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노래는 미국의 유명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노래로, 뮤지컬 <에비타>에서 마지막에 에비타가 부른 노래이다. 마돈나가 열연했던 이 뮤지컬의 주인공 에비타가 바로 이 글에서 소개될 에바 페론(1919~1952)이다. “에비타”라는 이름은 “작은 에바”라는 뜻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국민들이 그녀를 귀엽게 부르기 위해 붙여 준 애칭이다. 실제로 그녀는 에바보다 에비타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에바 페론은 그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다. 어린 시절에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갖은 무시를 받았고, 아버지에게 완전히 버려진 후에는 혹독한 빈곤에 허덕이며 살았다. 어린 소녀는 그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의 나이로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다. 하지만 배우를 꿈꾸던 십대의 소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동안 많은 남자들의 품을 전전해야 했다. 훗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창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믿을 것은 자신의 몸 하나로,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던 에바가 스물다섯이 되는 해였다. 그녀는 전도유망한 정치인 페론을 만나면서 인생이 180도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 남편인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동시에 자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하지만 그 영광도 잠시 그녀는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서른셋, 그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최하층의 빈민이 겪어야 할 온갖 고생을 경험하였고, 동시에 젊은 영부인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화려한 삶도 누렸다. 그녀는 지옥에 머무르면서도 늘 천국을 꿈꿨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 내며 최고의 인생역전에 성공한 여인이다.
에바 페론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성녀로 불렸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창녀로 불렸다. 서른셋의 짧은 생을 살아간 그녀가 어떻게 이처럼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 더 그녀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가난과 멸시 속의 혹독했던 어린 시절
에바 페론은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의 작은 시골 마을 팜파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장의 대지주였고, 어머니는 그 농장에서 일하는 요리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식 부인이 아니었다. 1919년의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정식부인이 따로 있는 남자와 혼외로 낳은 아이는 천대받는 게 당연했다. 에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에바를 비롯하여 에바의 어머니가 낳은 모든 자식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당연히 호적에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에바는 아버지의 성 “두아르테”를 따를 수 없었고 어머니 쪽의 성을 따라 “에바 이바르구렌”으로 불렸다.
그것은 친구들의 놀림을 받기에 충분했고, 어린 에바는 심한 상처를 받았다. 훗날 영부인이 된 에바는 자신의 이름을 “에바 이바르구렌”이 아닌 “에바 두아르테”라고 확정지으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사생아라는 타이틀을 지워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에바가 사생아인 것은 분명했고, 마을 사람들은 에바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그들을 무시했다. 에바를 힘들게 한 것은 사생아라는 수치심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족을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혹독한 가난이었다. 에바의 아버지는 농장의 대지주였지만, 그는 에바의 어머니를 버렸고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에바의 어머니 도나 후아나는 다섯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은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족에게 먹을 것은 늘 모자랐고, 에바는 먹지 못해 앙상한 몸을 가져야했다. 에바의 가족들은 당장 내일의 식량이 가장 큰 걱정이었고, 그들의 가장 큰 꿈은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에바의 언니들은 자신을 가난에서 구제해줄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에바 역시 이 혹독한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줄 남자를 늘 꿈꾸었다. 하지만 에바의 꿈은 언니들의 수준과는 달랐다. 그녀는 단순히 가난에서만 벗어나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난 왕자나 대통령하고만 결혼할거야”
당시 사생아로 손가락질 받고 가난에 허덕이는 어린 소녀로서는 도저히 이루기 힘든 큰 꿈이었지만, 어린 에바는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현실은 혹독하기만 했다. 가난한 사생아에 불과한 에바는 여러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천대받았다.
당시의 혹독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배우를 꿈꾸었던 열네 살의 에바는 자주 극장 주위를 배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지주의 아들은 그녀를 어떻게 해 볼 마음에 그녀에게 접근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그녀는 발가벗겨진 채 길가에 버려졌다. 그날 실제로 아무 일도 없이 그저 발가벗겨지기만 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훗날 영부인이 된 에바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그 시절 그녀가 그토록 아무렇게나 대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에바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꿈을 이루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 팜파스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믿으며.
