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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Jan 27. 2024

#5 여행 끝에서 만난 이별

[연재] 사랑, 낭만 혹은 현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소희를 만나서부터였다. 물론 모든 게 그녀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기로 보아 글쓰기가 시작된 시점에서 결코 그녀를 떼어낼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삶에서 일어나는 숱한 우연들을 운명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희를 만난 후 글쓰기를 시작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지금도.



새벽 7시,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마지막 여행지는 충청북도에 위치한 단양. 강릉의 푸른 바다와는 달리 단양은 높은 산새와 깊은 계곡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전날의 대화 덕분인지 우린 조금 더 가까워졌다. 외로움이 짙을수록 관계에 빠르게 매료되듯 거리를 좁혀갔다. 하지만 한편으론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다. 무작정 마음을 열었다간 자칫하면 큰 상처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여행이 끝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미리 마음의 벽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리석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는 동안 잠들기 전 노트를 꺼내 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였다. 처음에는 사랑은 어떻다는 등 원론적인 얘기만 떠올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솔직하고 진정으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린 얼마나 많은 걸 배우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깨달음은 사랑이 떠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 같다. 배움은 사랑에 있어서도 뭔가를 잃고 난 후에야 다가온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프게 다가온다."

사랑을 깨달았다고 하기엔 부족한 문장이었다. 23살의 남자가 썼다고 하기엔 건방지기도 하다. 풋사랑 몇 번으로 어떻게 사랑을 논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느낌은 있었다. 먼 훗 날 내가 사랑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더 알게 된 날, 이 문장을 다시 읽는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위로해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물 셋. 사랑은 낭만이었다. 어리석게도 당연하게도 그땐 사랑을 깨달아서도 안되고 깨달을 수도 없는. 지나치게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시절이기에. 순수라는 단어로 포장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기록 노트가 여행 중에는 만남과 사랑, 자연에 대해 깨달은 감상들로 가득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약속된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날고 싶었다. 평소에 느낄 수 없는 공기와 바람은 어떻고 하늘 높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고 싶었다. 여행이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라면 일상은 땅을 딛은 채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마지막 여행 코스로 패러글라이딩을 선택했다. 잠시 후 우린 하늘 위를 걷고 있었다. 잠시라도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잠시라도 삶을 짓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나 숨 다운 숨을 쉬었다. 부력과 함께 하늘로 떠오르는 순간 가슴 속에 쌓였던 응어리들이 모두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만남은 천천히 깊었지만 이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패러글라이딩 업체가 운영하는 트럭을 타고 산비탈을 내려가는 길, 내가 물었다.


"이제 다들 어디로 가세요?"   


한층 가벼워진 표정을 하고 있던 수아가 답했다.


"저는 경주로 가요."


수아는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며칠 더 여유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미희와 정훈은 원래의 계획대로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수아의 자유로움이 부러웠지만 경비도 거의 떨어졌는데다 무턱대고 여행을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찬란한 동행은 막을 내렸다. 마지막 만찬으로 단양의 명물인 흑마늘 떡갈비 식당에 들렀다. 마치 방금 만난 사람들처럼, 아쉬움도 있었지만 모두가 이제 각자의 길로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와 정훈과 미희를 떠나보낸 후 수아와 함께 터미널 쪽으로 걸었다. 조금 더 걷고 싶었다. 어색한 듯 수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반보 앞을 걸었다. 터미널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에게 물었다. 터미널까지 오는 동안 가슴 속에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말들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태어나지 못한 채 엄마 뱃속에서 사라져버린 아이처럼. 나왔다면 어떤 낭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갔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아, 저는 저쪽으로 가볼게요,"



수아는 산비탈 옆 도로로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순간, 나는 다시 홀로 서 있었다. 포근한 분위기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적막한 세상으로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낭만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강 주변에는 유난히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낚시는 낭만일까 현실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정처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야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함께 하는 여행의 여파가 컸기 때문일수도 있고, 처음에 세웠던 계획의 대부분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30분여 걸었을까. 여행을 하는 동안 잊고 있던 벨소리가 울렸다. 이름은 없었지만 무언가 익숙한 번호였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선 흐느끼는 우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그것이 소희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소희는 낯선 버스를 타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려가고 있다고 너무 무섭다고 했다. 도무지 상황을 알기 힘들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하나의 진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리움이 많이 쌓여서, 수도꼭지를 열지 않으면 지나간 낭만이 그녀의 현실을 잠식해 버릴수도 있다는 것.  



매일 가까이서 자주 웃었던 우리는, 그날, 아주 먼 곳에서 수화기 하나에 의지한 채,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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