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 Aug 06. 2020

'나'라는 존재의 나 다운 것

나도 작가다 공모전을 준비하며

브런치 작가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아 <나도 작가다> 공모전 알림이 떴다.

아직 여물지 않은 글들이라 그 공모전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나 다운 것'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보고 싶었다.


아이 낳고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후부터, 나는 '나 다운 것, 나의 정체성'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벌써 5년째 나는 혼란스럽다.


내 옷장에는 세 사람 분의 옷이 들어있다.

임신 전 출근할 때 입었던 옷/ 현재 아이와 외출할 때 입는 옷/ 아이 없이 외출할 때 입는(임신 전보다 한 사이즈 커진) 옷. 이렇게 세 종류의 옷이 있다.

나의 정체성도 그렇다. 엄마이기 전의 ''의 커리어를 포기할 수 없고, 하지만 당장 내 눈앞의 두 아이를 돌봐야 하고, 잠시나마 그 아이들 없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


''라는 개체와 두 아이의 '엄마' 사이, 누군가에겐 작을 수도, 누군가에겐 매우 클 수도 있는 그 간극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지, 나는 계속 혼란스럽다.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하루종인 카페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쇼핑을 좋아하니 종종 쇼핑 다녔고, 내 외모를 꾸미는 데에 자주 시간을 썼다. 직업상 장기 여행을 자주 갈 수 있었기에 매년 한두번의 해외여행도 꼭 다녔다.


엄마가  후 나는, 그전과 거의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엄마인 나는 화장실도 원할 때 못 정도로 자유라는 단어는 내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어느새 내가 가장 동경하는 단어가 되었다. 여행은 늘 두 아이와 함께이다. 결코 여행다운 여행이 아니다. 일상에 지쳐 기분전환을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아이와 함께한 그 여행들의 끝에선 '늘 다신 여행하지 말자'다.



또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다소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시험이란 것에 한번도 탈락해본 적이 없정도로 내 능력을 꽤 신뢰하며 살았으며, 그런 나의 대부분의 삶을 꽤 만족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역시 엄마가 된 후의 나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나이다.

엄마인 나는, 나를 온전히 잊은 채 아기에게 내 모든 걸 내어주는 사람이 되었고(어쩌면 그 아기가 또다른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일보다 잘해내고 싶지만 두 아이가 주는 끊임없새로운 도전상황들에 자주 실패했으며, 렇게 자주 나의 무능력을 확인하고 우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나이다.


꽤 자신만만한 삶을 살았던 내가, 엄마가 되고서 깨달았다. 내가 세상에서 이토록 못하는 일이 있다니,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렇게 신은 나에게 겸손이란 걸 가르쳐주시고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도록 하신 것만 같았다.


어떤 날은 생각했다. 지금 내가 실고 있는 이 현실이,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의 현실, 꿈은 아닐까. 도저히 내가 지금 처해있는 이 육아현실이 현실같지 않았다. 어떻게 이게 현실이지?

 자주 많은 밤들 나는 잠들기 전 아주 생생하게 내가 유럽여행을 하던 순간을 머릿속으로 리며 잠들었다. 꿈에서라도 그 순간을 경험하고 었기 때문이다.


시험관 시술을 통해 간절히 힘들게 얻은 두 아이를 두고, 엄마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산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는 또 자책감이 든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자신감을 가질 일들이 많았는데, 엄마가 된 후의 나는 매우 자주 자책할 일들만 생겼다. 첫째가 입이 짧은 것도 내 탓, 둘째튼실한 것도 간된 음식을 일찍 먹인 내 탓, 첫째가 둘째 태어난 후로 입술 깨무는 버릇이 생긴 것도 내 , 둘째가 유독 엄마를 찾는 것도 애착을 잘 형성해주지 못한 내 탓...그렇게 나는 아이를 낳고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야 했다.





첫아이를 낳고 무언가 혼란스럽고 불편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날, 우연히 한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아기 엄마들이 힘든 이유는 자기가 이제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해서이다. 이제 누구보다 강인해야 할 엄마가 되어놓고 아직도 자기가 여자인 줄 알아서 그렇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무릎을 치며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나도 이제 강인한 엄마다. 마음을 고쳐먹자. 내 포지션을 확실히 하자' 결심을 했다.


