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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Dec 23. 2023

#4 낭만이 치는 바다

[연재] 사랑, 낭만 혹은 현실

미술관에서 나온 우리는 바다 위 가파른 절벽 위의 2차선 도로 옆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곳은 도심에서 꽤나 떨어진 동네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손님을 태운 택시가 지나갈 때마다 우린 미어캣처럼 그 뒤를 처량히 바라봤다.




"방법이 없을까요?..."


차들이 줄지어 달려오던 해안선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희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할까요?"


수아가 말했다. 누구도 생각치 않았던 선택지였다. 미희와 정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직감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들기 시작했다. 우린 괴상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차도로 뛰어들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차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잠시 후 우린 서로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뜻밖에 마주한 난관 앞에서 서로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연 것 같았다. 그 풍경은 낭만이었다. 외딴 동네에 내던져진 젊은이들의 낭만. 우연의 연속. 불확실한 모든 것이 즐거웠다. 물론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되었지만.


얼마 후 한 회색 SUV 차량이 길을 멈췄다. 운전석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편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명절에 만난 삼촌이 조카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듯 질문을 던졌다. 낯선 동네로 배낭여행을 온 청년들. 게다가 원래 서로 알던 사이가 아니라 아니라는 점이 그에겐 꽤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우리가 얘기를 할 때마다 감탄을 연발했다. 그렇게 대화에 푹 빠져든 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강릉역에 도착했다.


강릉역에는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중간한 도시를 건너 무작정 바다로 향했다. 오전 내내 바다를 보았지만 또 마주하고 싶었다. 걷는 동안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수다를 떨기엔 바람과 바다의 향이 너무 짙었고, 외로움을 느껴도 감정을 다독여줄 만큼의 온기가 옆에 있었다. 물론 그때의 감정은 주관적이다. 당시의 나는 미희 혹은  수아에게 약간의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니, 인터넷 카페에서 댓글을 남긴 순간부터.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때의 감정은 지금보다는 훨씬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무언가였다.



안목해변 옆으로 등대가 보이는 커피집이란 파란 팻말이 보였다. 여느 해안 도시가 그렇지만 강릉의 해변은 희황 찬란한 간판을 단 음식점이 유난히 많았다. 모든 글씨가 지나치게 뚜렷해서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돈된 채색의 바다와 선명한 하늘과 달리 상인들의 욕망은 날이 파랗게 서 있었다. 물론 장사를 해보지 않는 나의 느낌이었지만 분명 그건 바다의 잔잔함과는 사뭇 달랐다.



해변 앞에서 한참 동안 파도 소리를 들었다. 겹겹이 쌓인 감정들이 파도 소리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소희가 생각났다. 격한 그리움이나 요동치는 슬픔과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함께 보냈던 시절들이 심연에서 다시 떠올랐다. 내가 소희를 떠올리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은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화질이 떨어지는 카메라였지만 시간을 잡아둘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사진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억하라고 하면 이렇게 자세히 써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찍은 사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오래전이라도 기억보다는 사진이 훨씬 선명했을 텐데, 그래도 가늠할 수가 없다. 어쩌면 사람의 기억보다 선명한 사진은 없을지도 모른다.


해안가 근처에 위치한 작은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수아를 제외한 정훈과 나, 미희가 술잔을 기울였다. 신기하게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술기운에 조금 더 솔직해졌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말이 많지 않던 수아도 이런저런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수아의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때의 내가 더 대담한 사람이었다면 수아에게 더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랬다면 그 여행의 추억이 훼손됐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의문이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에게 느끼는 성적 충동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듣고 배웠지만, 썩 유쾌하게만 다가오는 현상은 아니다. 그 자체가 죄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정상일까? 생각으로 짓는 죄 또한 죄라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처럼 때때로 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20대 때는 그 숱한 충동들을 낭만으로 치부했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낭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랑이라고 자부했다.


30대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서툴렀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낭만과도, 성적인 충동과도 거리가 먼 완전히 성스러운 영역에 속한 것일지도 모른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파도가 바위에 몸을 던지는 일. 아주 당연하지만 왜 당연한가 생각해 보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의 강한 신념에 의해 꽤 오랫동안 지속돼 온 일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술자리가 끝난 후 해변에서 멀지 않은 민박집으로 향했다. 민박집 옥상에는 시끌벅적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낭만의 밤을 그냥 보내기 싫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궁금했지만 옥상으로 올라가진 않았다. 수아와 미희도 저런 파티는 질색이라며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였으니 지칠 만도 했을 터 나도 방으로 들어갔다.


정훈은 먼저 씻은 후 침대에 누워있었다. 적막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후에 떠난 몇몇 여행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여행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느낌은 대다수 비슷하다. 어색함과 설렘이 공존하지만 적당한 고요함이 있다. 홀로 머무는 곳이 아닌데 홀로 있는 듯한, 하지만 불쾌하거나 외롭기보단 편안한 공기가 흘렀다. 어쩌면 일상의 떠나온 이들의 영혼이 머무는 자리이기에 무게가 조금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압박보다는 내일의 설렘이 조금 선명한 공간이니까.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정훈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훈은 이어폰을 낀 채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서둘러 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틀고 따뜻한 물로 한참 동안 얼굴을 맞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언 몸이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소희가 생각났다. 생각났다기 보단 떠올랐다고 하는 게 맞다. 그녀가 엄청나게 보고 싶거나 그립지는 않았다. 그냥 지금 소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누군가를 어떤 존재를 잊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글도 그림도 지우개로 하나씩 휴지로 하나씩 지워나가야 하듯 우리의 마음에 든 무엇도 그렇게 단계적으로 지워나가야 하니까.



새벽 1시, 정훈과 나 외에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았다. 손을 흔들어 정훈에게 물었다.


"불 꺼도 돼요?"

"네, 이제 자야죠. 오늘도 고생했어요. (웃음)"


이불속에서 작은 노트를 펼쳤다. 뭔가 기록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눈이 감겨왔다. 방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 하루 동안 들었던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파도의 목소리는 어릴 적 어머니게서 불러주던 자장가 같았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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