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일곱 살 생일 파티가 신문기사가 될 정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외모와 빛나는 지성을 가진 덕에 열여덟 살에는 “올해의 사교계의 여왕”으로 뽑혔다. 당대 최고의 미남 국회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와 결혼하였고, 훗날 그 남편이 대통령이 되자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미합중국 최연소 영부인이 되었다. 케네디가 죽은 뒤에는 세계 최고의 갑부였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재혼하였고, 몇 년 뒤 그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미국 내 여성 부자 50위 안에 들게 된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부유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지성을 겸비하였고, 멋진 남편과 엄청난 명예, 막대한 부까지 소유한,보통의 여성이 하나도 가지기 힘든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였다.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들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과 미셸 오바마가 자신의멘토라고 밝힌 인물이기도 하다. 에바 페론이 자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영부인이라면, 재클린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영부인이었으며, 또한 힐러리와 미셸처럼 현대사회를 이끄는 위대한 여성의 멘토로도 존경받는 존재인 것이다.
어떻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을까? 운이 좋아서였을까? 힐러리나 미셸 같은 똑똑한 여성들이 단순히 재클린의 미모나 명성만을 가지고 그녀를 멘토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힐러리나 미셸처럼 잘난 여자들까지 사로잡을만한 재클린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에게는 우리에게는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부터 그녀에게만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삶을 따라가보자.
독서와 상상을 좋아했던 아이
재클린 부비에는 아버지 블랙잭 부비에와 어머니 재닛 리 부비에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 집안은 대대로 이어지는 명문가였으며, 할아버지 존 버넌 부비에 2세는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출신의 유명한 변호사로 그녀의 집은 부유한 상류층에 속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취미는 승마였으며, 일곱 살 생일파티는 신문의 기사거리가 될 정도로 성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 풍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일 출신의 똑똑한, 거기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그녀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으로 그 많은 재산을 다 날려버렸다. 물질적 빈곤은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결국 재키가 열한 살 되던 해 그녀의 부모는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1940년대의 이혼은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렇기에 부끄러운 일이 되기도 했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특히 명문가 집안의 이혼은 가십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재키 부모의 이혼은 신문에 낱낱이 공개되었고, 그녀는 부모의 이혼이 주는 충격과 더불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더욱 상처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재키는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거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는 어떤 상처나 고통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독서에 몰입했고,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피해 자기만의 세계에서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재키의 광적인 독서 습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빛나는 지성미까지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상상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꿈꾸기도 했는데, 그녀는 절대로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세상의 비정함을 일찍 경험한 재키는 세상에 믿을만한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타인들과의 관계 맺음보다 스스로와의 관계 맺음을 더 중시하였고, 독서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장 즐겼다. 그녀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학생에 속했지만 언제나 자신만의 고독의 시간은 따로 남겨두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는 되지 않을 거야
재클린은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진학하는 채핀 스쿨과 미스포터스 스쿨을 거쳐 바사르 대학에 진학했다. 바사르 대학 역시 당시 부유한 명문가 집안의 딸들이 주로 진학하는 대학이었다. 그 여학교에 다니는 대부분 학생들의 목표는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그 영향력 아래에서 평생을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재클린의 어머니 재닛은 보수적인 사람으로, 그 당시 여학생들처럼 재키 역시 훌륭한 남편감을 찾기를 바랐다. 재키의 어머니는 그녀가 너무 열심히 공부하자, 남자들은 강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재키의 학업에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움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재클린은 어머니의 눈을 피해 열심히 공부했다. 여자는 많이 공부해서도 안 된다는 경직된 시대분위기 속에서 재클린은 다른 여학생과는 달리 평범한 가정주부에 머무르고 싶진 않다는 꿈을 꾸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재키는 미스 포터스 스쿨의 졸업 앨범에서 “절대 평범한 가정주부에 머물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평범한 가정주부에 머물지 않겠다는 그 말이 특별할 게 없이 느껴지지만, 당시의 여성관에 비추어 볼 때 재키의 그런 생각은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미국의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들이 바깥 활동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평범한 여성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훗날 재클린은 기자 생활을 잠시 하게 되는데, 여자가 직업을 가지는 것을 반대하던 어머니에 의해 곧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재클린은 졸업 앨범에서 말했듯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지는 않겠다고 늘 생각했다.
