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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판의 시작

by 로도스로

“답변서를 내셔야 합니다.”

고혁두가 말하자, 김선경이 되물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원고가 소장을 제출했으니 피고는 답변서를 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장을 받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무변론(無辯論) 원고 승소 판결이 선고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속수무책으로 질 수도 있다는 뜻이죠. 그걸 막으려면 답변서를 내야 하는 거고요. 소장은 언제 받으셨죠?”

심정순이 골똘하게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한 2~3주 정도 된 것 같아요.”

“답변서는 소장을 받은 날부터 30일 안에 제출하는 게 원칙입니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고혁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을 향해 걸어 나가며 말했다. 계산을 끝낸 고혁두가 막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김선경이 고혁두의 팔을 잡았다.

“저, 잠깐만요. 누구신지는 잘 모르지만 법조계에 계신 것 같은데, 저희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답답해하시는 것 같아 몇 마디 조언을 해 드렸을 뿐 더 도와 드리기는 힘들 것 같네요. 답변서 쓰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 아는 사람 중에 변호사나 법무사 있으면 답변서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전 이만...”

몸을 돌리던 고혁두의 눈빛이 심정순의 눈빛과 마주쳤다. 깊은 슬픔이 어린 눈이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소의 눈 같았다. 그걸 보자 고혁두도 더이상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사장님, 혹시 A4용지 있나요?”

고혁두는 식당 주인이 건넨 종이에 글씨를 단숨에 써내려 갔다.

- 답변서. 청구취지에 대한 답변. 1.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라는 판결을 구합니다. 청구원인에 대한 답변. 원고의 소장 기재 청구원인에 대해 일응 부인하며 자세한 사항은 추후 제출하겠습니다.

“여기 성함 옆에 도장 찍으셔서 법원에 제출하시면 됩니다.”

그 말을 남기고 고혁두는 재빠르게 식당을 벗어났다.

“저기 선생님...”

뒤에서 고혁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혁두는 돌아보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법조인 역할을 하는 게 싫었다.

한때는 법이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질서라고 믿었다. 법조인이라는 자긍심도 누구보다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약 법조인이 되지 않았다면, 예지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예지가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을 떠난 건 자신이 검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법은 이제 고혁두에게 환멸의 대상이었다.

얼마 뒤. 청주지방법원 출입문 앞에 심정순이 서 있었다. 오늘은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심정순이 벌이고 있는 소송의 첫 번째 재판일이었다. 심정순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집에 보관하고 있던 청심환을 하나 꺼내 먹었지만 가슴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가급적 피하고 양보하는 것, 국가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절대로 하지는 않는 것, 그게 심정순이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지켜온 신조였다.

그러니 경찰, 검찰, 법원과 같은 국가기관은 심정순에게 아득하게 먼 곳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법원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전까지는 말이다.

심정순이 혼자 법정에 들어간 그 무렵, 고혁두는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도로 표지판 속의 ‘법원 사거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심리학 용어 중에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는 게 있다. 파티장의 시끄러운 주변 소음과 대화 속에서도 대화를 하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그건 여러 정보 중에서 본인이 관심을 가지는 걸 선택적으로 지각하여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만큼 사물이나 장소에 대한 지각 능력은 관심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학교 선생님은 학교가 눈에 잘 들어오고, 의사의 눈엔 병원이 가장 잘 보이는 법이다.

“그동안 일부러라도 법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는데, 습관이라는 건 참 무서운 거군.”

고혁두는 혼잣말을 한 뒤, 다시 젓가락을 들어 컵라면으로 향했다. 근데 왜 그때 하필 식당에서 만났던 그 할머니가 떠올랐을까?

‘재판 대응은 제대로 하고 있으려나?’

고혁두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왜 그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당사자가 알아서 잘 하겠지.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일이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냐.’

신경을 끄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날 본 모습에 따르면 그 할머니는 법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았고,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고혁두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할머니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었다.

‘이름도 연락처도 아무 것도 모르잖아. 잠깐 이름은 기억이 날 것 같은데?’

그때 답변서를 대신 써주면서 심정순이라는 이름을 썼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그걸로는 불충분했다.

‘사건번호도 모르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사건번호는 소송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법원에서 붙이는 고유의 일련번호 같은 것이었다.

고혁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바로 그때 하얀빛이 번쩍였다.

처음에 하얀빛을 봤을 땐 굉장히 놀랐는데, 이제 이것도 몇 번 겪다 보니 익숙해졌다. 번쩍임이 끝나자 고혁두의 손은 자연스럽게 휴대폰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휴대폰의 바탕화면을 확인해봤다.

‘역시...’

이번에도 바탕화면의 사진이 바뀌었다. 청남대 사진이 있던 화면은 심정순 사건의 소장(訴狀)으로 변경된 상태였다. 바탕화면 사진이 바뀐 건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의 변화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기존 사진들은 휴대폰에 자체적으로 저장되어 있던 사진이거나 인터넷에서 쉽게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심정순 사건의 소장은 달랐다.

심정순이 소송을 당한 건 고예지가 사망하고 난 뒤이니 이 소장이 휴대폰에 자체적으로 저장되어 있었을 리 없다. 더욱이 소장은 인터넷에 일반적으로 널리 공개된 서류도 아니고 소송의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확인할 수도 없는 서류였다. 이걸로 이 휴대폰이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건 분명해졌다. 생각해보면 처음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검찰청 증거 보관실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납골당에서 나타난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물론 휴대폰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지금은 휴대폰의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심정순의 사건이었다. 고혁두는 대법원 사이트를 통해 사건번호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를 본 고혁두의 표정이 묘혔다.

