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생활을 정리하고 동생 기일 행사 참석차 서울에 온 고혁두는 모텔에서 지냈다. 며칠 동안 머무른 모텔방을 둘러보니 가관이었다. 술병과 컵라면이 널브러져 있고 과자 부스러기가 발에 밟혔다. 청소하시는 분이 딱 싫어할 만한 상태였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쓰레기를 모아서 휴지통에 넣고, 침대도 정리했다.
방을 정리하자 몸도 깨끗하게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모텔 근처의 목욕탕을 찾았다. 목욕을 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했다. 탈의실 평상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TV를 시청했다. TV에서는 자연 다큐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독수리는 땅을 도약하여 날개를 활짝 폈다. 날개 길이만 해도 1미터 가까이 되었다. 곧고 길게 뻗은 날개 뒤로 붉은 노을이 번졌다. 노을을 배경으로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의 모습을 고혁두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독수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화면이 바뀐 탓이다. 리모컨을 손에 쥔 남자의 상반신은 호랑이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호랑이 문신은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화면을 멈췄다. 그는 TV앞에 앉더니 오른손을 짚어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호랑이 문신의 오른쪽 어깨가 고혁두의 왼쪽 어깨에 살짝 닿았다. 여긴 내 구역이니 비키라는 뜻이었다.
호랑이 문신은 고혁두가 싫어하는 유형의 대표 주자였다. 힘깨나 쓴다고 멋대로 행동하는 인간들. 이걸 확 그냥, 하는 마음이 속에서 일었다. 하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별 것 아닌 일에 흥분하지 말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목욕도 끝났겠다 슬슬 짐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카운터 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너 이 새끼 뒈지고 싶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목욕탕 주인이었다. 남자는 앞머리가 훤히 비치는 대머리였다. 그 앞에는 짧게 머리를 자른 고등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대머리는 학생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확 낚아챈 뒤 그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가방 안에서 하얀 봉투가 나왔다. 봉투를 손에 든 대머리는 기세를 올렸다.
“이 돈 뭐야? 어디서 난 거야 몇 달 전부터 카운터에 있는 돈이 빈다 싶어서 어떤 새끼가 중간에서 장난치나 했어. 근데 그 쥐새끼가 여기 있었네.”
대머리의 두툼한 손바닥이 학생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깡마른 학생은 몸통이 절반이나 돌아갔다.
“한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불쌍한 놈 키워주고 먹여주고 했더니 그 은혜를 이렇게 갚아?”
“죄송합니다. 삼촌.”
“삼촌 같은 소리 하지마. 누가 네 삼촌이래?”
목욕탕에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주인공인 드라마의 시청자가 되어 있었고 고혁두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내 돈 훔쳐서 뭐 하려고 했어?”
“.....필요했어요. 학원비가요... 영어를 배우고 싶었어요.”
학생은 나지막이 말했다. 지켜보는 사람도 상당한데, 자신이 학원비도 제대로 안 주는 고약한 사람으로 몰릴 걸 걱정했던지 대머리는 학생의 복부를 가격했다.
“어디서 개 같은 헛소리를 지껄여? 뭐? 영어? 영어는 배워서 뭐하게? 왜, 자식새끼 버리고 도망간 어미라도 만나려고? 네가 말했잖아. 네 어미는 벌써 필리핀으로 튀었다고.”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학생은 유달리 피부가 검고 눈이 깊은 편이었다.
대머리는 학생의 멱살을 잡았다. 학생은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런 도둑놈 새끼는 콩밥을 먹어야 정신을 차려. 경찰서 가서 그 잘난 조동아리 한 번 놀려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끌려가는 모습은 꼭 도살장으로 가는 소 같았다. 대여섯 걸음 쯤 끌려가 막 목욕탕 출입문을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 대머리의 팔을 잡았다.
“이제 그만 하시죠.”
고혁두였다.
“학생도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경찰서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뭔데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이건 가정교육이라고.”
“가정이라... 아까는 삼촌도 아니라고 하시더니 이젠 집안일이라고 하시네요.”
