그저 자연을 느낄 만큼의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옆에서 커다란 숲의 형상을 닮은 그림을 보던 수아가 물었다. 순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였다. 무언가 멋진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내 표정은 그만큼 멋있지 못했는지 수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서 그녀는 옆 공간으로 다시 휙 사라졌다. 이 여행의 끝에서 우린 또 다시 어떤 인연을 기대하게 될까?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머릿 속에서 소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 이별이 남긴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