바서 대학에 진학한 열여덟의 재클린은 세련된 외모와 빛나는 지성을 가진 멋진 숙녀로 자라났다. 그녀는 주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올해의 사교계의 새얼굴”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즐기기보다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다. 재키는 시시한 남자들이나 쓸데없는 사교 모임보다, 공부나 독서를 더 즐겼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여자였다.
하지만 재키의 이런 모습은, 어서 좋은 신랑감을 찾기를 바랐던 그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른 것이었다. 배움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재클린은 보다 넓은 세상을 배우고자 유학을 결심했다. 그녀는 세련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대륙에 관심이 많았고,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고자 했다. 하지만 좋은 신랑감을 찾아 하루빨리 결혼시키는 것이 목표였던 어머니에게 재키의 프랑스 유학은 쓸데없는 시간낭비였다. 하지만 재키는 완고했고, 보내주지 않으면 뉴욕에 가서 모델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유학에서 세련된 프랑스와 유럽 문화를 배우게 되었고, 유창하게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이후 영부인으로 있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영부인으로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 문화와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던 재키에게 샤를드골은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우아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그녀에게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한순간 매료되었다. 또한 유학시절 익힌 세련된 유럽 문화에 대한 이해는 훗날 문화적으로는 미개했던 미국을 문화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그녀는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보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꿈을 명확히 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집을 부릴 줄도 알았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즐기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매진했다.
케네디라는 남자
하지만 당시의 여자들이 그랬듯, 재클린 역시 훌륭한 신랑감을 찾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재클린은 좋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 여러 남자들을 만났고 그 중 장래가 촉망되는 존 휴스테드와 약혼을 결심했다. 존 휴스테드는 윌 가의 떠오르는 스타이자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고, 그의 집안은 부유한 사업가 집안이었다. 재클린의 어머니는 그 청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재클린은 왠지 그 남자와 결혼하면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가 될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러던 중 기자로 일하면서 촉망받는 상원의원인 존 F. 케네디를 만나게 된다. 재클린은 한눈에 그가 특별한 남자임을 알아봤고, 자신이 꿈꾸던 신랑감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존 휴스테드와는 파혼하고 케네디를 사로잡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재클린은 아름다웠지만, 케네디는 더 아름다운 금발미녀들과 어울렸기에 사실 미모로는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재키는 여느 금발미녀들과 달리 뛰어난 지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재키는 케네디의 비서로서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완벽하게 해내였고, 케네디는 그런 재키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누군가를 책임질 수도 없고, 또 심한 바람기로 스스로 한 여자에게 정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케네디는 처음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케네디는 재키에게 청혼을 3년이나 미루며 만나고 있었다. 재키는 케네디의 청혼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재키는 한 친구에게 “케네디와 결혼하면 정말 좋겠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루빨리 케네디의 청혼을 받고 싶었던 재클린은 오히려 4주나 걸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취재를 지원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케네디가 확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전략은 적중했고, 마음이 급해진 케네디는 전화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로써 세기의 결혼이라 불리는 그들의 결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청혼을 받고 약혼한 후에도 케네디의 바람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케네디는 재키를 두고 친구들과 요트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도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어울렸다. 재키는 케네디를 사랑했고 그와의 결혼도 간절히 원했지만 막상 그의 바람기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바람둥이 케네디와의 결혼을 걱정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했다.
재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케네디는 미남이었고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며, 상원에서 가장 촉망받는 의원이었다. 그런 조건들뿐만이 아니었다. 케네디는 재클린과 같이 책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화가 잘 통했고, 무엇보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재클린은 행복했다. 재키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마초 같은 스타일에 끌려하는 자신의 성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케네디 같은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성향을 인정하기로 했고, 결국 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찰스 왕세자의 바람기에 대해 진지한 고민 없이 결혼한 것과 대조적이다. 재클린은 케네디의 바람기에 대해 확실히 인지했고 자신의 성향까지 파악하며 훗날 있을 불상사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결혼했다. 그랬기에 이후로도 끊이지 않던 케네디의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생활은유지될 수 있었다. 재키는 한때 케네디의 애인이었던 마를린 먼로로부터 곧 백악관의 안주인이 바뀔 것이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남편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이라고, 남편을 믿는다고 대응했다.
