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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Sep 08. 2020

나는 나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 석사논문을 쓸 때 나의 지도교수님은, 삼십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될 정도로 매우 지적이셨고, 미국유학을 다녀만큼 영어도 능통하셨으며, 오십을 앞둔 나이에도 매우 날씬하시고 미인이기도 하셨다. 방학을 이용해 자주 해외에 나가셨고, 아이가 없으니 삶을 자유롭게 사시는 것 같았다. 교수님답게 논문 지도를 하실 땐 자주 날카로우셨고, 나쁘게 말하면 대체로 예민하셨다.


논문지도를 받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뵐 때면, 늘 교수님 방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노크를 할 수 있었다. 좀처럼 남앞에서 떨지 않는 나인데, 교수님 앞에서는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긴장되었다.


어느 논문 발표회 때 외국인 학생이 서툰 한국말로 자신의 논문을 발표다. 교수님 보기에 영 성에 차지 않는 논문었는지, 그녀를 향해 매우 목소리를 높이며 영어로 혼내셨다. 영어라서 나는 다 알아듣진 못했는데, 어쨌든 그때 발표회장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그 여학생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교수님께서 내 논문은 그다지 혹독하게 평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주셨으며, 내가 국어전공자였던만큼 문법적인 부분에선 흠 잡을 데가 없다는 칭찬까지 해주셨다. 내가 교수님께 그런 칭찬을 받을만큼, 나 역시 다소 완벽주의에 예민한 성격이다.




석사 논문을 통과하고, 박사 과정 중에 임신을 했고, 첫째 아이 출산 일주일전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두살 터울로 둘째 아이를 낳고, 이제 나는 내가 쓴 논문의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그때가 까마득하다.

나는 강의를 했고, 강의를 들었고, 책 속에 파묻혀 살기도 했었는데, 어느새 24시간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을 사는 나로만 남았다.


그리고 내가 가까이 하는 사람도 바뀌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둘째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 오시는 베이비시터 이모님은 아이들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첫째 때는 마음에 드는 이모님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아이 하나였기에 시터이모님이 꼭 필요치는 않았다. 하지만 둘을 자 보는 게 너무 벅찼던 나는, 바쁜 남편과 더 바쁜 친정엄마를 대신해, 이모님께 의지했다.


처음 이 분을 겪으며, 다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 부분이 더 많다고,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모님 어깨가 안 좋으셔서 그만두, 다른 이모님을 구했는데.. 오신 모든 분이 나랑 잘 맞지 않았다. 2주동안 네 분의 이모님을 교체한 뒤, 다시 원래의 그 이모님께 전화 드렸다. 마침 어깨 수술을 안 하게 되었다고 그날로 당장 올 수 있다달려오신 후, 지금까지 2년여를 계속 오고계신다.  

 


나의 그토록 예민한 성격에도 잘 맞는, 아니 잘 맞주시는 우리 이모님은, 2년동안 내게 한번도 불평이란 걸 하지 않으셨고, 다른 이모님처럼 내게 훈계도 하지 않으신다. 그저 나를 칭찬하거나 위로하기만 하신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심한 장난을 쳐도, 버릇없이 행동해도 그저 웃으시며 기분 좋게 훈계하신다. 그것은 마치 육아서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훈계법과 비슷하다. 내가 아무리 육아서를 열심히 읽고 따라해보려해도 자주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그런 책을 읽지도 않으셨을 이모님은 이미 그렇게 하고 계셨다. 이모님의 인품은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내가 육아우울증으로 약을 지어왔을 때는 나를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응원해주셨고, 내가 아주 가끔 친구 만나러 나가도 되냐고 조심스레 여쭤보면 화통하게 언제든 나가라고 말해주신다. 정말 친딸처럼 나를 배려해주시는 느낌이다.


이모님은 마음만 푸근하신 게 아니라 요리는 더 대단히 잘하셔서, 아이들 음식은 물론 때때로 어른이 먹는 음식도 해주고 싶어하신다. 빠른 시간에 뚝딱, 마치 요술을 부리듯 요리를 해내신다.


우리 이모님은 긍정적이고 편안한 성격, 배려심 겸손함, 뛰어난 요리력과 청소실력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으신, 성격과 능력치 모두 내가 최근 들어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아이를 낳기 전 내 일은 나름 전문성이 요구되었고, 예민하고 완벽주의였던 내 성격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육아와 집안안이 나의 주된 업무가 되자, 그 나의 예민함과 완벽주의는 나를 비롯하여,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을 힘들게 했다.


아이의 식판에 기름기가 조금 남아있는 것도 용납되지 않아 여러번 헹궈야 했고, 아이와 관련해선 모든 게 친환경제품이어야했고, 아이가 옷을 조금만 버려도 다 갈아입혔고,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을 만지면 매번 손을 씻어주었다.

