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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02. 2020

코코 샤넬(1883~1871)

좋아하는 일에 철학 담기

향수 <넘버5>, 퀄팅백 2.55, 트위드 재킷, 미니블랙드레스, 모조 진주목걸이, 낮은 굽의 투톤 펌프스. 이는 전 세계 여성들이 열광하는 샤넬의 걸작들이다. 마릴린 먼로는 “잘 때 어떤 잠옷을 입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오직 샤넬 <넘버5>”라고 대답했고, 미국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는 댈러스에서 남편 케네디가 암살당하던 날 샤넬 디자인의 핑크색 슈트를 입었다. 오드리 헵번이 입어 더욱 멋졌던 그 블랙 드레스 역시 샤넬이 처음 시도했던 블랙 드레스가 발전한 것이다. 이런 자세한 내용은 모르더라도 “샤넬”이라는 브랜드 이름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터이고, 진짜 샤넬 옷이나 가방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유행시킨 디자인에 영향을 받지 않은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가를 막론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되는 유명한 명품, 그 샤넬을 만들어 내며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그녀의 유명한 말처럼,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가 남긴 스타일은 여전히 전 세계 여성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세기의 명품을 만들어낸 그녀의 인생도 그녀의 작품들처럼 과연 명품이었을까?    


 

열등감이 기회가 되어    


코코 샤넬하면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20세기 초 패션계를 주름잡으며, 손대는 디자인마다 성공시킨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여자가 그녀였다. 여자가 직업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 그녀의 사업체에서 일한 사람은 3,500명에 달했으며, 의상점, 직물회사, 향수연구소, 모조 보석 제작소에 이르기까지 사업 분야도 다양했다. 그렇게 그녀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신분으로 자신의 신분을 결정짓던 시대, 코코는 많은 남성들과의 염문 속에서도 결코 결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당당한 여자였고, 오히려 애인의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멋진 여자였다. 사진 속 꼿꼿하고 위엄 있는 표정뿐 아니라, 그녀는 평소에도 늘 당당하고, 누구보다 고집 센 여자였다.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교계는 물론 자신의 VIP 고객에게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부잣집 마나님들에게 엄청난 돈을 요구하며 자신의 디자인을 팔기로 유명했다. 월급을 올려달라는 직원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아예 가게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무시할 정도로 고집도 센 여자였다. 그렇게 당당함을 넘어 외수의 뉘향스를 풍기는 샤넬도 한때는 자신만의 열등감 때문에 몸을 숨겨버릴 정도로 나약한 여자이기도 했다.     



<숨기고 싶은 어린 시절>

코코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 그녀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소뮈르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도시를 돌며 포도주를 파는 가난한 행상이었고 어머니 역시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샤넬의 부모는 서로 사랑했지만 가난 때문인지 정식 결혼은 올리지 않았고, 동거하던 중에 가브리엘 샤넬을 낳았다. 훗날 그녀가 그렇게 감추고 싶어 했던 사실, 부부가 정식 결혼 전에 낳은 아이였으므로 그녀는 사생아였다. 가브리엘 뒤로 두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지만 그들의 가난은 여전했다. 결국 그녀의 어머니는 돈이 있었더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던 병으로 서른두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내 없이 남은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처가에 버려둔 채 도망간다. 하지만 가난했던 외가에서도 그 아이들을 모두 키울 수는 없었다. 가브리엘은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다. 아버지로부터 버려진 가브리엘은 고아원에서도 최하층의 신분에 속했다. 당시 고아원에 버려지더라도 집에서 일부의 돈을 보내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브리엘과 그의 언니에게는 조금의 돈을 보내주는 사람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고아원의 찬 바닥에서 묽은 미음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곳에서 가브리엘은 바느질을 배우지만 그것은 그녀의 취미에 맞지 않을 뿐더러 재능도 없었다. 그녀는 바느질보다는 춤과 노래를 더 좋아했다. 스무 살이 된 그녀는 싸구려 바에 취직하여 춤과 노래를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군인들을 상대로 노래를 하며 웃음을 파는 직업을 가진 것이다. 이때 그녀는 군인들로부터 코코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그녀는 아예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 비참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새롭게 태어났다.