꿈을 위해 참고 또 참다
열여섯의 에바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팜파스에서처럼 무시당하는 현실 대신 여배우로서의 근사한 삶이 그녀를 기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열여섯의 소녀 에바에게 신데렐라의 호박마차 따위의 행운은 없었다. 실제의 현실에서는 동화와는 달리 어떤 마법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팜파스에서의 삶보다 더 혹독한 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에바는 영화배우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지 못했다. 그녀는 특별히 예쁜 얼굴이 아니었고 풍만한 몸매를 가지지도 못했으며, 말투는 하층민 특유의 억센 사투리를 가졌다. 그녀는 먹지 못해 너무 말랐고 매우 창백했다. 그런데도 발목은 굵었다. 촌스러운 말투를 가진 평범한 외모의 소녀를 영화계에게서는 주목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배역을 따낼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극단주와 하룻밤을 보내는 대가로 단역을 따내었다.
그렇게 몇 번의 단역을 따냈다고 그녀의 인생이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단역을 얻기 위해 그녀가 감수해야 했던 것에 비해 그 결과는 늘 초라했다. 그곳에는 그녀와 같은 처지의 소녀들이 넘쳐났고, 그녀는 팜파스에서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야했다. 에바는 날씬한 몸매를 위해 거의 먹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먹을 것을 살 돈이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생활도 1년, 2년이 흘러갔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줄곧 따라다녔던 혹독한 가난도, 몸을 팔며 단역을 따내야 하는 상황도 변함은 없었다. 그녀와 같은 처지의 소녀들 역시 여전히 그녀 주위에 가득했다. 그런데 그 소녀들과 그녀가 다른 점이 딱 하나있었으니, 다른 소녀들이 그 힘든 시간을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것에 비해, 에바는 그 상황을 끝까지 참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와 자든지 해고를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라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곳에 머물렀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힘든 상황은 4년이나 더 이어졌다. 십대의 에바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 속에서 꿈이라는 한 줄기 빛에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끝내는 성공하겠다는 강한 열망에 대한 보상일까? 에바에게 역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보잘 것 없는 역할이었다. 훗날에도 여배우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보면 에바는 영화배우로서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라디오에서는 달랐다. 에바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투리 섞인 말투와 합해져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라디오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고, 드디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삶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에바는 라디오에서만큼은 꽤 인지도를 가진 배우가 되었고, 그 유명세는 에바가 더 높은 삶으로 향하는 사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다
1944년 1월, 아르헨티나의 꾸요 지방에 산후안이라는 도시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1만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지진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한 공연을 마련했는데, 이때 에바는 연예인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으로 그녀를 이끌어 줄 인생일대의 중대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도유망한 정치인 후안 페론 역시 지진 피해자를 위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가하였다. 당시 40대 후반의 페론은 전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고 혼자 지내고 있었다. 새로운 여자를 찾고 있었던 그에게 젊고 매력적인 에바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에바는 최고의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눈빛이 반짝이는 여자였다. 에바는 본능적으로 후안 페론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남자임을 확신했고, 그녀의 그런 욕망은 쉽게 페론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에바는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줄 남자로 페론을 선택했고, 페론 역시 젊고 매력적이며 권력에 대한 욕망에 눈빛을 반짝였던 에바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에바는 페론의 정부가 되었다.
페론은 자신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에바가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중급여배우에 불과하며, 한때 창녀와도 같은 생활을 했던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페론을 따르는 군인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페론이 대통령이 되길 원했지만 천한 에바가 영부인이 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페론에게 그녀와 결혼하지 않을 것을 압박했다. 그렇게 에바는 영원히 페론의 정부에 머물러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에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온다.
1945년 9월, 페론 세력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을 염려하던 반페론주의에서 그를 경계하여 감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페론의 정부였던 에바는 대중을 사로잡는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하며 페론을 돕는다. 라디오 드라마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던 에바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주도하며, 정부에 페론의 석방을 요구했다. 에바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10일간의 노동자들의 대파업이 성공적으로 끝나며, 그해 10월, 페론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석방되었다. 페론을 실각시키려던 정부의 뜻과는 반대로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게 되었다.
페론은 자신의 석방을 도운 에바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녀와 절대 결혼은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그가, 석방 후 두 달 만인 1945년 12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창녀와 같은 다소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에바가 페론과 정식으로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정치가의 아내로 단숨에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광에 힘입어 유명 감독의 영화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신문사의 사장이 되기도 했다.