‘하, 참. 난감하네. 하필 오늘이 재판일이라니. 우연치고는 참....’

심정순의 재판을 맡은 판사는 4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청주지방법원 2019가합456252 건물명도, 원고 한국토지주택공사, 피고 심정순 사건을 진행하겠습니다. 당사자들 앞으로 나오세요.”

험난한 재판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심정순을 엄습했는데 그 불안감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늘 첫 기일입니다. 원고 측에서는 2019년 9월 10일자로 소장을 제출하시고, 증거로는 갑 제1호증부터 갑 제3호증까지 제출하셨네요. 소장 진술하시겠습니까?”

“네, 진술하겠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를 대리하고 있는 김예은 변호사는 똑 부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피고 측은 2019년 9월 25일자로 답변서를 제출하셨습니다. 피고측 답변서 진술하시겠습니까?”

“네?”

심정순도 진술이 사전적으로 ‘말한다’라는 의미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변서를 진술한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어나서 답변서를 읽으라는 소리인가?’

괜히 잘못 이야기했다가 소송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판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딱딱한 인상의 판사를 보니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재판 갔는데 판사가 서면 진술할 거냐고 물어본다고? 설명하자면 길기는 한데 그건 그냥 재판의 절차적인 부분이니까 크게 신경쓰지 말고 진술한다고 하면 돼. 나 지금 법원에 와 있으니까 전화하지 마.”

법정 뒤에 있던 법원의 경위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다가왔다.

“여기서 전화하시면 안 됩니다. 나가서 통화하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급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막 전화를 끊었고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고혁두였다.

법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어하던 고혁두가 법정을 찾은 이유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나자 지방에 살던 할머니가 한 번씩 고혁두의 집을 찾아와서 고혁두와 동생을 돌봤다.

심정순은 할머니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나긋나긋한 말투가 비슷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는 한 평생을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이 풍기는 향기가 있었다.

뒤에서 소리가 들리자 심정순이 몸을 돌렸고, 고혁두를 알아봤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보니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진술을 하면 된다는 고혁두의 힌트를 받은 심정순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네, 재판장님. 진술하겠습니다.”

심정순의 대답을 듣자 판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원고는 소장에서 계약기간이 종료되었으니 이 사건 아파트에서 피고가 나가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피고는 원고 청구의 기각을 구하는 취지의 형식적 답변서만 제출하고 자세한 주장을 하지는 않으셨네요. 어떤 주장을 하고 계신 건가요?”

심정순은 침을 꼴깍 삼킨 뒤에 말을 시작했다.

“판사님, 억울한 부분이 있어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주택공사가 임대주택을 지어서 저같이 가난한 사람들 살 공간을 마련해 준다고 했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싸게 집을 이용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도 컸지요. 그런데 갑자기 집을 비우라고 하니 참으로 막막합니다. 그리고...”

심정순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려고 했지만 주택공사 측 김예은 변호사는 심정순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계약기간이 끝났으니 나가야 하는 게 법적으로 맞습니다. 피고는 지금 법 논리에 따른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 인정에 호소하고 있을 뿐입니다.”

“변호사님, 제 말씀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 주장인가요? 민법이든 임대차보호법이든 법률적인 주장을 해 보시죠.”

그러자 심정순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 그게....”

김예은 변호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변호사로 일한 지 10년 가까이 되는 김예은 변호사와 법에 문외한인 심정순은 대등한 위치가 아니었다. 이미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양측의 공방을 가만히 지켜보던 판사가 개입했다. 판사가 보기에 이 사건의 결과는 빤해 보였다. 이렇게 피고 심정순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원고 주택공사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결과가 분명하다면 길게 끌 것도 없이 재판을 빠르게 마무리 짓는 게 나았다.

“피고 측에서는 특별히 법률적인 주장을 할 게 없는 것 같은데, 이만 변론을 종결해도 될까요?”

그때 다시 고혁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판사가 변론종결을 하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냐고? 그건 재판을 끝나고 조만간 판결선고를 하겠다는 거야. 너 근데 전화하지 말라니까, 왜 계속 전화질이야?”

이번에는 경위가 아니라 판사가 고혁두를 제지했다.

“저기, 뒤에 계신 남성분. 자꾸 그런 식으로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퇴정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재판장님. 전화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 전화가 와서요.”

고혁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예 전화기를 끄겠습니다.”

판사가 다시 말했다.

“원고와 피고는 변론 종결에 동의하시나요?”

“원고는 동의합니다.”

지금 재판을 마치면 보나마나 원고인 주택공사의 승리였기에, 원고 측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피고는 어떠십니까?”

심정순이 머뭇거렸다. 고혁두가 한 말에 따르면 지금 변론을 종결시키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재판을 끝내지 말고...”

하지만 그 다음에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누군가의 말이 들렸다.

“속행(續行)을 구한다고 하세요.”

어느새 고혁두는 심정순의 옆에 와서 서 있었다.

“참고로 속행을 구한다는 말의 의미는 지금 바로 재판을 끝내지 않고 재판을 조금 더 진행하자고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네요. 거기 계신 남자분. 지금 뭐하시는 거죠?”

판사는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재판을 방해하는 걸 계속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급 바로 퇴정하세요.”

법원 경위가 고혁두에게 다가와서 고혁두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재판장님, 죄송하지만 퇴정을 명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재판에 개입하고 있으니 재판을 주재하고 있는 판사로서 퇴정을 명하는 겁니다.”

판사는 목소리는 근엄하고 진지했다.

“제가 이 사건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판사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고, 고혁두는 천천히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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