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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14. 2020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정말 중요한 것을 챙기기

러시아의 수많은 왕들 중 대제라는 칭호가 붙는 왕은 단 두 명이다. 표트르 대제가 그 한 명이고 나머지 한 명이 예카테리나 대제이다. 수많은 왕들 중  이 두 명만이 대제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을까?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다. 그는 3천 개에 이르는 법령을 선포하며 개혁을 이끌었고, 각 행정 기관과 군대를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서방의 유명인들을 초청하여 그들로부터 우수한 기술과 예술들을 전수받았고, 러시아의 우수한 인재들을 해외로 파견하여 외국의 선진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표트르는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개혁을 이끌어낸 러시아 근대화의 선구자였다.


이런 표트르 대제에 비견되는 예카테리나 2세 역시 걸출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녀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가 그토록 꿈꾸었지만 결국 손에 넣지 못했던 크림반도를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러시아도 얼지 않는 항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문화 예술을 사랑하여 많은 예술품을 사들이고, 여러 문화예술인들을 러시아로 끌어들였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문화 모지로 불렸던 러시아가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꽃필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 이전의 러시아가 유럽 변방의 한 나라에 불과했다면 그녀 이후의 러시아는 유럽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다른 황제들이 등극하자 러시아는 계속된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결국 다시는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의 강력한 러시아는 러시아인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 대제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당대 러시아인들로부터 대제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엄청난 업적을 남긴 그녀가 비난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프로이센 출신으로 러시아 황태자비가 되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황제였지만, 러시아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현재의 독일당시의 프로이센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소피아였다. 프로이센 작은 공국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에 의해 러시아의 황태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가 러시아 황태자와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 집안이 한미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엘리자베타 여황은 조카였던 훗날의 표트르 3세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아내 역시 조용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리하여 한미한 가문 출신의 예카테리나를 황태자비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훗날을 보면 엘리자베타 여황의 이런 계산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프로이센의 왕족도 아니었던 한미한 가문 출신의 어린 소피아는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되어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로 오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식의 이름인 예카테리나로 개명하였다.     


엘리자베타 여황과 프리드리히 왕에 의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 부부는 안타깝게도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표트르 3세는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고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겐 더욱 관심이 없었다. 항간에서는 표트르가 성불구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것이 사실인지 예카테리나는 결혼한 지 8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임신하지 못했다. 남편만 믿고 먼 이국땅으로 온 예카테리나에게 남편은 전혀 의지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런 예카테리나를 더욱 힘들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엘리자베타 여황이었다. 엘리자베타 여황은 변덕과 히스테리가 심했는데, 예카테리나는 늘 그녀의 눈치를 잘 살펴야 했고, 그녀의 어떤 요구에 대해서도 순종해야 했다.


젊은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변덕이 심한 엘리자베타 여황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살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시간을 그냥 낭비만 하면서 보낸 것은 아니다. 그녀는 프로이센 출신으로서 부족했던 러시아에 대한 각종 지식들을 학습하는 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러시아어에서부터 러시아 황실과 역사, 문화에 관한 지식을 광범위하게 학습하였고, 그리스정교 의식 및 군왕의 자질과 의무 등에 대해서도 공부하였다. 훗날 그녀가 그리스정교의 선언문을 러시아어로 낭독할 때 많은 이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녀는 러시아 문화에 정통해가고 있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예카테리나는 타 국가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며 훗날 황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들과 힘을 비축하면서 그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을 대신하여 황제에 즉위하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로 시집온 지 16년이 지난 1761년,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혀 오던 엘리자베타 여황이 죽게 된다. 그리하여 예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 3세가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훌륭한 황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황제의 자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그는 러시아가 아닌 프로이센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을 보낸 프로이센을 러시아보다 더 사랑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당시 막강한 힘을 가진 러시아의 귀족들을 구슬리는 재능도 전혀 없었다. 그는 러시아가 아닌 프로이센에 유리한 협정을 체결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황후였고 귀족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다.