에바와 페론의 결혼식 두 달 후 실시된 194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에바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되었다.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던 어린 시절, 자신의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늘 왕자나 대통령하고만 결혼하겠다던 그녀의 말이 정말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연극의 단역을 따내기 위해 남자들의 품을 전전해야 했던 창녀 에바는 이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놀라운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이제는 그동안의 갖은 고생에 대한 보답마냥 그녀에게 주어진 찬란한 영광을 누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스물일곱의 퍼스트레이디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바는 먼저 숨기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없애는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이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녀는 태어난 년도까지 바꾸며 자신을 아버지의 정식 자식으로 기록했다. 또한 사생아로 손가락질 받던 팜파스에서 기억을 전부 잊고 싶었는지, 유년시절을 보냈던 팜파스를 지도에서 아예 삭제해버린다. 또한 신인 시절 이름을 알리기 위해 찍었던 누드 사진들 역시 모두 폐기처분했다.
다음 에바는 연극계에 몸담던 시절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하룻밤의 동침을 강요하던 극단주의 극단을 없애버렸고,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방송사의 프로그램도 모조리 폐지해버렸다. 그렇게 에바는 과거의 불행했던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자신에게 가혹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며 퍼스트레이드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녀는 유난히 가혹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그 가난의 고통만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이 겪은 고통을 현재에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운명처럼 가난한 민중들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후안 페론이, 창녀라고 손가락질 받던 에바와 결혼까지 한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페론은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민중들이 겪는 가난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는 군인이므로 감정표현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가난을 온몸으로 겪은 에바는 노동자들의 궁핍한 삶을 잘 이해했고, 또 그들의 비참한 삶에 깊이 공감할 줄 알았다. 에바는 노동자들의 더러운 손을 덥석 잡았고, 냄새나는 그들을 기꺼이 껴안아 주며 위로했다. 그렇게 에바는 페론이 노동자들과 가까워지는 가교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에바는 자신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처음 왔을 때, 그 작은 몸을 누일 공간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열정을 다해 갈 곳 없는 여자들을 위한 시설을 지었다. 그곳은 노숙자들이 하룻밤 머무르는 공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최고급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그곳의 각방에는 크리스탈로 장식된 샹들리제가 어둠을 밝혔고, 침대와 시트는 귀족 부인이 쓰는 것과 같았으며, 피아노와 같은 악기, 취미생활을 도울 수 있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곳에 머무르게 된 한 여자하인은 자신의 주인이 자는 듯한 그 고급스러운 침대에 눕기를 망설여 침대 밑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자신이 누워있던 그 카펫도 자신의 더러운 몸을 누이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웠다 그리하여 그 하인은 카펫을 돌돌 말아 옆에 세워두고 맨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 여자들을 향해 에바는 말했다.
“고급스러운 침대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정말로 소유하게 됩니다. 여성들이여 밑바닥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일어나세요.”
에바는 진심으로 그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에바 자신이 그녀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 모델이라 생각했다.
에바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도 여성들의 합숙소와 비슷하게 최고로 만들었다. 그 곳의 모든 건물과 가구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만들어졌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그곳은 어린이들을 위한 천국이었다. 에바는 그곳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들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에바의 이런 숙소들은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았고, 단지 보여주기식 행정이라는 비난도 많았다. 하지만 에바는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들에게도 그런 화려한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성녀, 부유한 자들에게는 창녀
에바는 하루 1만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고, 그 편지들이 원하는 것에 응하고자 노력했다. 대통령궁의 폐쇄된 창고에 갖은 물건들을 모아놓고, 가난한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즉시 보내주었다. 그 창고에는 구두, 설탕, 냄비, 밀가루, 옷 등 수많은 생필품들이 가득했다. 그 곳은 백화점을 통째로 옮겨온 듯, 그 양이 엄청났고 종류도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 그 많은 물건들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의 대부분은 에바가 부유한 자들에게 강제로 기부하도록 한 물건들이었다. 에바는 부유층들이 기부하지 않으면 교묘히 그들의 사업을 방해하여 어쩔 수 없이 기부하도록 만들었고, 실제로 지나가는 고위관료들에게 대놓고 돈을 기부하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에바는 부유한 자들에게는 막무가내로 빼앗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막무가내로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하여 에바는 부유한 자들에게는 창녀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성녀로 불렸다.