훗날 샤넬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행복하고 부유한 어린 시절을 가진 여인들로 가득했던 사교계에서 그녀의 고아원 시절은 충분히 창피할만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그리도 당당한 샤넬의 이면에는 이처럼 어린 시절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했다.  



<그 어린 시절도 좋은 경험으로 만들다>

하지만 샤넬의 어린 시절의 숨기고 싶고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은 훗날의 그녀를 만들어준 토대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버려진 경험은 그녀의 평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남자를 잘 믿지 못해서였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경험에서 남자들의 책임감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샤넬 개인적인 삶으로 본다면 그 버려진 경험은 아픈 상처였겠지만, 대중적인 결과로 본다면 그것은 잘된 일이다. 만약 샤넬이 결혼하여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았더라면 지금의 “샤넬”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샤넬 시대의 여성들 대부분은 결혼 또는 부자인 남자의 정부로써 남자들에게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 시대에 남자들의 책임감을 믿지 못했던 샤넬은 한 남자의 정부로 사는 대신 스스로 일을 가지며 사는 삶을 택했다. 만약 샤넬이 한 남자의 아내나 정부로 살았더라면, 그녀의 많은 걸작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아원도 그녀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샤넬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아원인 수녀원은 매우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샤넬은 그런 분위기를 매우 답답하게 여겼지만, 성스러운 성당과 단색의 정갈한 복장, 이 모든 것들의 느낌은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된 샤넬의 작품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샤넬의 어머니는 돈만 있었더라면 고칠 수 있었던 사소한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가난이 주는 뼈아픈 고통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평생 돈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는 절대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돈 많은 여자들이 했던 것처럼 쓸데없이 집을 여러 채 사거나 요트를 사거나 하는 데에 돈을 쓰지 않았다. 샤넬은 직원들의 월급을 인상하는 데에는 매우 인색했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에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데에 돈을 쓸 줄 알았다.


어린 샤넬은 결코 알 수 없었을 테고, 이십대의 샤넬 역시 어린 시절에 대한 열등감으로 힘들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고통스럽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녀의 인생에서 꼭 필요했던 경험들이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는 어린 시절의 힘겨웠던 경험마저 그녀의 성공적인 인생을 만드는 데에 활용한 것이다.  

   


<볼품없는 외모도 유행으로 만들다>

그녀에게 열등감을 안겨 준 것은 가정환경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시의 미인형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1900년대 당시 미인들은 뽀얀 얼굴에 다소 통통하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샤넬은 하얀 얼굴이나 풍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부색은 검은 편이었고, 몸은 빼빼 말랐으며, 가슴과 엉덩이는 납작했다.


그녀가 바에서 노래를 부르던 시절에 만났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종종 그녀를 파티에 데려갔다. 샤넬은 자신과는 달리 그 당시 미인들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많은 열등감을 느끼며 조용한 곳에 숨어있기도 했고, 주방에 들어가 혼자 식사를 하기도 했다.


샤넬은 당시의 미인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도 열등감이 심했다. 훗날 샤넬은 “그 여자들은 모두 형편없는 옷차림이었다. 가슴과 엉덩이는 튀어나오고 허리는 조여서 몸이 거의 둘로 나뉜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라고 그 여자들의 옷차림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 글의 말미에는 “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대단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화려했다” 라고 말한다. 샤넬은 자신의 외모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샤넬의 빼빼마른 몸매는 당시 여성들의 필수품인 코르셋이나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드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열등감에 빠져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열등감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예쁘지 않은 자신이 사교계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사교계의 주류를 이루는 여성들이 잘 하지 않았던 말을 타는 법을 배운다든지, 그 당시 여성들이 치렁치렁한 옷들을 입을 때 오히려 단순한 옷을 입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했다.


그녀의 그런 시도는 모자를 만드는 일에서 빛을 발했다. 모자는 당시 여성들의 필수품이었는데 당시의 모자는 화려한 것을 선호하여 꽃이나 보석은 물론이요 과일까지 얹은 거추장스러운 모습이었다. 사과나 포도 등을 가득 얹은 무거운 모자를 쓰기 위해서는 따로 하인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런 때에 샤넬은 검은 모자에 리본을 하나 두르는 단순한 장식의 모자를 디자인하고 쓰고 다녔다.