 

엘리자베타 여황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 표트르 3세는 이모가 되는 엘리자베타 여황의 죽음에 무관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자신을 괴롭히던 여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친어머니가 죽은 듯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카테리나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본 러시아 백성들은 프로이센 출신의 이 젊은 황후에게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백성들은 황제인 표트르 3세보다 황후 예카테리나에게 더 많은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훗날에도 더 많은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러던 중 표트르 3세는 하층민을 위한 생활 개선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는 많은 귀족과 대지주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한 정책이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의 마음은 표트르 3세에게서 점차 멀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예카테리나는 이름뿐인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예카테리나가 정변을 일으켰을 때, 방어 태세조차 갖추지 못했던 표트르 3세는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아야했다. 정변 당시 어느 누구도 그녀의 군대를 막지 않았고, 많은 왕실 사람들과 귀족들 역시 황위찬탈과정을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남편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표트르 3세는 겨우 180일을 황제로 군림하고 아내에게 황위를 빼앗겼다. 그는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 옛정을 생각해 목숨만을 살려줄 것을 구걸했다. 하지만 잔혹한 여인이었던 예카테리나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남편 표트르 3세 먼 곳에 유배 보내고 즉시 죽여 버렸다.


예카테리나의 황제 등극은 그야말로 무혈입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순조로웠다고 해서 결코 쉬운 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먼저 당시 애인이었던 오를로프를 이용하여 군대를 장악하였다. 근위군의 충성을 맹세 받은 그녀는 다음으로 이웃 강대국들의 지지를 약속 받았다. 그녀는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과 미리 접촉하여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도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하였다.


예카테리나는 미리 군사권을 장악했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두었으며, 이웃나라들의 지지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이런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그녀는 순조롭게 황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제로 불리기까지   

  

광활한 영토 정복

 

앞서도 말했듯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와 함께 대제로 불리는 유일한 황제이다. 그녀의 복잡한 사생활과 지나친 잔혹함을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로 불릴 만큼 그녀가 러시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음 부인할 수는 없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가 그토록 꿈꾸었지만 얻지 못했던, 얼지 않는 항구를 얻은 황제였다. 러시아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좋은 항구는 갖지 못했다. 러시아 황제들은 그 부동항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꿈 중 하나였는데, 표트르 대제도 그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만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꿈을 실현시키게 된다. 그녀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폴란드, 얼지 않은 항구가 있는 크림반도의 터키와의 오랜 전쟁을 꿋꿋이 견뎌내었고, 결국 그 전쟁들을 승리로 이끌며 부동항을 확보하게 된다. 그녀의 말년에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북미의 알래스카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를 광활한 영토를 확보한 대제국으로 만들다. 이는 이전의 다른 황제들, 심지어 표트르 대제도 하지 못한 일이다.     


모든 일에는 운도 따라주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력 없이 일을 성사시키기 힘들다. 예카테리나 역시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녀는  돈을 투자하여 러시아 군대를 강력하게 만드는 데 힘썼고, 특히 유능한 장군들을 골라 등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이웃 열강들의 세력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갈등을 이용하여 이웃나라들이 그녀의 정복 사업을 눈감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에게는 탁월한 외교술로 이웃 국가들을 주무르는 능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카테리나는 자신만의 제복을 만들어 입고 직접 전쟁터에 나가 근위병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녀만을 위해 제작한 제복을 입고 직접 전쟁터에 나서자, 많은 군인들은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며,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가 싸웠다. 강력한 군대 양성하고 탁월한 외교술을 펼치는 노력과 더불어 그녀만의 매혹적인 카리스마까지 더해져, 러시아는 그녀 이전의 어떤 황제도 이루지 못한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문화 예술을 꽃피우며 러시아 근대화를 이끌다


예카테리나 2세의 업적은 광활한 영토 확장뿐만이 아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자유무역을 허가하고 각종 무역제한을 철폐했다. 공업의 발전을 위해 힘썼고, 그 결과 1천개가 되지 않던 수공업 공장이 그녀의 집권 이후 3천개가 넘게 되었다. 또한 철 생산량도 급증하여 1760년에 6만 톤이던 것이 1800년에는 16만 톤에 이르렀다. 예카테리나 2세 이후 러시아는 근대 공업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여황은 거액을 들여 에르미타쥬 박물관을 건립했다. 이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루브르궁,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불린다. 에르미탸쥬 박물관의 대량의 예술품들은 여황이 개인적으로 사들인 것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카테리나가 소유한 이 작품들을 통해 서유럽 회화의 발전과정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녀의 예술적 안목과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광활한 영토 확장과 더불어 눈부신 경제력의 발전, 그리고 문화 예술의 부흥 등을 통해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고,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러시아를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대제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그녀는 대제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인물일까?