“됐고. 난 무조건 법대로 이 새끼 콩밥 먹일 테니까 신경 꺼.”
“법이라... 마침 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드리죠. 형법 제344조에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라는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면 원래는 절도죄에 해당하지만 친족 사이에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간에는 절도가 일어나도 그 형을 면제하는 겁니다.”
갑작스럽게 고혁두의 등장하여 법에 관한 잔뜩 이야기를 늘어놓자 대머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뭐...뭔 소리야?”
“그 학생이 선생님 돈을 훔쳤다고 하더라도 절도죄는 아니라는 겁니다. 기본 중의 기본이죠. 죄가 아니라고 형법에 분명히 규정되어 있는데 굳이 경찰서까지 가야 하시겠습니까?”
“당신, 당신 정체가 뭐야?”
“저요? 법에 관심이 좀 많은 소시민 정도라고 해 두죠.”
“에이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대머리는 괜히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고혁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주워서 학생에게 건넨 뒤 짐을 챙겨 목욕탕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잔뜩 흐렸다.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목욕탕 옆 공터에는 10대 정도의 차량이 있었다. 고혁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먼지를 뒤집어쓴 SUV 차량 앞이었다. 고혁두가 운전석 문을 닫으려고 할 때, 두툼한 남자의 손이 문을 잡았다. 호랑이 문신이었다.
“무슨 일이죠?”
“거 참 말이 많네. 좋은 말로 할 때 내리라고. 내가 원래 다른 사람의 일에는 잘 참견하지 않는 성격인데, 아는 형님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말이지...”
상황이 빤하게 그려졌다. 고혁두의 제지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목욕탕 주인은 분을 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동네 덩치의 힘을 빌리는 거라니. 너무 진부하고 고루한 방식이었다.
“가서 아까 그 형님에게 싹싹 빌고 잘못했다고 해.”
“잘못한 게 없는데 무슨 사과를 하죠?”
고혁두가 당당하게 나오자 호랑이 문신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 새끼가. 너 정말 죽고 싶어?”
호랑이 문신이 왼손으로 고혁두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당장 주먹질을 당할 거라는 위협이었다. 고혁두가 조금도 굽히지 않자 호랑이 문신의 주먹이 고혁두의 얼굴로 돌진했다.
그때 고혁두가 오른 손을 뻗어 호랑이 문신의 주먹을 막아냈다. 어쭈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고혁두의 무릎이 명치를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의외의 공격에 놀란 호랑이 문신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옆에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개새끼, 너 오늘 뒈졌어.”
쇠파이프가 허공을 가르며 웅웅 소리를 냈다. 호랑이 문신은 있는 힘껏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하지만 고혁두는 몸을 잔뜩 숙여 가볍게 쇠파이프를 피했다. 이어서 호랑이 문신의 무릎을 발로 찼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호랑이 문신의 오른쪽 다리가 꺾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혁두의 주먹이 호랑이 문신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호랑이 문신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구경거리는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시죠.”
고혁두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자 담벼락에 붙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목욕탕 주인이 씩씩거리며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고혁두가 다시 차에 타서 출발하려고 할 때 누군가 차 앞에 불쑥 나타났다. 아까 그 학생이었다.
“아저씨...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혁두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학생은 거듭 다짐했다.
“알았어. 그 말 잘 기억해 둘 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 이 학생을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의미없이 던지는 ‘담에 술 한 잔 하자’와 같은 말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차에 시동을 걸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제대로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일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변호사 개업을 할 수도 없다. 우선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때 고혁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여행을 가야겠다.’
어느 작가가 말의 빌려서 표현하면, 여행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니까.
“어디로 가볼까?”
고혁두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 안을 하얀 빛이 가득 채웠다. 마치 고혁두의 말을 듣고 있다가 대답을 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차 안을 채웠던 빛은 점점 사그라들었는데, 휴대폰으로 스며 들어갔다.
깜짝 놀란 고혁두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뭐지?”
