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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결전의 날

by 로도스로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미삼그룹의 이현길 회장에 대한 판결 선고는 오전 10시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고혁두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법정으로 들어갔다. 검사석에 앉은 뒤에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떨리지?”

고혁두의 직속상관인 조소희 부장검사였다.

“꼴을 보아하니, 어제 사무실에서 밤샌 모양이네.”

역시 예리했다. 면도칼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몰골이 많이 추레한가요? 혹시나 해서 어제 사무실에 남아서 기록을 좀더 살펴봤습니다.”

전체 직원이 30만 명이 넘고 재계 서열 2위인 미삼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현길 회장은 회사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회삿돈을 제 돈처럼 빼내어 경치 좋은 곳에 가족 별장을 짓고, 코스가 기가 막힌 골프장도 만들었다.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선물처럼 돈을 나줘주기도 했다. 전형적인 횡령 범죄였고, 그 액수가 5,000억 원에 달했다.

다른 사건을 조사하다 이현길 회장의 횡령 사실을 알게 된 고혁두는 그냥 덮어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꼬박 1년 넘게 고혁두는 이 사건에 매달렸다. 하지만 수사가 쉽지는 않았다. 수사기법만 발달하는 게 아니라 범죄수법도 점점 지능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미삼그룹은 변호사, 공인회계사, 세무사들을 총동원하여 법망을 빠져나갈 방법을 연구했다. 교묘하게 이뤄진 범죄를 밝히기 위해 고혁두는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수사에 매진했다. 그 결과가 오늘 나오는 것이다. 판결 선고 결과에 따라 고혁두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게 분명했다.

소송에서 이기면 고혁두의 인생은 탄탄대로로 바뀌겠지만 패소한다면 자갈밭이 될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회장이 연관된 사건이라 언론 역시 관심이 많았다. “미삼그룹과 검찰 혈투의 결과는?”이라는 자극적 제목이 달린 기사가 고혁두의 현재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판결선고 결과에 따라 미삼그룹과 검찰 한 쪽은 치명상을 입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검찰은 “유죄의 증거가 매우 많아 유죄를 입증할 자신이 있다”라고 공언해왔지만 미삼그룹은 “검찰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유죄의 심증만으로 무리한 수사를 해왔다.”라고 반발해왔다. 검찰이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사력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미삼그룹의 손을 들어준다면 검찰은 밀어붙이기식 수사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검찰에 다양한 악재가 존재하는데, 이 사건마저 허무하게 끝나면 검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리게 된다. 벌써부터 서초동 법조계에는 판결 결과에 따라 수사팀에 대한 인사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수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 판결 선고를 앞둔 지금 고혁두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현길 회장의 행위는 횡령이었다.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했지만 회사의 돈을 빼내서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찰이 아무리 주장을 하고 증거를 내밀어도 판사가 믿어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세간에서는 미삼그룹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김세진 부장판사였다. 김 부장판사는 ‘검찰의 저승사자’로 불렸다. 형법 체계상 검사가 유죄라는 걸 밝혀내지 못하면 피고인에게는 무죄가 선고된다. 문제는 유죄라는 걸 어느 정도 확실하게 입증하느냐이다. 김 부장판사의 기준은 매우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검찰의 입증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무죄를 선고하기로 유명했다.

‘이러다 정말 검찰에서 쫓겨나는 거 아니야?’

고혁두의 마음에 슬며시 걱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리를 저지르거나 위법하게 수사를 하지 않은 이상 소송에서 패소했다고 해서 강제로 검사직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직접 옷을 벗기지는 않더라도 옷을 벗게 만들 수는 있다. 그게 바로 조직의 힘이다.

그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났다. 이 자리는 거저 주어진 게 아니었다. 고혁두가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서 오른 자리였다.

‘어떻게 검사가 되었는데...’

10시 정각이 되자 법관 전용문이 열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법원 경위가 우렁차게 외치자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가 정돈되자 김 부장판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피고인 이현길에 대한 판결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김 부장판사는 우선 사건에 대한 개요를 설명했다. 그 뒤에는 검찰의 주장과 변호인의 반박을 차례로 소개했다. 지금까지가 예고편이었다면 이제부터가 본편이다.

“이에 따라 피고인 이현길에게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고혁두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죄가 선고된다면 검찰의 완패인 게 분명했다. 유죄 판결이라고 해도 집행유예가 붙으면 교도소에 가지 않아도 되니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가깝고 검찰의 패배라고 보아야 한다. 검찰의 승리라고 보려면 최소한 징역 3년은 나와야 한다. 그것도 집행유예가 붙지 않아 교도소 수감이라는 형벌이 실제로 집행되는 실형(實刑)으로.

김세진 부장판사는 단호하게 판결문을 읽었다.

“피고인을 징역 5년에 처한다.”

그걸로 끝이었다. 집행유예 같은 건 없었다. 검찰의 완승이었다.

고혁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에 반해 이현길 회장측은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체면치레를 하느라 꾹 참고 있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느껴졌다.

“판결이 아주 깔끔하게 잘 떨어졌어요.”

판결 선고 후 한도명 서울중앙지검장의 평가도 깔끔했다.

“지검장님께서 많이 신경써주신 덕분입니다.”

조소혜 부장검사가 대답했다. 조 부장검사의 말은 부하직원이 흔히 하는 예의바른 대답의 측면이 강했지만, 전혀 빈말은 아니었다. 수사를 진행하는 그동안 미삼그룹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정치권, 법조계, 행정부 등 이곳저곳에서 외압이 많이 들어왔다는 걸 조 부장검사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 지검장은 수사팀에게 아무런 가이드를 내리지 않았다.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 그것만 강조했을 뿐이다.

“조 부장검사야 예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고, 고 검사는 올해로 검사가 된 지 얼마나 되었지요?”