당시 러시아는 귀족과 대지주의 힘이 매우 강했고, 그들의 힘은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예카테리나의 남편이었던 표트르 3세 역시 귀족들이 등을 돌리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폐위될 정도로, 귀족들의 힘은 막강했다. 현실주의자였던 예카테리나는 그런 귀족들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귀족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녀는 자신의 왕위찬탈을 지지해준 귀족들을 위해 더 많은 특권들을 보장해주었는데, 사실상 이 특권은 농민들의 피땀과 맞바꾼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카테리나가 귀족들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 줄 때 사실상 고통 받는 이들은 수많은 농민들이었다.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농민의 절반 이상을 귀족들에게 노예로 하사하였다. 노예가 되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은 빵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예카테리나는 가난한 농민들의 편에서 일하기보다 부유한 귀족들의 편에서 정책을 펼쳤다. 당시 러시아에서 귀족은 10%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체 인구의 90%가 넘는 가난한 농민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고통에 빠졌고, 10%가 되지 않는 귀족들만이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이는 표트르 1세가 농노제를 개혁하며, 대부분의 인구를 차지하던 농민들의 위한 정책에 힘썼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최하층 공민의 재산과 명예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 누구의 생명도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주조로 하는 예카테리나 교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만인의 평등을 주창한 이 예카테리나 교서의 이상은 실제의 현실에서는 전혀 실현되지 못했고, 예카테리나 시대는 이 교서의 이상과는 정반대의 현실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니, 표트르 3세를 사칭한 푸가초프는 의병을 일으켜 맹렬히 돌진해왔다. 처음에는 무시할 정도의 세력이었던 푸가초프는 점차 세력을 키워 수많은 농민들을 의병활동에 참여시켰고, 그들 세력은 이제 예카테리나에게 위협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던 예카테리나가 아니던가. 일 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끈질기게 버티어 온 그들 세력이 결국 예카테리나의 근위병에 의해 진압되었고, 푸가초프는 잡힌다. 그리고 그는 머리가 잘리고 피부가 벗겨지는 잔혹한 죽음에 처해진다.


일 년 반 동안의 푸가초프의 의병운동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의 반란은 당시 농노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고 또 그들의 불만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예카테리나는 농노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정책을 폈고, 농노들의 비참한 삶은 예카테리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 했다.


당시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의 여황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많은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농노제를 폐지했다. 농노제의 폐지로 노동생산성이 향상되었고 그에 따라 농업이 급격히 발전하였다. 농업의 발전은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으로도 이어져, 당시 오스트리아는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동시대를 살아간 여황이었는데 그 둘이 농노들에게 펼친 정책은 정반대였고, 이후 그들 나라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카테리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영광은 소수 귀족들과 대지주들에게만 돌아갔고, 전체 인구의 90%가 넘는 수많은 농노들은 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예카테리나 이전 시대보다 더욱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 예카테리나의 그 빛나는 업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수많은 백성들의 삶을 벼랑 끝에 내몰고 얻어낸 영광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정말 그녀가 “대제”로 불릴 수 있을까?     


   

그녀에게 배울 점

 

프로이센의 작은 공국의 딸로 태어나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되고, 남편을 폐위시킨 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여인. 단순히 황제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제”라는 칭호까지 얻은 여인. 예카테리나 2세가 대단한 여자임은 틀림없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 어떤 황제보다 총명했고, 매력적이었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었다. 그런 그녀에게 분명 긍정적인 면에서 배울 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황제가 되고 “대제”의 칭호를 얻기까지 그녀에게 운도 따라주었겠지만, 그녀는 어떤 일에 임하기 전 항상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황태자비 시절, 남편과 엘리자베타 여황으로부터 소외되어 외롭게 지내는 동안, 그녀는 러시아에 관한 지식들을 두루 섭렵하며 훗날 훌륭한 군주가 될 자질들을 비축해두었다. 남편을 폐위시킬 때에도 미리 군사권을 장악하고 이웃 나라들의 지지를 약속 받는 등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쳤고, 그랬기에 무혈입성이 가능했다. 러시아 황제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얼지 않는 항구를 얻어내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철저한 준비를 해두었기에 그녀는 이전의 어떤 황제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일이든 철저하게 준비하는 그녀의 준비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그녀는 강대한 러시아를 만들겠다는 목표 하에 철저한 준비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고, 결국 그녀로 인해 러시아는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 영광의 러시아는 황제와 귀족들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90%를 넘게 차지하는 농민들의 것이란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만든 그 찬란한 러시아의 영광이 허황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목표를 분명히 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은 분명 멋진 삶이다. 하지만 그 목표가 잘못 되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된다. 그녀의 러시아가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예술이 부흥한 것이 그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녀의 그 노력 또한 물거품 같은 것에 불과하다.


성공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 그녀를 타산지석 삼아, 오늘 우리가 열정을 쏟는 그 일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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