그녀는 케네디와의 결혼이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을, 또 정치인의 아내로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을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룰 만큼 그 남자는 충분히 멋지고 가치 있다고 생각했고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그렇게 하여 1953년 9월 12일, 전도유망한 케네디의 결혼식은 그야말로 매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900명이 넘는 하객들의 축하 속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식 이후 7년 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케네디가 달로 인류를 보내겠다는 선언과 함께 이 젊고멋지고 아름다운 대통령 부부는 미국에서 희망의 아이콘이 된다.
서른한 살의 젊고 아름다운 영부인
1961년, 결혼한 지 7년 만에 케네디는 43살의 나이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리고 재키는 31살의 젊은 나이로 미국의 최연소 영부인이 되었다.
케네디 정권 시절 그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남편 케네디가 정치에 몰두하는 동안 재클린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부인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재키는 처음 백악관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미국을 상징하는 백악관이 그저 낡은 저택으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당장 백악관 복원 사업에 착수하였고, 그녀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허름했던 백악관은 미국의 훌륭한 역사관, 문화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에 비해 문화적으로 미개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미국 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이가 재클린이었다. 그녀는 외국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초빙하여 다양한 공연을 주관했고, 꾸준히 예술 분야를 후원하여 젊은 예술가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한 나라가 가지는 문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 문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힘쓴 것이다.재클린은 비공식적으로 미국의 문화부장관의 역할을 하였다.
재클린의 역할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케네디는 젊은 나이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유럽의 수장들에게 은근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유럽의 수장들은 케네디가 젊고 잘생겼으며 집안도 좋은 남자가 운까지 좋아 쉽게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가 정치적 역량이 없다고 깔봤다. 그런 상황에서 재클린이 케네디의 유럽 방문에 동반하여, 유창하게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고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자, 이 젊은 부부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케네디는 재클린 덕에 유럽 수장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매끄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케네디는 “저는 재클린의 유럽 여행에 동반한 남자였습니다.” 라고 말하며, 유럽 순방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 아내 재키였음을 인정했다. 그것은 아내 재클린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유럽순방의 주인공은 케네디보다는 재클린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미국의 영부인 재클린은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패션은 늘 언론 취재의 집중대상이었다. 그녀 역시 그런 관심을 즐겼고 실제로 그녀의 패션센스는 놀라웠다. 케네디 대통령이 젊지만 알맹이가 있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그녀는 화려하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하였다. 그녀는 파티장에 단순한 디자인의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치렁치렁한 레이스를 입고 온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멀리서도 자신을 잘 알아볼 수 있게 유독 원색의 화려한 색감의 옷을 즐겨 입기도 했다. 재클린의 민소매 A라인 원피스, 샤넬풍 수트, 장갑과 스카프, 두 줄의 진주 목걸이, 굽이 낮은 펌프스 등은 일명 “재키 스타일”로 불리며 전 세계 여성들을 사로잡았고, 그 모든 것은 유행이 되어 불티나게 팔렸다.
사실 그녀의 패션은 자신의 단점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것들이 많았다. 그녀가 장갑을 애용한 이유는 큰 손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고, 작은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슴이 잘 드러나지 않는 민소매 드레스를 자주 입었다. 이후 큰 선글라스를 즐겨 쓴 이유도 그녀의 유독 넓은 미간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자신의 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패션을 이용한 것이기에 진정한 패셔니스타라고 할 수 있다. 유명 디자이너들은 재클린이 옷을 완벽하게 소화한다고 입을 모았다.