단순한 모자를 쓰고 말을 타는 샤넬의 모습에 사람들은 참신함을 느꼈고, 한두 명씩 그녀의 모자 스타일을 선호하게 되었다. 당시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그녀의 모자를 쓰고 나타나자, 마침내 그녀의 모자는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후 샤넬의 첫 사업이었던 모자 사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훗날 그녀가 옷 사업에서도 성공하자 많은 여성들은 샤넬처럼 조금은 검은 피부에 마른 몸매를 가지고 싶어했다. 외출할 땐 늘 파라솔을 대동하던 귀부인들이 일부러 태닝을 하기 시작했고, 마른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녀는 자신의 열등감을 오히려 참신성으로 만들고 그녀만의 매력으로 만들어 유행시킨 것이다.


명품 샤넬을 대표하는 디자인의 특성인 단순성은 샤넬 자신이 가졌던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녀가 당시의 미인형에 어울리지 않았기에 새로운 기준의 아름다움을 탄생시키려 노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단점들을 오히려 기회와 유행으로 승화시킨 여인이다.  



남자보다 일이 좋아    



<남자들의 악세사리가 되기보다 나의 삶을 살겠다>

코코 샤넬 시대의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 역시 부자 남자들의 정부로 살던 때도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남자는 코코가 싸구려 바에서 일할 때 만난 남자 에티엔 발상이다. 발상은 코코를 자신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데려갔고 그녀가 사교계에 입문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때 그녀는 어린 시절 배우지 못했던 상류층의 예절과 관습들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발상의 도움으로 처음 모자 사업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상은 코코의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았고 그녀가 자신의 정부로 조용히 살기를 바랐다. 샤넬은 다른 정부들과는 달리 그저 즐기는 삶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발상의 정부로 살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즈음 만난 남자가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이다. 그는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다. 샤넬은 훗날 자신의 유일한 사랑은 그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와는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다. 카펠은 샤넬의 예술적 감각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리하여 샤넬이 자신의 살롱을 오픈하도록 자금도 대준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의 신분을 이유로 하여 그녀와 결혼하기는 꺼렸고, 샤넬이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샤넬에게는 자신의 정부로 남아달라고 한다. 하지만 샤넬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샤넬은 카펠이 빌려준 돈을 모두 갚으며 그와 금전적 관계를 청산했다. 그 후에도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자주 함께 하곤 했다. 하지만 금전적 도움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부로서 함께 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카펠이 교통사고로 죽음으로써 그들의 사랑도 끝이 났다. 카펠의 죽음으로 샤넬은 많은 정서적 상실을 경험했고 이후의 사랑은 모두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샤넬은 당시 여자들이 부자 남자를 만나 그들에게 의존해서 살려고 노력할 때, 남자보다는 일을 선택한 여자이다. 발상은 인맥이 넓은 사람이었다. 발상 옆에서 그가 주는 돈으로 생활하며 취미로 모자를 만들 수 있을지만 그녀는 그를 떠났다. 카펠 역시 마찬가지다. 카펠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로 그에게 자금을 받으며 편안히 살롱을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카펠에게 돈을 모두 갚음으로서 그로부터의 독립을 선언다. 카펠 역시 샤넬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했으므로 그 돈을 받고 이후로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샤넬은 카펠 이후에도 수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는데, 영국의 웨스트민스트 공작과는 꽤 오래 만났고 그에게서 청혼도 받았다. 그와 결혼하면 샤넬은 공작부인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샤넬은 “공작부인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샤넬은 유일하다”고 말하며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웨스트민스트 공작과 이별할 때, 샤넬은 그가 준 수표들을 한 장도 쓰지 않은 채 돌려주었다. 유럽에서 가장 부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던 웨스트민스트 공작의 수표 몇 장 정도는 써도 됐을 법 하지만, 샤넬은 단 한 장도 쓰지 않은 채 돌려준 것이다.


샤넬이 남자와의 안정된 삶을 갈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이었다. 그녀는 남자 때문에 일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일과 함께 스스로 삶을 개척한 것이다.


이후 많은 돈을 번 샤넬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들을 위해 돈을 썼다. 그녀는 예술을 사랑한 여인으로서 당시 불우한 예술가이자 남자친구인 그들을 후원하는 데에 많은 돈을 썼다. 샤넬이 후원한 예술가들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스트라빈스키, 장 콕토우, 디아길레프 등이 있다.  