그런데 둘째까지 낳아도 나는 강인한 엄마는 커녕 더 현실에서 도망가고싶은 나약하디 나약한 여자사람일 뿐이었다. 엄마 경력이 길어졌지만 여전히 엄마로만 살지 못했고, 자꾸 과거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엄마로만 살아야한다는 현실이 점점 더 갑갑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둘째가 태어난 뒤의 나의 자존감은 바닥에 바닥을 쳤다. 26개월 차이가 나는 아이 둘을 나혼자 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던데, 두 아이 육아는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거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며 온전히 두 아이를 집안에서만 돌봐야 하자, 5월의 어느날 남편이 내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그래, 나는 무어라도 해야했다. 정신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다.


나와 비슷한 육아우울증을 겪은 선배들은, 먼저 나를 돌보라고 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엄마가 아닌 '나'의 활동을 해보라고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나는 힘이 들면 글을 썼다. 그때의 힘듦으로 나는 무려 책을 두 권이나 썼는데, 한 권은 스스로도 부끄러워 꼭꼭 숨겨두어 지금은 그게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이고, 한 권은 출판사를 두드려보았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교훈적이라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피드백과 함께 퇴짜를 맞았다.

그 거절에 슬퍼하던 내게 남친은, 그렇게 힘든 일 하지말고 결혼하자고 말했고, 그렇게 그는 내 남편이 되었다.


여튼 글쓰기는 나를 또다시 구해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나를 많이 구해올려주었다.

남편은 내게 우울증 약이 효과가 있나보다했지만, 처음부터 약이 싫었던 나는 이틀정도 먹고 그만두었다. 대신 글을 썼다. 약은 먹을 때마다 나에게 더 자괴감을 주는 듯했는데, 글은 내 묵은 감정을 토해내게 했고 한바탕 울고 나면 무언가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글쓰기를 통해 나는 되살아나는 중이다.




그리고 내가 되살아나면서, 엄마로서의 나도 좋아지는 중이다.

한때는 하루종일 붙어있으면서 돌봐야하는, 너무 소중하지만 자주 나에게 지옥의 순간을 맛보게 한다 생각했던 두 아들이, 다시 내 삶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보물들로 보인다. 그리고 그 보물들과 내 하루를 함께 보내는 일이 점점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5세인 첫째아들은 요즘 헬로 카봇에 빠져있다. 자기는 주인공 차탄이고, 동생은 차탄의 애완견 차바둑, 엄마는 차탄의 여자친구 수지다.


"엄마, 나는 차탄이고, 순순이는 바둑이고, 엄마는 수지야"

"엄마가 전다해가 아니라 수지야?"

"응, 엄마는 내 여자친구 수지야"


나를 차탄의 엄마인 전다해 여사가 아닌, 차탄의 여자친구 수지를 시켜주는 아들이 고맙다.

큰아들은 오늘도 나를 "수지야"하고 부른다. 수지라는 이름은 예쁜 연예인 이름과도 같아 들을 때마다 더 기분이 좋다.  


"수지야 오늘은 어디에 갈까?" 하는 아직 기관에 가지 않는 5세 첫째, 또 아직 말도 못하는 두돌의 둘째 차바둑과 함께, 우리 삼총사는 오늘도 외출을 한다.

외출을 하면 또 멘탈 부서지는 수많은 상황들을 겪지만, 그래도 나가본다.


그리고 저녁 7시가 되면 헬로 카봇 로봇인 아빠가 온다. 헬로 카봇 로봇은 차탄이가 시키는 걸 다 해야한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 요정처럼, 차탄이가(또는 수지가) 부르면 달려와서 온갖 잡일을 다 해야 한다. 나는 그 헬로 카봇이 올 때까지만 즐거이 버텨보면 되는 것이다.





엄마가 된 나는, 더이상 하루종일 카페에서 책을 읽지도, 예쁘게 차려입고 외출하지도, 네일숍을 가지도 못할 뿐더러,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도전상황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수없이 좌절하고 자책하게 되지만,

그 보드라운 목소리로 "수지야" 하고 나를 불러주는 첫째, 내가 화를 내려고 하면 바로 머리 사랑표를 그리는(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둘째, 그리고 우리의 든든한 헬로 카봇인 남편이 있기에, 나는 이제 돌아가기에는 너무 행복한 길에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다만 이 길에서 내가 살 길을 찾는 수밖에. 엄마라는 이름의 삶 속에서, 최대한 나다운 것을 넣어가며.

그렇게 글쓰는 나와, 두 아들의 엄마인 내가 점차 균형을 이루어가며 더욱더 나다운 내가 되어가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