고혁두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이 고혁두와 고예지가 함께 찍은 사진에서 건물 사진으로 바뀌었다. 마치 누군가가 휴대폰을 조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악!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혁두는 심호흡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질문의 방향을 ‘어떻게’에서 ‘왜’로 바꿔보기로 했다.
“사진이 바뀐 이유는 뭘까? 설마... 여기로 가라는 이야기인가?”
휴대폰이 자신에게 갈 곳을 안내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그보다 나은 설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 속는 셈치고 한 번 가 보지, 뭐.”
어차피 고혁두에게는 정해진 목적지가 따로 없었으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진 속의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사진 속 건물은 파란색 기와 지붕이 인상적인 2층짜리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얼핏 떠오르지 않았다.
파란색 기와 지붕 하면 떠오르는 곳이 한 곳 있기는 했다.
“the Blue House”로 불리는 청와대(靑瓦臺)였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닌 것 같았다. 청와대라면 뒤에 북악산이 있어야 했는데, 사진 속 건물 뒤로는 산이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와 비슷한 건물이...’
잠시 생각하던 고혁두는 예전에 읽었던 기사를 생각해냈다.
'대통령 옛 별장' 청남대, 관람객 1,200만 명 돌파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뜻을 가진 청남대는 대청댐 부근에 지어진 대통령 전용별장이었다. 고혁두의 차는 충청북도 청주시로 향했다.
청남대는 대통령의 별장으로 이용되었던 공간답게 풍광이 매우 뛰어났다. 드넓은 대지에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특히 하늘 높이 뻗은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혁두는 대청호가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여유를 즐겼다. 햇빛이 대청호에 부딪혀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별빛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자니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청남대는 부지가 꽤 넓은 편이었고, 이곳저곳을 걷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순댓국 하나 주세요.”
백반 가게에 들어간 고혁두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때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치 땅이라도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이었다.
족히 70세는 훌쩍 넘긴 걸로 보이는 심정순은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얼굴을 가득 채운 굵은 주름들은 그녀가 살아온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뒤 한 40대 중반의 김선경이 식당 안으로 들어와 심정순의 앞에 앉았다.
“엄마! 늦어서 미안해요. 인혁이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오느라.”
“괜찮아, 나도 금방 왔어. 일단 밥부터 시키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었다. 그런데 심정순의 숟가락질이 영 시원치 않았다.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엄마,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심정순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혼자만 속 끓이지 말고 저에게 털어놓으세요.”
심정순은 어렵게 입을 뗐다.
“실은 말이다...며칠 전에 집으로 서류가 하나 왔는데...”
황갈색 서류 봉투의 겉면에는 청주지방법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선경은 봉투에서 ‘소장’이라고 적힌 서류를 꺼냈다.
“건물명도청구의 소.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에게 별지 기재 목록의 부동산을 명도하라.”
김선경은 서류에 적힌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분명히 한글이었는데, 그 의미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고 한국토지주택공사’라고 적힌 걸 보니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김선경은 한국토지주택공사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소장 받으셨다고 했죠? 소장에 다 나와 있는데, 뭘 또 전화를 하고 그러세요?”
담당자는 귀찮다는 말투였다.
“쉽게 이야기해서 심정순 씨는 아파트를 비워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왜 저희 어머니가 집을 비워야 되는 거죠?”
“계약 기간 끝났으니 나가야 하는 거죠.”
“네, 그게 무슨...”
“저, 지금 바빠서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어차피 소송하고 있으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법원 가서 하세요.”
김선경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전화기는 끊어진 상태였다.
“뭐라고 하니?”
심정순은 근심스레 물었다.
“계약기간 지났으니 집을 비우라고만 하고 자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네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막무가내로 쫓아내는 법이 있을 리 없어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선경은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김선경의 말을 들은 고혁두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는 그런 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소장인가 뭔가 하는 서류가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지...”
“그러게요.”
주변에 법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임정순과 김선경 모두 주변에 법조인이 없었다. 변호사가 몇 만 명이 넘는다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변호사는 멀리 있는 존재였다.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고혁두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