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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Nov 29. 2020

엄마는 늘 바쁘셨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엄마는 언제나, 항상, 늘 바쁘셨다.

너무 할 일이 많으셔서 걸음조차 너무 빨랐다. 엄마는 늘 뛰듯 걸으셨기에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와 걸을 때면 늘 "엄마 천천히 좀 걸어" 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야했다. "그래" 해놓으시고도, 습관이 되어 다시 걸음이 빨라지셨다.


나의 엄마는 내 학창시절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나를 기다렸던 일이 한번도 없으셨고, 하교 후 집에서 나를 맞이한 적이 한번도 없으셨고, 학부모 모임 따위에 참석할 여유도 없으셨다. 한번은 내가 하도 속상해해서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기로 하셨는데, 정말로 일하다 뛰어오셔서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정말 초라한 차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입고 올거면 다시는 오지 말라는,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했고, 엄마는 정말로 다시는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은 '않았다'가 아니라 '못했다' 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맏딸이었기에, 나는 그런 엄마를 감히 원망할 수 없었다. 사회가 말하는 도덕, 자식된 도리, 그리고 내 마음의 서운함을 덜기 위한 방어기제까지 해, 오히려 나는 엄마에게 원망이 아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나의 엄마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음식을 준비했고, 가게문을 열었고, 하루종일 손님을 상대했고, 그 와중에 일하는 아지아들 점심까지 직접 해먹이셨다. 머리로만 일하는 아빠를 대신해 온갖 잡일과 노동(짐 정리 등)까지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고3이 되는 나를 위해 새벽시간을 이용해 운전면허도 따셨다. 버스로 통학했던 내가 고3때는 엄마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엄마는 "그동안 장사하느라 바빠서 신경써주지 못했는데, 그렇게라도 고3이 되는 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중학생 때였다. 학원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저녁 골목길에서, 모르는 남학생이 나의 엉덩이를 스치듯 만졌고, 당황하는 나 보며 비웃는 웃음을 짓고 갔다. 나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잔뜩 안고 엄마 가게로 갔다. 손님이 있을 때는 말 걸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정말 놀랐고, 손님을 응대 중이던 엄마를 기어이 불러냈다. 손님 응대가 가장 중요한 엄마지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날 보고는 와주었다. 내가 방금 전의 그 일을 이야기하자, 엄마는 "그거면 됐다. 별일 아니네. 괜찮아" 하시고 급히 다시 손님에게 갔다. 나는 그날 그 모르는 남학생보다 엄마에게 더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엄마가 먹고사는 일에 정말 고생이 크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엄마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대신, 엄마께 감사하고 존경을 보내는 딸로 성장했다.




며칠 뒤 이사를 앞두고 엄마는 몇 번이나 카톡을 보내 물어오신다. 엄마가 도와줄 것이 없냐고.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의 이런 관심이 거추장스럽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나에 대해 물어주신 일이 거의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일을 혼자 알아서 잘 처리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 어릴 적 소원(어린이들은 소원이라는 말을 남발한다)이 엄마와 시내에 나가보는 거였다. 더 커서는 엄마와 팔짱 끼고 백화점에 가는 것, 또 더 커서는 엄마와 여행 가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쁜 엄마에게 나와의 그런 사치스러운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엄마는 가게 아지아들 뜨신 밥을 해먹이는 일, 집안의 제사를 모시는 일이 더 가치있었지, 나와 그런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내려 하진 않으셨다. 내가 첫아일 출산하기 전에도 엄마는 "산후도우미 비용을 줄 순 있지만 엄마가 직접 산후조리는 못해준다"고 말하셨다.


안다. 마음이 없으신 게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없으셔서 그렇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바쁜 엄마를 둔 딸로 외로웠다. 엄마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내 가슴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 외로웠다.


최근 몇년간 나는 엄마에게 많이 투덜거렸다. 자식을 낳으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나는 그 반대였다. 자식을 낳고서 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서너살의 어린 나를 떼어놓고,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날 떼어놓고 장사를 나간 엄마를,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전혀 보지 않았던 엄마를, 그간 감사와 존경으로 무장해 엄마를 대해왔지만 내가 자식을 낳아보니 내게 왜 그나싶어 엄마에게 매정하게 대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마음이 그러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금이라도 엄마에게 그때 그래서 서운했다고 말한다면. 우리 엄마는 내게 사과해주실 거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은 하지않고 엄마를 매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마치 복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성공한 워킹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지만, 엄마의 그 고생 덕에 우리 가정은 물질적 넉넉함을 누리고 있지만,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엄마 딸은 정신적으로 외로웠다고 항의하고 싶었다.


수십년간 내 마음을 나 스스로도 속여왔던 것 같다. 나는 누구보다 엄마와의 시간이 필요했던 딸이었는데, 엄마는 나와의 시간을 내 학창시절 내내 한번도 내어주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 때 엄마가 자궁근종 수술을 하시느라 입원해서 내가 간호했는데, 그때가 엄마와 처음 오랜시간을 함께 보낸 때이고 그래서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엄마를 좋아했는데, 엄마는 날 사랑하는만큼 내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맏딸인 나는 그런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고, 오히려 감사하고 존경해야했다. 그러고 이제서야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튀어나온 것 같다. 결혼을 했고 이제 육아도 할만해질만큼 아이를 키웠는데, 이제서야 아이들과 언제 오느냐고 말하시는 엄마께 나는 복수가 하고픈 걸까.





요즘 첫째가 내 말투를 거의 그대로 둘째에게 쓴다. 내가 기분좋을 때면 하는 말들을 동생에게 거의 비슷하게, "우리 순순이 왜이렇게 귀여워" "필요한 거 있음 말해. 엉아가 다 해줄게" 한다.


그리고 내가 화낼 때 하는 말투와 말들을 고대로 또 둘째에게 하며 동생을 혼낸다. "그러니까 엉아가 조심하랬지. 하지말라고 하면 안 해야지" 그 모습을 보고있자면, 정말  뜨끔뜨끔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반성하게 된다.



자식에게는 공것이 없다고 한다. 나는 내 엄마의 그 부지런함과 성실성 덕분에, 엄마는 일하기만하고 누리지는 못한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엄마와의 교감과 소통은 하지 못한, 정신적으로는 외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기도했다. 말로 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해 나름의 부를 이룬 엄마를 따라, 나 역시 적 성장을 위해 매진하는 일이 삶에서 가장 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를 원망하기부터 해야겠다. 더이상 머리로만 했던 감사와 존경을 멈추고 엄마를 충분히 미워해봐야겠다. 그리고 난 뒤,  불쌍한 우리 엄마도 어루만져 주어야겠다. 평생을 돈 버는 일만 하느라 돈을 쓸 줄도, 시간을 쓸 줄도, 좋은 것을 누릴 줄도, 가장 중요한 자신의 마음을 돌보거나 챙길 줄도 모르는, 우리 엄마를 내가 어루만져 주어야겠다. 내가 내 자식을 키우는 데 급급해 엄마를 제대로 보지 못한 그 사이, 어느새 많이 늙으신 우리 엄마가 더 늙으시기 전에, 어서 내 마음을 정리하고 진심으로 엄마에게 다가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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