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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n 20. 2021

'엄마'라는 커리어

첫째는 열시쯤 등원해서 두시에 하원한다(그마저도 일주일에 서너번만 간다). 첫째가 유치원에 가 있는 네 시간동안, 둘째와 짐보리 수업도 가고 박물관, 백화점에도 놀러간다. 둘째는 형아 없이 온전히 엄마와 둘이만 보내는 그 시간을 정말로 좋아한다. 2시에 첫째가 돌아오면 그 뒤부터는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그래도 이제 아이들이 좀 컸다고 예전만큼 힘들지 않고 할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의 하루에서 ''의 시간이라는 게 별로 없는 게 다소 나를 지치게 했다. 때때로 아이 목소리의 환청이 들리기도 할만큼.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중, 지난 겨울 이후 정말 오랜만에 아파트 헬스장에 갔다. 아이들 없이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러닝머신에 올라, 가벼운 손놀림으로 티비를 켰다. 마침 <해방타운>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설레는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윤혜진 편이었다. 윤혜진이 발레스트레칭으로 열심히 몸을 푸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발걸음에 더욱 힘을 주며 러닝머신을 뛰었다.


윤혜진은 오랜만에 옛동료들을 만나러 발레연습실을 찾았다. 연습실 문앞에서 동료들이 발레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윤혜진의 표정에서, 나는 윤혜진이 어떤 감정인지 너무 정확하게 느껴졌다. 스튜디오에서 윤혜진이 자신의 그 표정을 보고 눈물을 짓는 것처럼, 나 역시 윤혜진의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윤혜진은 분명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마음 한 켠에는 억울함이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계속 발레를 했더라면, 아마 더 높이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혜진처럼 나 역시 많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아련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가슴 가득 차올랐다.


윤혜진은 출산 후 처음으로 토슈즈를 다시 신어보았고,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춰보았다. 십여년 전의 발레리나 윤혜진으로 다시 돌아간 듯, 여전히 아름다운 몸짓을 선보였다. 하지만 윤혜진은 갑자기 그만하겠다며 동작을 멈추었다. 발레리나 윤혜진에서 엄마 윤혜진으로, 마법에서 풀려나는 듯한 순간이었다.


나는 대리만족을 했다. 윤혜진이 엄마가 아닌 발레리나로 살아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나도 엄마가 아닌 그냥 나로 살아움직이는 듯한 대리만족. 힐링이 되었다.


그런데 더 감동적인 것은 윤혜진의 다음 인터뷰였다. 발레리나로서 명성이 높았던 윤혜진이,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첫번째 챕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엄마 윤혜진이, 인생의 두번째 챕터라고 했다. 발레리나로서 그만큼 명성을 얻기까지 정말 많은 인내와 노력,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커리어를 포기하고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한 윤혜진이, 후회한다고 말할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발레를 그만두어야 했을 때,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가 눈에 걸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때를, 나는 윤혜진이 분명 조금은 후회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엄마로서의 인생이 정말 행복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커리어라고 말했다.


나는 종종 생각했다. 내 아이들이 정말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지만, 내 커리어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돌봄의 역할만이 남은 나의 처지가 때때로 속상하고 지쳤다. 육아 이전의 삶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도 늘 있었다. 그런데 윤혜진의 인터뷰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 잔잔하면서도 크게 감동이 일기도 했다.


그래, 내 소중한 존재들을 얻은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마라는 삶.. 유명한 발레리나 윤혜진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할만큼 너무나 소중한 엄마로서의 삶. 나는 그저 불평했던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수백번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똑같이 엄마의 삶을 가장 1순위로 두고 살 것이다.


티비 보는 걸 멈출 수 없어 40분간 러닝머신을 뛰다 걷다했다. 윤혜진이 해방타운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했고, 옛동료들과 발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고(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서 무언가 깨달음도 얻었다. 40분간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재충전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내게는 세상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소중한 존재 둘이 깔깔 웃고 있다. 윤혜진이 그랬듯, 나 역시 수백만번 다시 선택해도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5세까지 첫째를 가정보육했고 지금 4세인 둘째도 굳이 기관에 보내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주 자주 '나는 왜 사서 고생을 할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굳이 안 끼고 있어도 아이는 잘 클 것인데, 기관에 가면 배우는 것도 더 많을텐데.. 왜 굳이.. 그런데 답이 나왔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이다. 엄마로서의 이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들이라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엄마 품을 떠날 것이기에, 조금더 부대끼며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다시 선택해도 또 이럴 것이니, 기왕의 선택 조금더 즐겁게 지내보자. 내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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