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와 그 제자 서윤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1947 보스톤(2023년 9월 개봉)'에는 이 대사가 반복해서 나온다. 손기정 역할을 맡은 하정우 배우는 영어로 자신에게 질문하는 미국 기자들에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 말을 건넨다.
"나는 러너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영화에서 이 대사는 영어를 할 줄 몰라 둘러대기 위한 연출로 표현됐지만, 난 이 장면을 보며 짧은 이 대사에 마라토너의 생애와 철학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러너에게 달리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아마 대부분 '그저 달리는 것이 좋아서' 혹은 '달릴 때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중 손기정은 마라토너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과 '근성'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재능만으로 위대한 마라토너가 될 순 없다고 말이다. 그런 손기정에게서윤복(임시완 배우)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길러낸 근성과 체력으로강한 인상을 남긴다. 기정은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해 윤복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과 닮은 윤복의 모습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손기정과 서윤복, 두 러너의 닮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고난 러너라는 것. 힘든 현실 속에서 마라토너의 꿈을 키워온 것. 두 러너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마냥 현실이 행복해서 달린 게 아니다.
극 중 윤복 어머니의 간질 증상에 대처하는 손기정의 모습에서 그의 아내도 비슷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 속에서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잊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 늘 생계 걱정에 시달리는 어린 윤복도 달릴 때만은 해맑게 웃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라톤이 두 사람에게 주는 행복의 모양은 조금 달랐을 수도 있지만, 현실을 이겨내고 또다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어떤 에너지를 준 것은 같아 보인다.
나라도 국가도 가족도 그 누구도 보증해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기어코 보스턴의 영광을 거머쥔 그들의 인사는 '아임 러너, 아임 해피'였지. '아임 해피, 아임 러너'가 아니었다. 그 언어에는 행복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발견할 때까지 뛰고 또 뛰겠다는 마라토너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