에바의 측근에서 일했던 고위관료들은 그토록 험한 말을 쓰는 영부인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하층민의 삶을 살았던 에바의 입은 거칠었다. 그녀는 고위관료들에게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초등학교까지밖에 못 다녔기 때문에 배운 것이 별로 없었고, 상류층들이 지니는 교양도 학습하지 못했다. 유럽 순방 때 그런 그녀를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무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 분야는 잘 모르니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배운 자, 있는 자 앞에서는 언제나 거침없고 당당했다.
하지만 가난한 자를 대할 때는 달랐다. 그녀는 가난한 자들 앞에서는 최대한의 예절을 지켰고, 겸손했고 다정했다. 그녀는 흔쾌히 그들과 손을 잡고 키스를 했다. 훗날 에바를 신봉하는 자들은 그녀가 나병환자들과도 거리낌 없이 키스했기에 병에 걸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에바는 웬만한 감동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유럽 순방 때 그녀를 감동시키기 위한 많은 행사에서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민중들 앞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1950년 7월, 에바는 콜론 광장에서 노인들에게 생활 보조금을 나눠 주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노인들 역시 울었다. 빈민들은 에바의 눈물이 자신들을 이해해준다고 느꼈고, 식사도 거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에바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에바가 빈민들에게 보여준 호의가 모두 가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빈민들을 위해 구호품을 나누어 주고 편지에 답해주고 하는 행동들이 그저 인기를 얻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녀의 행동은 당장 조금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에 대한 그 모든 비판이 전혀 근거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의 빈민들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식이나 거짓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옴에 걸린 아이들, 가난의 찌든 때가 가득한 사람들을 대통령궁에까지 데리고 와 씻겼으며, 매독에 걸린 여인의 손을 잡고, 옴이 득실한 사람과도 포옹했다. “에비타”라고 불리는 영부인은 빈민들 속에 직접 뛰어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구제 정책이 가식이나 인기몰이의 행사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그 일에 너무 몰입해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병의 그늘, 그리고 죽음
영부인 에바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이미 대통령 페론을 넘어설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바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1947년, 영부인의 자격으로 유럽 순방에 나설 때부터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그녀는 유럽 순방 중에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 더 열렬히 노동자들을 구제하는 사업을 벌일 때에도 그녀는 종종 아파 지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50년, 그녀는 더 이상 손쓸 수도 없을 만큼 병이 진행되었음을 선고받았다.
어쩌면 그녀의 병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먹지 못해 늘 앙상했고, 여배우 시절도 다이어트를 핑계 삼아 거의 먹지 않았다. 영부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어트가 습관이 된 것인지 그녀는 영부인이 되어서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녀의 측근에서 그녀를 돌봤던 여인들은 그녀가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무리하게 노동자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언제나 창백했고 20대부터 빈혈로 고생했던 그녀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데에는 늘 소홀했다.
그녀를 괴롭게 만든 것은 육체적 질병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가는 것과 반대로, 남편 페론은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로 인한 고독과 외로움이 에바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후안 페론은 아내의 병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색이 완연했을 때조차 페론은 그녀를 방치했다. 이미 심각한 수준에서 수술이 급했을 때에도 웬일인지 페론은 그녀의 수술을 40일이나 미뤘다. 더 좋은 의사를 기다린다는 명목이었지만 그것은 미심쩍다. 페론은 에바가 병이 심해지자 그녀 곁에도 가지 않았다. 꼭 가야 하는 순간이라면 수술용 마스크를 쓰고 갔다. 에바가 병으로 시트를 자주 버리게 되자, 아예 대형병원의 환자용 시트를 깔도록 하며 값비싼 시트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냉대에도 불구하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에바는 페론을 찬양하는 연설에 참가했다. 그녀의 그런 노력 덕분에 페론은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녀는 끝까지 페론의 충직한 사람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지만 에바를 본 노동자들은 그녀에게 열렬히 환호했다. 페론은 아픈 에바까지도 활용한 것이다.
