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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Aug 25. 2020

남편에게 사약을 받은 왕비

폐비 윤씨와 희빈 장씨

조선 왕조에서 왕인 남편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왕비가 두 명 있다. 바로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와 숙종의 왕비였던 희빈 장씨이다.


폐비 윤씨와 희빈 장씨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두 여인 모두 후궁 출신으로, 한때는 남편에게 지나칠 정도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하여 후궁에서 왕비가 된 케이스이다. 하지만 두 남자 모두 변심했고, 결국 한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자신의 여자를 죽였다. 이를 보면 왕인 남자의 사랑이란 정열적이지만, 쉽게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두 여인 모두 보통의 왕비집안보다 한미한 가문 출신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왕비로서의 소양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다.  

왕비라는 정치적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두 사람 모두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의인왕후 박씨나 정성왕후 서씨의 경우 남편의 사랑도, 자식도 없었지만, 그저 왕비로서는 처신을 잘했다. 절대 투기하지 않고 숨죽여지냄으로써 왕비 자리를 끝까지 보전할 수 있었던 것과 반대로, 두 사람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요구했던 왕비의 이라는 것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일은 쉬웠어도 왕비로서 참는 일은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물론 그녀들이 폐비된 데에는 그 소양보다 뒷받침 해줄 친정집안이 한미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이기는 하다.  


세번째, 두 여인 모두 아들을 낳았기에 후궁에서 왕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음으로써 그 아들들의 입지가 약해졌음은 당연하다. 만약 그 아들들이 성공적인 왕이 되었더라면 그녀들에 대한 처우도 달라졌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그녀들과 비교해 숙빈 최씨의 경우, 숙빈도 숙종에게 버림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숙빈의 아들 영조가 훌륭한 왕이 되면서 숙빈은 많은 부분 미화될 수 있었다.


네번째, 두 여인 모두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특히 폐비 윤씨는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폐비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결혼하면 효자가 된다는 말처럼, 남자들은 결혼하고 어머니가 싫어하는 여자에게 마음이 멀어지는 것 같다. 그 당시는 더욱이 효가 중시되던 시대였기에 어머니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이제 두 사람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첫째, 두 여인 모두 왕비가 되기 위해 애썼겠지만, 폐비 윤씨보다는 희빈 장씨가 좀더 불리한 상황이었다. 폐비 윤씨는 간택 후궁으로 정식 절차를 통해 들어온 후궁이었고, 희빈 장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입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폐비 윤씨는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병으로 죽게 되어 자연히 기회가 온 것이고,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 민씨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더 적극적인 공세로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폐비 윤씨에 비해 희빈 장씨가 더 힘들게, 적극적으로 왕비 자리를 얻어낸 것이다.


둘째, 사약을 내린 후 남편의 태도이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끝까지 냉정했다. 왕비에서 폐서인 시켜 내쫓은 후 한번도 다시 찾지 않았고,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은 뒤에도 끝까지 냉정했다. 이에 비해 숙종은 폐비를 시켰지만 후궁으로 남겨두었고, 사약을 내린 뒤에도 그녀의 장례를 최고의 예우로 치뤄주었다.

물론 성종은 당시 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를 봤어야 했다. 어머니가 싫어해서 내쫓은 전부인의 장례를 후하게 치뤄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숙종은 눈치 볼 사람이 없었고, 세자의 훗날을 생각해서 희빈의 장례를 후하게 치뤄주었을 수도 있다. 속사정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사약을 내린 의 태도가 다르긴 했다.


셋째, 그처럼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대우가 달랐기에, 그들 사후의 아들들의 모습 또한 다르다. 연산군은 쉽게 말해 애정결핍증이 있었던 것 같다. 한참 연상 장녹수에게 집착한 것이나, 국정을 농단한 것에서도 성격상 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비해 경종은 끝까지 신사답게 행동했다. 사실 경종은 꽤 훌륭한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병약해서 일찍 죽어 그 업적을 남길 시간이 부족했고 후사를 보지 못해 남동생에게 왕권을 넘겨줌으로써 반대파에게 정권이 이양되며 그는 폄하된 것이다.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냉정했고, 아마 그 아들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기에 연산군은 성격 상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숙종은 희빈 장씨의 장례를 후하게 치뤄준 것처럼, 경종도 끝까지 지켜주었다. 숙종이 몸이 약해져 정사를 돌보지 못할 상황에 이르자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며, 끝까지 그 아들의 왕권을 지켜준 것이다. 경종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지만, 아버지의 사랑만은 제대로 받았기에 나쁜 왕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차이점은 사후 그녀들의 이미지이다. 폐비 윤씨는 냉혹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마마보이 남편 성종에게 죄없이 버림받은 불쌍한 여인으로 기억되는 반면, 희빈 장씨는 그녀가 악독하고 요부여서 당연한 결과로, 즉 사필귀정의 결과로, 잘 버림받은 나쁜 여인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폐비 윤씨는 왕비 자리를 얻기 위해 희빈처럼 노력하지 않았다. 정식 간택을 받은 왕비들에 비해서는 어렵게 얻은 왕비 자리이지만, 희빈에 비해서는 거저 얻은 자리였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 파악이 부족했다.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파악없이, 그저 하고싶은대로 행동한 면이 있다. 그에 비해 희빈은 많은 애를 썼다. 왕비가 되기 위해, 왕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성종과 비교해서 숙종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고 강하고 나쁜 남자였다. 희빈이 당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희빈 쪽에 더 동정하는 마음이 간다.


또한 희빈에게 요부, 악녀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것은 그녀의 적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 대해서는 동정을 보내지만, 모든 면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던 희빈에 대해서는 악녀로 기억한다.

야사에서는 희빈이 사약을 받아 죽을 때까지도 적극적으로 대항한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아 죽을 때 아들 경종의 사타구니를 당겨서 조선의 씨를 말리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어쨌든 대 여성들과 비교해 심한 적극성을 가졌던 희빈에 대해, 죽는 모습도 그렇게 묘사하며 끝내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묘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남편이 죽으라는데 조용히 죽는 건 잘하는 일이고, 끝까지 악구니를 쓰는 것은 나쁜가. 억울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이지만, 폐비 윤씨에게 동정론이 우세한 반면 희빈 장씨에게는 요부, 악녀라는 프레임까지 덧씌워지게 된 이유가 폐비 윤씨보다 희빈 장씨가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남성중심의 시대에서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한 것에 대해서까지 비난받게 된 희빈에 대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

물론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서 폐비 윤씨나 희빈 장씨나 다른 모든 왕비들도 모두 피해자일 수밖에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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