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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12. 2021

나의 삶도 정상적이지 않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고


나는 내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알고 살아왔다. 아니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고자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내 삶이 불.편.하게 여겨졌다. 콕 집어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내 삶이 불.편.했다. '불편'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합하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삶이지만,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 하나 들어있는마냥 무언가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 삶은 늘 급했고(바빴고), 늘 애썼다.

언제나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노력했고, 그 목표에 도달하면 잠깐 행복했고(보상을 주었고), 또 다음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달렸다. 목표가 없으면 불안해서 늘 새로운 목표들을 억지로 만들어두었다. 그 목표는 주로 내 개인의 안일과 영달과 관련된 것이었다. 행복을 잡고싶었지만, 그 행복이란 것은 늘 한 발자국 이상 앞에 있어 잡기 힘들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 사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짚었습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가 그것입니다. 


프랑코 베라르디가 말하는 네 가지가 내게 너무 일상화된 것이어서 나는 그것이 문제인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김누리 교수도 한국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권 감수성의 부재, 과한 소비주의 문화, 권위주의의 내재화, 자기착취의 만연, 약한 자아.


김누리 교수가 말한 한국인의 특징에 나는 모두 해당한다. 그런데 김교수가 말하기 전까지 나는 나의 저 모습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하게 여긴 것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극단적으로 말해 현재가 노예상태임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내 삶도 정상적인것이 아니었다.





<정상성의 병리성>


나의 학창시절은 오로지 공부하는 시기였다. 비정상적으로 공부만 했다. 다른 것은 거의 용납되지 않았다. 또 그 공부라는 것은 주로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고, 나는 그것을 열심히 암기했다. 그 학창시절 노력의 결실은 오로지 수능시험날 결정되었다. 원샷의 사회인 것이다. 그날의 긴장감은 그 후 1~2년간(그 이후로도 가끔씩) 악몽을 꿀 때마다 반복될 정도로 강렬했다.


대학시절은 내 학창시절 6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의 시간이어야 했다. 선생님과 부모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대학만 가면 다~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가자마자 귀를 뚫었고, 대학에 가서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때로 밤늦게까지 놀았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대학교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리고 대학교3학년이 되자 다시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해야했다. 수능을 망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더 철저히 공부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어느 나라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이제는 즐길 일만 남았다. 그간 내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나는 열심히 돈을 썼다. 김우창 교수님이 말하는 오만과 모멸의 극단에서 나는 오만에 속했고, 마구 소비함으로써 그것을 즐겼다.



하지만 오만과 동시에 나를 지배하는 또다른 감정이 있으니, 그것은 '죄의식'이다.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서 마음껏 공부하지 못했던 내 부모님과 달리 나는 과외를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시절 내내 돈이 곤궁해서 알바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엄마는 자주 내게 말하셨다. "세상 너처럼 편한 사람이 없다. 맘껏 공부할 수 있었고, 머리가 좋아서(?) 시험도 쉽게 붙었고, 돈 걱정으니."


그래 내 성취는 내 노력이기 보다는, 운이 좋았던 거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이미 주어진 것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정도 하는 건 당연한 거다. 아니 더 잘했어야 했다.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더 큰 성취를 한 사람도 많은데 고작 이정도 성취로 만족이라니. 지금이라도 더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착취하며, 죄의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약한 자아가 형성되었다.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경우에는 내면에 죄의식이 생겨납니다. 이게 끔찍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안되는구나. 내가 게을러서 실패하는 거지, 내가 더 노력해야 해.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비난하고 착취합니다.

-중략-

내가 너무 안이한 것은 아닐까. 너무 뒤처지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노예 감독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착취입니다.

-중략-

행복감을 느낄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불행에 대한 책임을 다시 개인에게 전가합니다. 정말 이상한 사회입니다. 개인을 억압하는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긴 불행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으며, 다시 또 개인을 착취하는 이상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나는 오만과 죄의식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안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그간 정상인줄 알고 살아왔지만, 그것이 정상이 아닌 것을 이제는 알았다. 또한 내가 보낸 학창시절, 내가 오만과 죄의식을 동시에 가지도록 만든 사회 역시 정상이 아니다. 그것을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 끼맞추어, 그 속에서 상위에 속하고자 부단히 애쓰며 살아왔다. 학창시절은 성적경쟁의 시간이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전교50등까지 벽에 이름을 붙였는데, 나는 그 행위가 비인간적이라는 생각대신 그 50등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벽보가 좀 너무했다고 뒷담화를 하긴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은 더더 앞쪽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었다.


