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영화 속 그녀

흑기녀

by 진혁

괴수 영화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닥치는 대로 도시를 파괴하는 괴수가 등장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영화에서 굳이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야 한다면, 괴수가 입에서 불을 뿜는 순간이다.


오래전, 불가사리라는 괴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불가사리는 억울한 이의 저주에서 생명을 얻게 된다. 바늘처럼 작은 쇠를 먹기 시작한 불가사리는 농기구나 식기를 먹게 되고, 급기야 마을에 있는 쇠붙이를 모조리 먹어 치울 정도로 커졌다고 한다. 강해진 불가사리는 억울한 이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쓸쓸히 사라져 간다는 내용이었는데, 상상의 나래를 펴며 재밌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면, 괴수는 악한 캐릭터라기보다는 동화 속 어딘가에 나오는 친숙한 존재가 아닐지 모르겠다.


영업회사를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업무 성과를 마감하는 매달 말일은 직원 회식이 있었다. 한 달 수고했고 다음 달도 열심히 하자는 단합 의미가 있는 자리였는데, 그날은 협력사의 새로운 담당자가 자리를 함께했다. 어려운 자리였음에도 타회사 회식에 참석한 이유는, 자신의 실적이 우리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었고, 담당업체 관리 차원에서 새로 왔으니 잘 부탁한다는 숨은 뜻도 있었을 것이다.

마감 날 회식자리는 달리기 마련이었다. 실적이 좋았던 직원은 기분이 좋아서 한잔 해야 하고, 실적이 저조한 직원은 스트레스 때문에 한잔 해야 했다. 폭탄주가 돌아가고, 주거니 받거니 흥이 나는 술자리가 무르익다 보면, 자연스럽게 벌주 게임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날따라 주량이 오버된 사람들이 많아, 협력사 담당자가 흑기녀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 것 같았으나, 한 두 잔도 아니고,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말려보았지만, 당시 그녀의 흥은 끓고 있는 뚝배기 같아서, 불을 끈다고 바로 식어버릴 수 없는 상태였기에, 뭔가 믿는 게 있겠지 생각하며 지켜보기로 했다.

이런 단체 술자리에는 자신의 주량을 지키기 위한 트릭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테이블 밑에 글라스를 준비해 두고, 물을 먹는 척하며 입안의 술을 글라스에 뱉는 방법이 있다.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술고래들 속에서 자신의 주량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인데, 나도 한때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가끔 트릭을 눈치채는 고래들이 있다는 것이다. 테이블 밑에 글라스가 사라졌다면, 주변 고래들에게 털린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정면돌파를 시도해 보지만, 결국 만취라는 응징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처세술이 필요 없는 오리지널 주당이었다. 흑기녀 임무를 다하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그녀가 머리에 술잔을 털 때면 팬클럽에 스타가 온 듯 열광했다. 한 순간 인싸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직원들은 서로 밀어주겠다고 약속을 난발했던 것 같다.


회식자리가 마무리되고, 2차 호프집으로 직원들과 이동하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사람과 떠들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버퍼링 발생한 듯한 소리가 들려 쳐다보게 되었다. 옆에 그녀가 있었고, 뭐라 말하던 입에서 뭔가가 길게 뿜어져 나왔는데, 순간 뭐지? 내가 취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녀가 Overeat를 했던 것이다.

길거리 토는 하수구나 화단, 구석진 곳을 찾아 고개를 숙이거나 쪼그리고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걷고 있던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 가로수에 뿜었고, 그 모습은 정말 강렬하게 다가왔다. 양이 많아 중력의 영향을 받을 만도 했을 텐데, 내부 압력이 얼마나 강했으면 무중력 상태에서 나오는 것 같았고, 빠르고 강하게 마치, 성난 괴수가 불을 뿜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직장인의 애환이 투영된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지만, 모두를 위해 흑기녀를 자처했던 그녀의 모습은, 어느 전설 속 여전사를 닮아 있었다.

이전 01화여름밤의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