훗날 샤넬은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재정적 안정과 명망을 위해 결혼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두에 관심이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그녀>

샤넬은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나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일은 언제나 내게 일종의 약이었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일을 함으로써 진정 살아있을 느꼈고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일에 온 열정을 다했다. 그녀는 일요일을 가장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재봉사들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다.


그녀는 늘 디자인을 생각했고, 현실의 모든 것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다. 벨트 달린 가디건의 탄생은 남자친구의 풀오버를 빌려 입을 때였다. 추위에 카펠의 풀오버를 빌려 입는데, 그 옷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자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가위로 풀오버의 가운데를 자른 뒤 벨트로 묶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수녀원에서의 수녀들의 제복에서, 유람선의 선원들이 입는 스트라이프 무늬에서, 그리고 운전기사의 주머니가 큰 외투에서 샤넬 스타일은 탄생했다. 그녀는 일상의 매순간 디자인의 영감을 얻은 것이다.


샤넬은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똑똑한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을 못 따라가고,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못 따라간다는 말처럼, 그녀가 그 일을 즐기고 열심히 했기에 현재까지도 전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샤넬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일에 자신만의 철학담기>    

샤넬의 작품들이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게 된 것은 그녀의 작품들에 그녀만의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샤넬이 활동하던 19세기 말에는 옷에서 코르셋이 빠질 수 없었다. 코르셋을 이용하여 여성의 몸을 풍만하게 만들고, 그에 맞게 화려하고 풍성한 드레스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의 몸이 코르셋에 의해 혹사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옷에서 과감히 코르셋을 제거하고 여성의 몸의 자연스러운 굴곡을 살렸다. 그녀는 옷은 편안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당시의 유행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당시 코르셋에 혹사당하던 여인들은 처음에는 샤넬의 옷이 어색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편안한 옷들에 만족하게 되었고, 편안했기에 자꾸 찾을 수밖에 없었다. 샤넬의 성공신화는 그녀의 이러한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옷은 편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은 다른 디자인에서도 이어진다. 당시 여성들의 치마는 거리를 쓸고 다닐 정도로 치렁처렁했다. 샤넬은 너무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싹둑 잘랐다. 무릎에서 5~10센티정도 되는 길이의 치마가 샤넬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성의 다리가 노출되었는데, 이것은 무척이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여성들에게 매우 편안한 것이였고, 곧 여성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샤넬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바지를 여성의 옷차림에 등장시켰고, 남성들의 재킷에 착안하여 여성들의 재킷도 만들어냈다. 또한 그녀는 스웨터가 입고 벗기에 불편하다고 해서 벨트 달린 가디건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유명한 샤넬백 2.55역시 여성들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다. 당시 가방은 클러치나 토드백 형식으로, 여성들은 모두 손에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마치 중국의 전족이 여성들의 발을 묶었듯, 가방은 여성의 손을 묶은 것이다. 샤넬은 가방에 끈을 달아 숄더백을 만듦으로써 여성들의 손을 가방에서 해방시켰다.  


그녀는 단순함을 중시하여 다른 무늬 없이 블랙만을 사용하여 미니 드레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의 블랙 색상은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만 사용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디자인을 비판했다. 하지만 곧 그 클래식한 매력의 블랙 드레스는 훗날 파리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심지어 파리의 유니폼이라 불릴 정도가 되었다.


샤넬은 옷감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시도를 했는데, 그녀는 당시 옷감으로는 활용될 수도 없었던 저지 소재를 이용했다. 저지 소재 역시 보이기로는 그리 예뻐보이지 않는 소재이지만, 입기에는 굉장히 편했다. 편안한 소재의 장점을 중시한 샤넬은 당시 아무도 쓰지 않던 저지 소재를 사용했고, 그것은 여성의 몸을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으므로, 역시 대성공했다.


그녀의 모자에서부터 출발하여 퀼팅백 2.55에 이르기까지 샤넬의 디자인은 당시의 관습에 대해 정면도전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정면도전은 젊은 피가 부리는 도전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을 좀 더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디자인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다"라는 그녀만의 철학을 끊임없이 실현해나간 것들이다.


