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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Apr 07. 2021

내게 여행과 집이란

책 리뷰 :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무조건 좋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작가의 책이다.

역시나 너무 좋아서 한번에 리뷰하기 아까 정도이다. 프롤로그부터 한 챕터 한 챕터씩 아껴서 리뷰를 하고 싶은 책이다.


지난했던 겨울,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의 시기는 낭비하며 보낸다. 대체로 늘 나의 겨울은 그랬다. 지난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살을 찌웠고, 잘 보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를 책보다 더 많이 봤고, 또 적당히 많은 쇼핑으로 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그런 루즈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지만, 코로나로 인해서인지 봄은 봄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3월 기관을 처음 가기 시작한 첫째와, 여전히 기관을 가지 않는 둘째를 보는 일은, 차라리 둘다 기관 가지 않던 때가 더 편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거기다 기관을 보내면 가장 힘든 일인, 아이가 아파오는 경험도 벌써 두번이나 했다. 첫째가 감기로 2~3일 고생하다 나으면 바로 둘째의 감기가 시작된다. 둘째는 첫째보다 더 심하게 아프고 더 심하게 짜증을 낸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아이들 수발을 들고 나면, 체력이 좋지 않은 내가 마지막으로 감기몸살을 하며 아이들에게 짜증을 낸다. 그런 한달을 보낸, 즉 지리했던 겨울보다 조금도 더 나아지 않은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피곤한 몸과 우울한 마음이 이어지던 날, 나는 오소희 작가의 신작을 만났다. (그전에 나온 책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도 당연히 읽었고 매우 좋았지만) 이번 책은 내가 좋아해 마지 않 여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니.. 더욱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정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프롤로그 :  최초의 나의 공간


여행은,

한때 용한 휴식처이거나 도피처였다.


내게도 여행은 그런 의미였다.

19년 5월 말.. 그러니까 첫째가 35개월, 둘째가 9개월인 때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9개월을 여행하지 않았으니, 떠나지 않고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1년에 단 3일의 휴가를 낼 수 있었고, 최소한 한두달 전에 휴가를 예약해야하는 직업이었다. 거기다 토요일에도 격주로 출근하는 남편과, 충동적인 여행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당장 떠나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았기에, 친정엄마를 꼬셔보았다(?). 언제나 성실한 남편과 친정엄마에게 내가 지금 당장 여행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야했는데, 다행히 좋은 핑계가 있었다. 한달 뒤면 36개월이 되는 첫째가 마지막으로 공짜 뷔페를 먹어야하므로, 35개월인 지금 꼭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단호하게 이유를 댔다.

언제나 성실한 두 사람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핑계에 순순히 오케이를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3박 호텔 경비를 대고, 여행에서 내가 도움을 받기엔 꽤 연세가 드셨지만 그래도 성인 친정엄마와, 35개월, 9개월 두 아들과 넷이서, 제주도로 떠났다.


남편과 친정엄마의 허락이 떨어지고 이틀 뒤에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고, 이틀 동안 정신없이 여행 준비를 했다. 분유와 이유식을 동시에 먹는 9개월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에선 준비물이 꽤 많다. 거기다 아기 둘을 데리고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이틀을 보내고 떠나기 전날 밤, 정신이 들었다.


자주 가는 인터넷 까페에 글을 썼다. "내일 친정엄마와 35개월, 9개월 두 아이와 제주도로 3박4일 떠납니다. 제가 잘 할 수 있겠죠?"라고. 댓글들은.. 나같음 가지 않겠지만, 기왕 가기로 한 거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응원(?)이었다.


그 여행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가기 전 예측이 불가능했듯이 갔다와서도 정확히 어느쪽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여행 중에 나는 늘(관광지, 수영장, 호텔 복도 등 대부분의 시간을) 9개월 아기를 아기띠로 안고 다녔고(유모차를 거부했다), 공항에서는 그 9개월 아기를 아기띠로 안고, 아기용품으로 가득찬 큰 캐리어 두 개와 유모차를 실은 무거운 카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그때 친정엄마는 잠투정하는 35개월 첫째를 업고계셔서 손이 없었다). 나는 여행지에서 늘 서서 먹거나 아이를 업고 먹거나 했지만 닥치는대로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니 살이 2~3키로 빠져있었다. 그리고 친정엄마에게 "다시는 이렇게 여행가지 않겠다" 원망가득한 말을 들었다. 나는 엄마보다 내가 몇배는 힘들었던 것 같은데...


다만 그때 떠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고, 떠나고 돌아와서는 어쨌든 그럭저럭 숨쉬며 살아가졌으니.. 결코 나빴다고 할 수없는 여행다.


그렇게 내게 여행은 용한 휴식처, 도피처인데, 코로나는 나의 그 도피처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이다. 탈출구를 잃은 나는, 그래서 작년에 우울의 늪으로 빠져든 것일까?