36개월 이전에는 거의 단 걸 주지 않았고, 간도 최대한 늦게 했으며, 미디어도 절대적으로 통제했다. 깨끗한 환경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바닥을 손으로 직접 걸레질을 했고, 자주 침구류와 커튼까지 빨아댔다.


이 모든 건 첫째 때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정도로 예민했고 완벽주의자였고, 그래서 나 스스로 물론, 아이와 남편, 가끔 만나지만 친정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쓸데없는 완벽주의에 자책하면서도 그걸 버리지 못해 힘들어 하나는, 우리 이모님의 무던함과 매사 긍정적인 마인드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동안 내 주위에는 우리 이모님같은 성격이 없었다. 모두들 어느정도의 제 잘난 맛에 살았고, 누구나 다소의 예민함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 이모님이 잘난 게 없는 분도 아니셨다. 아니 특정 분야에서 보통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특히 우리 이모님은 요리 실력이 매우 대단하시, 집안일을 해내는 능력도 나에 비해 월등하시다.


참고로 결혼 후 나의 첫 김치찌개를 맛본 남편은 "그래도 색다르게 맛있다"고 칭찬해주었는데, 기뻤던 나는  "내일 또 해줄게" 했더니, 남편이 "이건 한 80살쯤 돼서, 그때도 살아있다면 다시 한번 맛보고싶다"고 대답할만큼.. 나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다.


그런데 이모님은 그냥 잠시 싱크대앞에 서계시면 훌륭한 요리뚝딱 다. 그뿐 아니라 재봉실력도 상당하시어 우리 아이들 바지가 크면 줄여주시고, 바느질도 뚝딱, 청소는 어찌 그리 금방 깔끔하게 하시는지.. 나는 그런 이모님을 보며, 점점 존경을 넘어 열등감까지 느꼈다. 


매우 지적이셨고 이른 나이에 교수까지 되신 우리 교수님은 멋지기는 했지만 꼭 그렇게 되고싶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 이모님의 그 둥글둥글한 성격과 다재다능함은, 내가 갖기 힘들어보였지만 그래도 엄마가 된 이상 꼭 갖고싶은 능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따라해본들 수박겉핥기로, 나의 본성이 바뀌지도, 내 손이 재바르지도 않으니, 점차 좌절감이 느껴지고 그것이 열등감 되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쓸데없이 예민하고 완벽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은 전혀 갖추지 못해놓고, 무엇을 가지고 그리 자신감을 있게 살았나, 나 스스로도 어이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육아에서 나의 완벽주의와 예민함은 전혀 쓸모없는, 아니 매우 치명적으로 나쁜 것만 같았다. 나같은 엄마 밑에서 자라나는 내 아이들이 불쌍하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육아에서  많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자존감은 점점 하락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를 있는 그대로 좀 사랑하려고 마음 먹고 다시 나를 들여다봤다.

그래 나는 쓸데없이 예민하고 완벽주의자인 건 여전히 맞다.

하지만 그래서 그동안 나는 시험이란 것에 한번도 안 떨어졌다. 대학, 임용시험, 파견근무를 위한 대학원, 박사과정 대학원 모두 한번에 합격했고 석사논문도 꽤 쉽게 패스했다.

지금 내가 하는 육아와 좀 맞진 않지만, 그래도 다 나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지도교수님이 떠올랐다. 연배가 비슷하신 지도교수님과 이님은 모든 부분에서 천지차이다.

잘 하는 분야도, 외모도, 성격도 정말 천지차이다. 그 두 분을 두고 누가 더 낫냐를 판단할 수 없다.


우리 지도교수님은 일주일에 한번도 가스렌지를 켜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 분께 매일 요리를 뚝딱해내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 이모님께 논문을 써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 사람은 잘 하는 분야가 다 다른데, 한 분야를 잘 못한다고 그 사람 자체를 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김태희에게 왜 이효리처럼 섹시하지 못하냐고

이효리에게 왜 김태희처럼 지적이지 못냐고

그런 비교가 소용없듯

나도 나만의 특색이 있을 뿐 그것이 온전히 단점이 되지않을 것이다.




육아를 하면서 나 스스로 나를 참 많이 미워했다.

도저히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많이도 어려워했고 두려워했다.

아직도 여전히 그렇지만, 먼저 나를 긍정하는 것이 내 육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나를 긍정해본다.


물론 내가 교수로 살 게 아니라 엄마가 되었기에, 엄마가 된 이상은 가사일과 요리를 못하는 게 자랑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의 역할을 그것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칭찬을 잘해주고, 책도 재밌게 읽어준다. 아이가 커갈수록 지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예민한 게 100프로 다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불안하고 두렵다. 하지만 다시 나를 토닥해본다


"됐어, 잘하고 있어. 그정도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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