그녀는 기존의 가치나 유행에 편승하는 대신,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옷에 담음으로써 새로운 유행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옷은 편안해야 하고 자신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스스로 어떻게 느끼느냐를 중시한 그녀는, 우선 입었을 때 스스로 만족스러워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출발은 편안함이었다. 옷에 대한 그녀의 그런 철학이 여성들에게 환영 받았고, 그녀의 옷은 불티나게 팔렸다.     


샤넬은 디자이너에게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는 데생실력이나 바느질 실력은 평균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옷에 담은 그 철학 때문이 아니었을까?


샤넬이 옷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부티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샤넬의 부티크는 더욱 인기가 솟았다. 그 이유가 샤넬이 편안한 옷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전쟁 통에 치렁치렁한 치마들이 어울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선호하는 그녀의 옷에 대한 철학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운명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을까?


같은 시기를 살았던 영국의 에멀린 굴덴 팽크허스트(1858~1928)가 여성들의 참정권을 위한 운동을 펼쳐 영국 여성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주었다면, 샤넬은 여성들을 가혹한 코르셋에서 해방시키며 신체적으로 당시 여성들에게 자유를 준 여성이다.     



<인생에서 늦은 순간은 없다>   

샤넬은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샤넬은 자신의 나이도 공공연히 거짓말을 해서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샤넬은 모든 여성이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있어야 하는 서른한 살에 옷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여성들은 남자와 결혼하여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그녀에게도 그럴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볼일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또는 부자인 남자의 정부로 사는 것보다 자신의 일을 하며 사는 삶을 선택했다.

 

모자 사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는 바느질 실력도 데생 실력도 한참 모자랐다. 디자이너로서 성공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당시로서는 아주 노처녀였던 서른한 살이었다. 그런 때에 그녀는 한 남자의 정부로 사는 삶 대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도전을 한다. 당시의 서른한 살은 지금의 서른한 살과는 또 다른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를 핑계 삼지 않았다. 그 도전은 지금 우리가 아는 대로 대성공이다.     


뿐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샤넬은 나치에 협조한 전력으로 디자인계에서는 물론 파리에서도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녀는 스위스로 망명하여 숨죽이며 살았다. 그녀를 대신하여 패션계에서는 크리스찬 디올이라는 거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넬이 경멸했던 화려한 디자인이 다시 패션계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디자인보다 단순하고 편안한 디자인이 더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패션계가 후퇴한다고 생각했고 다시 도전을 결심한다.


하루아침에도 유행이 바뀐다는 패션계에 샤넬은 71세의 나이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실패한다면 오히려 이제까지의 명성에 해만 끼치고 이제까지 그녀가 성공시켰던 샤넬 라인들마저 인기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당시 그녀는 샤넬 넘버5 향수에서 벌어들이는 돈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71세의 나이로 패션계에 다시 들어섰다. 파리의 부티크에서 그녀의 패션쇼가 열렸다. 하지만 패션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의 옷이 이제 한물갔다는 혹평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기다렸다. 자신의 작품을 믿고 기다린 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패션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던 미국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의 재기는 대성공이었다. 그때 그녀는 샤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트위드 투피스와 퀼팅백 2.55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무언가에 도전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샤넬이 그때 71세의 나이를 핑계 삼아 도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녀의 트위드 투피스와 퀼팅백 2.55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8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는 패션계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평생을 일하는 데에 집중한 그녀는, 그래서 재봉사들이 쉬어 일하기 힘들다며 싫어했다는 그 일요일에, 죽기전까지도 새로운 컬렉션을 준비하며 일했던, 그 열정적인 89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삶에서 배울 것    

고아원 출신의 빼빼마른 소녀 코코 샤넬, 그녀는 가정환경도 외모도 어느 하나 남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랬기에 실제로 그녀는 많은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 내에서 이루어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괴로워해봤자 어쩔 도리가 없는 것으로 끙끙대는 대신, 그녀는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당대의 가치관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철학을 담은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던 때에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2020년은 여성들도 누구나 자기 몫의 삶을 충분히 개척할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남자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걸 샤넬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또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믿었다. 그리고 그 철학을 실현해내는 데에 온 열정을 다 받쳤다. 그녀는 자신의 모자란 바느질 실력을 탓하는 대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디자인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늘 디자인을 생각했고 현실의 모든 것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다.     


코코 샤넬은 여성들이 열광하는 많은 명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명품은 옷이나 가방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에 철학을 담으며 열정적으로 살아간 그녀의 삶의 정신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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