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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23. 2020

가정은 엄마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걸까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시고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내셨으며, 대구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참고 희생해야 가정이 잘 돌아간다."

"원래 엄마는 참는 거다. 아이가 어린데 나가 어디있노 엄마는 원래 그런거다. "


엄마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해도, 내 몸에서 분리되어 나와,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누워서 우는 것과 배설물을 내보는 것뿐인 작은 아이에게는, 놀라울정도로 큰 모성애가 발휘되었다.

그래서 나는 첫아이가 태어나고 둘째아이를 임신하기 전까지는, 자발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120프로 넘게 내어주며 아기를 키웠다.


아기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다. 절대 바닥에서는 잠을 자지 않아 낮잠을 재울때면 자는 내도록 안아야해도, 모유를 먹겠다고 밤에 수번을 깨서 울어도, 화장실을 제때 못가고 식사를 제때 못해도, 아이가 100일이 될때까진 예방접종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못했어도, 모유수유를 해야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 거의 미역국 위주로 먹어야해도, 이는 곧 마늘을 먹으며 동굴 속에서만 살고 있는 곰같아도( 곰은 잠은 제대로 잤을거고 화장실은 제때 갔을 거다), 아이에겐 화가 나긴커녕,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엄마가 되어줄수 있을까 궁리에 또 궁리를 할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달랐다. 앉아서 반찬과 함께 밥을 먹는 것도, 가고싶을 때 화장실에 가는 것도,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는 것도 다 미웠다. 내가 나의 하던 일을 다 까먹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를 때에, 남편은 학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고 새로운 세상 소식을 당연히 내가 알 듯 이야기했다.


첫아기가 너무 예쁜 나머지 산후조리라는 말을 새까맣게 잊고, 그저 아이가 원하는대로 안아주었더니, 손목 관절이 정말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손목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우는 밤이 계속되었고, 이 산후통이 평생 가는 걸까봐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출산하고 첫 명절이었다. 시부모님의 배려로 명절 전 전을 굽는 날에는 오지 말라고 하셨고 명절날 제사를 모시러 갔다. 제사를 모신 후의 설거지 거리많았고, 당연히 다 내몫이었다.

그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친정으로 가는 길, 성치 않 손목이 더 너덜해 기분이었고, 내 정신은 더더욱 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중, 여고를 나왔고, 남학우보다 여학우가 월등히 많았던 대학을 졸업했고, 역시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많은 직장생활을 한 덕에 나는 그동안 남녀 동등하지 않은 세상은 과거일 뿐, 현재는 남녀평등이 꽤 실현되었다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자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부터 남녀의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상견례 때 우리 부모님은 갑자기 딸 가진 죄인이 되셨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나의 엄마는 이제 여자가 집안일만 하는 시대는 끝났으니 뭐라도 배우고 도전하며 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내게 집안일 가르치지 않으셨다. 우리 시대 딸들은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비시부모님께 집안일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죄송하다. 앞으로 열심히 가르칠테니까 부족해도 예쁘게 봐달라.. 뭘 그리 이쁘게 봐달라고 부탁하는지, 그동안 일부러 안 가르쳐놓고 이제와서 뭘 가르친다는 건지..


결혼 후 첫 명절,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거실에 둔 채 나만 주방으로 부르시는 시어머니는,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로 나에게 “앞치마 두 개 중 뭘 할래?”하셨다. 친정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늘 거실에서 상을 받고만 있었다.

그렇게 결혼 후 양가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남녀가 전혀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 후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페미니스트의 뜻도 잘 모르지만, 왠지 나라도 한 명 더 페미니스트가 되어 이 세상이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는 가슴이 터질 듯 남편에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자식에게 부모는 동등한 역할이 부여되지 않았다. 거의 전적으로 엄마의 역할만이 존재했다. 시험관으로 임신을 한 나의 경우는 임신을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그랬다. 내 배에 스스로 주사를 찔러넣었고, 누군가는 까물어칠만큼 아팠다는 채취그랬고, 이식 후 몸을 보전해야 하는 것도 다 의 몫이었다. 힘들게 임신 후 난소꼬임을 겪느라 응급실을 두 번 실려갔고, 심한 입덧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구나 라는 혹독한 경험도, 내 몸을 나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게 되는 임신 기간도, 출산도 나의 몫, 모유수유도 나의 몫,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고 손톱을 깎이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는 그 모든 게 거의 다 엄마의 일이었지, 아빠가 하는 일은 돈 버는 일 외에 아이와 관련해서는 극히 적었다.

남편에게 힘듦을, 억울함을 하소연할 때마다 남편은 내게 페미니스트였냐고, 자신은 남녀 편가르기나 하는 폐미니즘을 경멸한다고 말했다.


"여자들은 엄마가 되면 참아야한다. 엄마가 참아야 가정이 잘 돌아간다. 엄마가 참지 않으면 가정이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 내가 유능한 사회인이 되길 바랬던 나의 어머니는 온데간데 없고, 이제 나에게 엄마라는 역할만을 부여하며, 내가 더 참고 살길 바라신다.

엄마가 그렇게 희생하며 살아왔기에, 엄마에겐 그것이 삶의 진리일 것이다.


사촌언니는 어느 명절을 쇠고 돌아와, "원래도 우리 시댁은 명절에 일 많이 시켰는데, 이번 명절에는 정말 몸이 재가 되도록 일한 기분이야. 진짜 왜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면서도 참고 살아가고 있고,

알고 지내는, 마흔이 다 되어 결혼한 언니는 "나는 결혼하고 육아를 하는 게 이런 건지 몰랐다. 니 내 성격알잖아. 틀린 건 못 참는 거."라고 말하며 이혼을 했다.


여자가 참고 살면 그럭저럭 가정이 유지되고, 이러한 모순을 참지 못하면 가정이 깨지는 것인가

우리 가정이 유지되려면 엄마가 참고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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