스물넷, 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었는데, 그곳은 보수적인 걸로 2등이라면 서러울 교직사회였다. 내게 선생님 같은 선배교사들과, 조카쯤 느껴지는 학생들 사이에서(심지어 누나라고 부르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내 포지션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뭐든 열심히 해내는 성실한 막내 교사로 보이고 싶었고, 학생들 앞에서는 초임이 아닌(나이도 속였다. 물론 아이들은 안 속았지만) 능숙한 교사로 보이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내가 아닌 타인의 눈에 맞추어 연기하는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해외로 떠났다. 학기 중의 내가 가면을 쓰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느낌이었다면, 방학 중에 떠나는 해외여행에서는 진정한 나를 '현'는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 나는 이십대 중반의, 교사 같지 않은 교사가 아니었다. 그냥 대학생이라고 하면 다 믿어주었고, 해맑은(?) 대학생처럼 행동해도 괜찮았다.


교사일 때는 활동의 제약이 많았다. 길에서 모르는 학생이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고(그때부턴 길에서도 점잖으려고 노력했다), 어느날에는 (학교 동네가 아닌)목욕탕에서 알몸으로 인사를 받기도 했다(그날의 충격으로 잠시동안지역을 막론하고 대중탕은 가지않았다).

나를 제약하는 건 학생들 뿐 아니라 선배교사들이라는 존재도 있었는데, 어느날은 수업을 다녀왔는데 교감선생님께서 내 교무수첩을 몰래 읽고 계시는 거다. 거기다가 그나마 내 또래라 할만한 당시의 이십대 후반의 교사들과도 성향이 맞지 않아 1년차때는 참 많이 외로웠다.


어쨌든 이십대 중반의, 교사처럼 보이고 싶은 교사가, 성실한 교사인 척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의 여행지에서는 달랐다. 내 맘대로 옷을 입었고(튀는 네일아트부터 짧은 치마는 물론이요, 유럽에선 유럽인마냥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가슴골이 보이는 옷도 입다), 길을 걷다가도 내 양껏 크게 웃어보았고, 문화재 앞에서도 지나치게 고지식하게 굴지 않았다. 그 문화권 내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내 마음껏 즐기며 행동했다. 여행지에서 나는 온전히 나로서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학기 중의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 여행지에서의 일탈은 내 숨통이게 했다.


나에게 그런 여행이, 결혼 후 휴가가 없는 남편을 만나면서 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남편은 일하는데 혼자 여행을 가는 게 미안했다(나홀로 36일간 유럽여행도 해보았기에, 결코 혼자 여행하는 걸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온전히 남편에 대한 배려였다). 그렇게 내 여행은 결혼과 함께 멈추었고, 나의 욕구불만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육아와 함께 그 욕구불만은 더욱 심화되었고, 코로나로 인해 이제 여행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때의 이런 책이라니...좋아하는 작가의,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이야기라니.. 정말 반갑기 그지없다.





집이란,

삶을 담는 그릇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공간의 씨실과 시간의 날실을 엮어

삶이란 카펫을 짜는 사람들이다.


중략


밖에선 자꾸 집으로 돌아오고 싶고

집에 있으면 밖으로 나가고싶지 않은

그런 기분으로 집과 내가 매일 서로를 품는다.


정착한 것이다.


20년 12월, 나도 리모델링을 마친 집에 들어왔다. 이 집은 나름 오래살 것을 계획하고 들어온 집이다. 결혼 후 한번도 내 집이 없었던 적이 없던 나는 작가처럼 집에 대한 '한'은 없었고, 다만 최대한 더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집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고 그 결과 나름 만족스러운 집이 완성되었다.


내 예산을 3천만원이나 초과한 리모델링 업체 사장님은, 호텔만큼 좋은 집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하셨는데, 우리집이 객관적으로 호텔보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내가 남편에게 호캉스를 가고 싶다고 말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짜로 갈 수 있는 호텔여행도 마다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을 즐기고 있으니, 작가가 말하는 '집에 돌아오고 싶고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그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정착..

서울에 강남이 있다면 대구는 수성구가 있다. 나는 중구에서 태어나 서구에서 자랐고, 북구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아빠의 사업이 용이했던 서구, 남편의 출퇴근이 용이했던 북구에 살면서, 나는 늘 수성구를 동경했다. 그런 수성구에 내 집을 마련한 건, 분명히 만족스러운 정착이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더 좋은 학군지로 이사할 생각도 있지만, 아이들이 독립을 해서 남편과 둘이 남았을 때에도 좋을만한 동네인 것이다. 서울의 부자동네나 고급아파트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평생을 이 지방에서 살 예정인 내게는 만족스러운 정착이다.


작가처럼 소울이 담긴 동네나 집은 아니지만, 작가님은 밖으로 돌만큼 돌고서 마침내 취향을 발견하고 정착한 집이겠지만,

아직 작가님보다 어리고 덜 돌아다녀서 그렇다는 합리화도 해보고, 더 정확히는 아직 무르익지 못해 적당히 남보기에 좋고 꽤나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내 취향껏 정착한 집 같다.



책 리뷰를 가장한 나의 이야기였다. 또 다음 챕터도 이렇게 내 삶을 곱씹으면서, 마치 좋아하는 작가께 내 이야기를 나누듯, 리뷰를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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