사회정의를 생각하는 대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애썼고, 나름의 승리를 거두며 오만해졌다. 동시에 온갖 열등감과 죄의식을 가지기도 해야했다. 약한 자아가 형성되었고, 불안과 두려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가진 것을 잃으면 안 됐다. 더 가져야 현상유지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자기 착취가 심각하게 자행되었다. 그리고 일정 목표를 달성하면 나에 대한 보상으로 소비를 했다. 과할 정도로 소비를 했고, 그것이 유일한 즐거움이 되기까지 했다. 

 

이는 완전히 비정상적인 삶이다. 이런 사람이 자신이 정상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으니, 이 사회가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을까.


사회적 정의보다 경쟁에 익숙한 사람,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 약해진 사람, 소비로 즐거움을 찾는 사람,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사람, 자기계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 착취를 일삼는 사람, 오만과 죄의식이 마음속에 가득한 사람, 그래서 자아가 약해진 사람. 자치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걸 모난 돌이라며 비난하는 사회에서 주체적 결정에 대한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스스로를 아주 정상적인 민주시민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그런데 둘러보면 나만 비정상적인 삶은 아니다. 내 남편은 더한 경쟁에 익숙하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낸다. 토요일도 격주로 출근하고 휴가는 1년에 단 5일이다. 그에게 일은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만 하는 삶은 당연히 정상적이지 않지만 그는 그것이 대한민국 남편의 정상적이며 모범적인 삶으로 생각하고 산다.


나의 엄마는 돈이 없는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돈이 정말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지 오래이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고 말하는 나에게, 내가 돈없는 고생을 안해봐서 편한 소리한다고 엄마는 말씀하신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생계를 위한 돈이었지만, 오직 돈을 위한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 역시 도처에 깔려있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생각으로, 오로지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된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 이들은 분명히 자본주의의 노예인데, 자신이 노예 상태인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화폐가 된 지 오래이다.


김누리 교수님이 말씀하셨듯 우리 사회는 학벌주의가 심각하다. 그 학벌주의에서 상위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사교육시장에 투입된다. 심각할 정도로 아이들에게 공부가 강요된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그러는지 인지하지 못해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심각할 정도로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부모들이 많다. 김누리 교수님은 '우울한 어린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셨지만, 이미 청소년 자살율이 그 말의 자명함을 알려준다.


인식을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가장 책 읽지 않는 나라이다.

인식과 성찰이 사회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한 공동체에서 소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고 성찰하는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회, 책 읽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사회이다. 타 선진국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만 한국에서는 책 읽는 사람이 '특이'하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정상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독일인들은 한국 사회를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어떻게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자들이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야수 자본주의를 아무런 통제 없이 방치할 수 있을가. 어떻게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을 무한 경쟁의 정글로 몰아댈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주입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리기를 모두가 신념화하고 있다. 경쟁 이데올로기, 소비 이데올리기, 승자 독식 이데올리기 등등. 한국인들은 북한 주민들보다 더 경건하게, 더 무비판적으로, 자본주의가 내면에 심어놓은 이데올리기를 신념화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한국인은, 우리가 북한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비상식적이고 문맹으로 여길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식'부터 해야한다.



한국인 대다수는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치,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이었던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할 것>


지금 당장 행복해진다. 더이상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자기 착취를 멈춘다. 더 노력하지 말고 더 발전하지 말고 더 경쟁하지 않는다. 행복을 유보하지 않는다.


사회 정의를 생각해본다. 지구를 생각해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소비를 하지 않는 유럽인들을 생각해본다. 나만의 이익이 아닌 사회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본다. 


비판적인 사유를 한다. 내가 왜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내게 죄의식을 덮어씌우는 사회의 이념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본다. 이 사회는 왜 내게 죄의식을 덮어씌우는가. 


그래서 강한 자아를 가진다.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결정한다. 타인의 시선에, 사회의 통념이라는 억압에서 벗어난다. 나만의 68혁명을 시작해본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돈만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노예이다. 과한 소비 역시 자본주의의 노예짓이다. 자본주의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난다. 





다른 학생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창의적인 생각을 드러내면 비판을 받거나 조롱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중략-한국인들의 자아가 약한 것은 자아를 유린하고 파괴하는 교육 때문입니다.


나는 내 생각을 드러내는 일이 두렵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자기검열을 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비판받거나 조롱받는 것이 겁난다. 나는 자아가 약하다. 하지만 조금씩 더 내 생각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겠다. 그것이 나의 비정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고, 우리 사회가 민주시민 사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이다.


민주주의자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한 자아를 가진 자입니다.


김누리 교수님의 말처럼 이제 우리 사회(학교)가 이런 사람을 길러내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주도적으로 못한다해도 각자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나 스스로 불편했던 내 문제를 즉시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 사회에 아직은 지식인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눈물날만큼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김누리 교수님의 말을 빌어 글을 마친다.


우리 스스로를 종속변수로 보는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임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잘못된 상태를 바꿀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상식적인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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