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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Nov 20. 2023

트렁크에 대량의 글을 남기고 떠난 시인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을 읽고


철학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페소아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 사고방식은 아직도 페소아를 논할 자격이 없다.


-알랭 바디우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시를 좋아하고 쓰는 사람으로서 몰랐던 시인의 책을 읽는다는 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현실에 적응할수록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예전엔 이 사실이 슬펐다.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게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을 조금 바꿨다. 잠깐이라도 시를 읽고 쓸 수 있는 틈새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이 시집은 어머니께서 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면 늘 본인이 읽은 책을 건네신다. 그러면 나는 마치 어릴 적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듯이 책의 문장들을 꼭꼭 씹어 먹는다. 어머니의 감성을 잃지 않으려는 듯 말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주신 글들은 훗날 나의 소중한 유산이 될지도 모르겠다. 


페소아의 시는 놀랍다. 극도로 순수하며 저돌적이다. 때론 비판적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내겐 이미 오래전 씌워진 겹겹의 생각들이 벗겨진 느낌을 받았다. 때를 벗은 생각들, 그래서 더 좋은 문장들을 공책에 옮겨둘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잊기 쉬운 진리를 그는 한없이 생각하며 써 내려간 듯하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를 만큼 강한 통찰력을 가진 시들. 마음에 욕심이라는 떼가 많이 꼈을 때 펼쳐보고 싶은 문장들이다.





생각한다는 건

바람이 세지고, 비가 더 내릴 것 같을 때

비 맞고 다니는 일처럼 번거로운 것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내 마을에서는 우주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땅이 보인다.

그래서 내 마을은 다른 어떤 땅보다 그렇게 크다. 

왜냐하면 나의 크기는 내 키가 아니라 

내가 보는 만큼의 크기니까.


-페르난두 페소아






내겐 철학이 없다. 감각만 있을 뿐......

내가 자연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건 

그게 뭔지 알아서가 아니라

그걸 사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것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이는 절대 자기가 뭘 사랑하는지 모르고

왜 사랑하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페르난두 페소아





자유로운 자의 떠도는 영혼을 붙잡는 건 사랑하는 여인의 불안을 잠재우는 일만큼 어렵다. 무엇이 나를 살리는 길인지는 걸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시인이 평범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무지 순수해서 욕심이 없거나 거센 세파에도 타고난 감성을 잠재울 수 없거나, 아니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과 싸우거나, 한 여인에게 집착해 자기 자신을 매혹스러운 파멸로 밀어 넣거나.




사랑이란 하나의 동행. 

이제는 혼자 길을 걸을 줄 모르겠어.

더 이상 혼자 다닐 수가 없어서

어떤 선명한 생각이 나를 더 급히 걷도록

더 적게 보도록 만들고

동시에 걸으며 보는 걸 좋아하게 만든다.

그녀의 부재조차 나와 함께하는 그 무언가이다.

그리고 난, 그녀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욕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보지 못하면, 그녀를 상상하고 나는 높은 나무들처럼 강하다.

하지만 그녀가 떠는 걸 볼 때면

 그녀의 부재를 느끼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의 전체가 나를 버리는 어떤 힘.

모든 현실이 한복판에 얼굴이 있는 해바라기처럼 나를 쳐다본다.


-페르난두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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