그녀의 빠른 쾌유를 기도하는 방송이 정규방송으로 편성될 정도로 국민들은 그녀의 회복을 바랐지만, 1952년 7월 26일, 결국 에바는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속보로 전해졌고, 부유한 자들은 기쁨의 삼페인을 터뜨렸고, 가난한 자들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통곡했다. 하인들은 그들의 주인들이 삼페인을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본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울음을 터뜨렸다.
페론은 죽은 에바까지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페론은 죽은 에바의 몸을 보전하며 그녀에 대한 향수를 이어가고자 했다. 죽기 전의 모습과 똑같이 보전된 그녀의 시신 앞에서 국민들은 그녀의 부활을 기대했다. 그 정도로 그녀에 대한 노동자들의 사랑은 광적이었다. 에바의 유리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열 시간 이상을 기다렸고, 죽기 전의 모습 그대로 보전된 그녀의 시신에 입을 맞추었다. 에바의 장례식은 한 달 동안이나 성대하게 치러졌고, 아르헨티나 국토는 그녀에게 바친 꽃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국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고, 진심으로 에바의 죽음을 애도했다. 남편에게는 심한 냉대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열렬한 사랑을 받은 에바의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죽어서도 죽지 못한 에바의 고통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에바 없는 페론은 3년 만인 1955년 9월 실각하였고, 그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치듯 아르헨티나를 떠났다. 페론은 미이라로 보존되었던 에바의 시신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의 실각 이후 에바의 시신은 반대파들이 어디로 빼돌렸는지도 모르게 오랫동안 사라졌다. 이후 15년여를 외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페론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그런데 그가 재집권하기 위해서는 과거 에바의 신화가 필요했다. 1971년 페론은 스페인에서 에바의 시신을 힘겹게 찾아냈다. 하지만 다시 찾은 시신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신은 여러 군데 칼로 찔려있고, 목은 잘려져 있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것이 분명했다. 페론은 에바의 시신을 단장했지만 아르헨티나로 데려오지는 않았다. 그의 곁에는 제2의 에바를 꿈꾸는 이사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각된 지 17년 만인 1973년 9월, 페론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 기간 내도록 그의 양옆에는 에바와 이사벨이 함께 했다. 그는 그 여자들의 후광 없이는 당선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70세가 넘은 그는 대통령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부통령이던 이사벨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74년 11월 17일, 페론 대통령이 죽고 3개월 후 에바의 시신은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죽어서도 페론에 의해 이용당하고, 그 반대파에 의해 무참히 다루어지다가, 죽은 지 거의 20년 만에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삶에서 배울 점
에바 페론은 서른셋의 짧을 생을 그 누구보다 극적으로 살아낸 여인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사생아로 손가락질 받았으며, 혹독한 가난으로 고통받았다. 한때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생계를 꾸려야 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스물일곱, 영부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완벽한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그녀가 원했던 그 모든 것을 얻었다. 대통령인 남편, 방 하나를 가득 메운 값비싼 보석과 화려한 옷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권력과 명예,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당시 엘리트 고위관료들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녀에게 쩔쩔 맸다. 배우를 꿈꾸던 어린 시절 에바가 그랬던 것처럼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성들은 그녀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그녀처럼 되기를 소망했다. 그렇게 그녀는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훗날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으로 남게 되었다.
원하는 것은 모두 얻어낸 에바 페론. 그녀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었을까?