“올해로 10년차입니다.”

고혁두가 대답하자 한 지검장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잘해 봅시다.”

한 지검장이 손을 내밀어 고혁두에게 악수를 청했고, 고혁두는 공손하게 손을 맞잡았다.


장경규 검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상태로 검사 휴게실에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이만호 검사가 물었다.

“장 검,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이 검은 그 소문 못 들었어? 지잡이 이야기.”

‘지잡이’는 일부 검사들이 고혁두를 비하해서 사용하는 말이었다. 고혁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미친 듯이 공부만 했다. 이를 악물고 노력한 덕분에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내신은 말할 것도 없고 수능시험 성적도 월등했다. 서울의 명문대를 가고도 남을 점수였다. 하지만 고혁두는 서울행을 포기했다. 일단 학비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지낼 생활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제 한 몸만 챙기면 과외를 하며 버틸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고혁두에겐 돌봐야 할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을 혼자 놔두고 서울로 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고혁두는 집 근처의 지방국립대를 선택했다. 그 대학은 우수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특별장학생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특별장학생에게는 4년 동안 등록금을 면제할 뿐만 아니라 매달 생활비도 지급했다. 고혁두에겐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장경규 검사처럼 학벌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특별장학생이니 뭐니 하는 건 관심 밖이었다. 그저 학교이름이 중요했고 지방의 대학은 그저 지잡대에 불과했다.

“지잡이가 왜?”

이만호 검사가 묻자 장경규 검사는 답답하다는 대답했다.

“다음 인사 때 지잡이가 부부장 검사로 승진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

부부장검사로 승진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적으로 12~13년 정도가 걸린다. 그런데 고혁두는 올해 10년 차 검사이니, 다른 사람들보다 2~3년 정도 빨리 승진하게 되는 것이다.

“미삼그룹 이현길 회장에게 징역 5년이나 떨어지게 한 걸 보니, 그래도 능력은 있나 봐.”

이만호 검사가 말하자 장경규 검사가 펄쩍 뛰었다.

“능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잡대나 나와서 운빨로 검사된 지잡이가 무슨 능력이 있겠어? 하긴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기는 하다더라.”

“그게 뭔데?”

“늙은 여자 후리는 능력. 조소혜 부장검사가 나이는 많아도 아직 싱글이잖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조 부장을 꼬셔서 이용한 거지. 사실 이현길 회장 수사도 조 부장이 다 한 거야. 지잡이가 한 거라곤 밤에...”

거기까지 말한 뒤 다음 말을 이어나가려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에 뭐?”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혁두였다. 장경규 검사는 멈칫했다.

“한창 재밌는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계속 말해 봐. 내가 밤에 한 게 뭔지?”

장경규 검사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본인 앞에서 대놓고 험담을 할 깡은 없었다.

“누가 네 얘기라 그래? 다른 사람 이야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황급히 벗어나려는 장경규 검사의 앞을 고혁두가 막아섰다.

“그래? 지잡이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라고? 서울중앙지검 검사 중에 지잡이는 나 하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또 있어?”

장경규 검사는 대꾸하지 못했다.

“지잡대 나온 내가 소위 명문대 나온 너보다 잘 나가니까, 심통이 나?”

고혁두는 최대한 차분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 험담이나 할 시간에 수사나 좀 열심히 하지 그래? 피고인들 사이에 장 검이 제일 인기 많은 거 알고 있지? 처음 그 소식 들었을 때는 인간적으로 대해 주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장 검이 맡은 사건은 하나 같이 수사 결과가 부실해서 족족 무죄가 나와서 그런 거더라고.”

장경규 검사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으나 대꾸하지 못했다.

“하긴 과외 선생이 수사 방법은 알려주지 않으니까 너도 답답하긴 하겠다.”

“뭐라고?”

“왜 발끈하고 그래? 내가 틀린 말 했어? 지금까지 네가 이룬 것 중에 온전히 네 힘으로 이룬 게 있어?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받았으니 근 20년이 되겠다.”

“무슨 소리야? 과외는 학창시절에만 받았는데 20년이라니?”

“사법시험 공부할 때 현직 변호사들에게 지도받은 건 과외가 아냐? 사법연수원 시절에도 사법연수생 들에게 따로 과외받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동안 과외 선생이 옆에서 하나씩 떠먹여줬는데 수사 방법을 알려주는 과외 선생이 없으니 얼마나 힘들겠어. 필요하면 이야기해. 내가 시간내서 과외 좀 해 줄게.”

장경규 검사의 얼굴은 이미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식식거리기만 했다.

“나 먼저 갈게. 할 일이 많아서.”

그 말을 남기고 고혁두는 쿨하게 퇴장했다.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 나니 통쾌했다. 금방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장경규 검사의 표정을 보니 ‘너무 심하게 대했나’라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저런 사람들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예의가 아니라 참교육이었다. 낮게 수그리고 있으면 언제든 밟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에게 ‘그래, 맘껏 밟으라’라고 순순히 몸을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온 고혁두는 의자에 몸을 편안하게 기댔다. 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앞으로 펼쳐질 삶을 생각하면 이 정도 피곤쯤은 얼마든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미삼그룹 이현길 회장을 잡은 평검사’라는 수식어는 검찰 생활을 하는 내내 고혁두를 내내 따라다닐 것이다. 마치 훈장처럼.

미래를 그리는 고혁두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때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렸다.고혁두가 정장 주머니를 뒤졌지만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어제 오늘은 워낙 정신 없이 보내느라 휴대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휴대폰을 발견한 곳은 책상 위의 사건 기록 사이였다.

“고혁두 님 맞으신가요?”

“그런데요, 어디시죠?”

“경찰서입니다.”

경찰관이 전한 소식을 듣고 고혁두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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