에바는 꿈꾸는 여자였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가장 밑바닥의 현실에서도 최고의 것을 꿈꾸는 여자였다. 사생아로 멸시받고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받던 어린 시절의 에바는 왕자나 대통령과 결혼할 것을 꿈꾸었다. 그때의 에바와 왕자님 또는 대통령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끝내는 그 꿈을 이루었다. 훗날 그녀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꿈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최고의 것을 꿈꾸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에바의 꿈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 견뎌내야 할 시간들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사생아로 태어나 무시 받던 어린 시절부터 초라한 단역 배우 시절까지, 웬만한 무시와 고통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할 때에도 그녀는 꿋꿋이 꿈을 향해 걸어나갔다. 어쩌면 그 외의 다른 방법이 그녀에게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히 좌절할 법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대신, 인내하고 더욱 노력하는 선택을 했다. 그녀의 성공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닌 그녀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에바의 삶에서 타산지석 삼을 일도 많다. 에바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연극배우 시절 단역 하나를 따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몸까지 이용했다. 페론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은 결국은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에바의 결말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에바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성녀로 칭송받았지만, 부유한 자들에게는 창녀로 비난받았다. 에바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소양이나 역사의식은 부족했다. 부유한 자, 곧 배운 자나 지배계급에게 그녀의 행동은 독선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이었다. 페론과 에바는 지나치게 독선적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몰랐다. 특히 고위관료들의 말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페론 부부의 독선적인 모습은 페론의 지지층이었던 군부 세력들에게까지 반감을 사게 되고, 결국 페론은 그들에 의한 쿠데타로 실각하고 만다. 에바는 노력했겠지만, 그녀의 노력의 결과는 아르헨티나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에바는 정치사상이나 역사의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그 결과 여러모로 미성숙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의 목소리들 역시 충분히 근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가 자국민에게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어야 한다. 에바만큼 자국민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은 영부인은 아마 전세계를 통틀어 없을 것이다. 영부인으로서 자국민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영부인이라 할 수 있다. 영부인이 된 에바는 자신의 과거 고통을 잊지 않았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바의 행동이 온전히 가식이라 말하기엔 그녀의 진심어린 마음이 담긴 사례들이 넘쳐나게 많다. 에바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다. 그녀의 그 마음이 힘없고 가난했던 그 나라 국민들에게 깊이 전달되었음이 틀림없다. 에바가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이기에 목표와 방법을 잘못 설정한 것은 맞지만, 그녀가 국민들에게 보여준 사랑까지 모두 거짓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가 “강자에게는 약하게, 약자에게는 강하게”인데 오히려 에바는 그 반대였다. 그녀는 강한 사람에게 굽실거리지 않았고, 약한 사람에게 가혹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유한 자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혹독했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보다 다정했고 자상했다. “나를 약자, 극빈자, 여성들의 운명을 바꾼 혁명가로 평가해주길 바란다.” 라는 에바 페론의 마지막 말처럼, 실제로 그녀가 그렇게 평가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서른셋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화려하게 불태운 그녀의 열정적인 삶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과 감동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하다.
<참고자료. 에바 페론에 대한 비판>
에바 페론은 자국민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퍼스트레이디이다. 여성들의 참정권도 없던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정치계에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큰 활약한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시각은 양극단으로, 그녀가 받은 사랑만큼이나 그녀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사실상 페론 정부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페론 시대 아르헨티나는 세계 경제 7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국이었지만 지금의 아르헨티나는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아르헨티나 하락세의 시작을 페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정치적으로 봤을 때 페론 부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많다.
페론은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고 사유재산 일부를 국유화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최초로 부의 재분배를 생각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국가사회주의는 시대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정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아르헨티나 국고를 풀었지만 그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하락세를 걸어야 했다.
또한 그는 지나친 언론 탄압과 독재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철저한 복수를 하였고, 에바와 페론에 대해 맹목적인 찬양을 요구했다. 그들에 관한 전기를 필수과목으로 이수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페론이 당시 나치즘을 신봉했고 사회주의 국가를 꿈꾸었다는 것이 사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에 에바가 철저히 동조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의 정책이 아르헨티나를 망하게 한 근원적인 이유라는 비난도 피해갈 수 없다.
그녀가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들의 삶은 그리 많이 나아지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책이 근원적인 구제책이 되지 못했고, 그리하여 포퓰리즘(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정말 국민들을 사랑했다면 근원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지만, 페론 부부는 국민들의 인기를 얻는 것에만 관심 있는 듯한 선심성 정책을 폈다. 진정한 정의를 꿈꾸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그런 면에서 페론의 실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실패에 관한 그 모든 책임이 에바보다는 페론에게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페론은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해 에바를 활용했고, 에바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페론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에바는 페론이 어떤 정책을 펼쳤어도 협력했을 것이다. 물론 역사의식 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하겠다는 욕망을 가진 에바의 잘못도 크다. 하지만 여성의 참정권도 없던 시대에 여성으로서, 그것도 뼛속까지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여성으로서 정치계에서 그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그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에바에 대한 평가가 양극단으로 나뉘므로, 그녀에 대한 판단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그녀에게 직접 배울 점과 타산지석으로 배울 점을 구분하여 취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