재클린은 젊고 아름다운 영부인으로서 전 세계인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의 빛나는 지성미와 문화적 감각은 유럽 수장들을 사로잡았으며, 미국을 문화적으로 세련된 나라로 대외적인 인식을 바꾸어놓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은 남편 케네디에게도 자랑스러운 아내이기에 충분했다.1962년 쿠바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재클린은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며 영부인으로서 현명하게 처신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최고조였을 때,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대피하라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편 옆에서 그와 어려움을 함께 했다. 이후 일이 잘 마무리되자 케네디는 주요 참모진에게 감사 달력을 선물했는데, 재키에게도 그 달력을 선물하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 즈음 케네디의 바람기도 많이 누그러졌고 부부사이는 더욱 좋았다. 1963년 재클린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는데, 그 때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케네디 역시 매우 슬퍼하며 아내를 위로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며 부부사이는 더욱 공고해졌다. 쿠바 위기 이후 미국 정국도 안정되었고 부부 사이도 안정되어 재클린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시련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 그녀 인생에서 최고의 불행을 경험해야 했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남편 케네디가 저격당한 것이다. 케네디와 함께 카퍼레이드 중이었던 재클린은 가장 가까이서 남편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척수를 억지로 머릿속으로 다시 집어넣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야했다. 대통령인 남편이 죽었으므로, 영부인으로서의 화려하고 부산한 삶도 끝이 났다.
그녀는 여섯 살의 딸과 세 살의 아들과 함께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그 어떤 강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쿠바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련 속에서 더욱 강한 면모를 발휘했다. 그녀는 대통령이 암살당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미국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으며, 남편의 장례 준비도 도맡아 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유명한 장례식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케네디의 장례식을 최대한 영웅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재키는 링컨 대통령 때처럼 기수 없는 말을 제안했고, 남편이 좋아하던 아일랜드 백파이프 음악을 준비하도록 했다. 또 다른 저격을 염려해 함께 걷지 않을 것을 권고 받았음에도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남편의 운구를 따라 걷기로 했다. 그녀 뒤에는 케네디의 남동생들, 미국의 수많은 저명인사들, 유럽 각국을 대표한 유명인들이 모두 따라 걸었다. 그토록 언론으로부터 보호하려 애썼던 자신의 아이들을 언론에 그대로 노출시켰으며, 세 살이던 어린 아들에게는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도록 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이지만 씩씩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인들의 슬픔과 충격을 완화시키고자 한 그녀의 노력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장례식 날 예정되어 있었던 아들의 생일 파티도 그대로 치러주었고,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편지를보냈으며, 남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각종 사업에도 바로 착수했다. 남편의 자서전 편찬에 힘을 썼고,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여 남편의 정권을 카멜롯의 전설에 빗대었다. 케네디의 인상적인 장례식과 이후 케네디를 영웅화하는 작업은 모두 재클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꿋꿋이 해내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말 케네디가의 비극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일까? 이후 시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그마저도 괴한의 저격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케네디가의 비극'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이제 그녀의 아들 케네디 2세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다. 실제로 그녀는 두려웠다. 남편 케네디의 암살 뒤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녀는 자신의 아들 역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아이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힘을 가진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갑부였던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세계 최고의 갑부이지만, 사교계에서는 부랑아 취급을 받는, 나이는 재키보다 23살이나 많고, 키는 재키보다 20센티나 더 작은 오나시스와 결혼하여 미국을 떠나는 것이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선언한 뒤 그녀는 수많은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고, 그녀를 사랑했던 전 세계인으로부터 차가운 외면을 받아야 했다. 대중들은 그녀가 영원히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으로 남아주기를 바랬다. 또 재혼을 하더라도 그렇게 급하지 않게, 좀더 멋지고 잘생긴 남자와 하기를 바랬다. 오나시스와의 재혼은 케네디가 사망한 지 5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비난과 외면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여서일까? 불행히도 둘은 맞지 않았다. 오나시스는 재키를 전시용으로 데리고 다녔으며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재키를 깔보고 무시했다. 오나시스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으며 결국 이혼 소송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혼 소송 중 오나시스는 죽게 된다.
오나시스는 행복하지 않았던 그들의 결혼 생활을 남에게 떠벌리기도 했고, 그녀를 향해 공개적인 망신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졌다. 오나시스가 카메라 앞에서 공공연하게 그녀를 비하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키는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나시스가 죽은 뒤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도 그저 “그는 내가 힘이 들 때 많은 도움을 준 감사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깊은 고마움은 전한 것이다. 그녀다운 태도이다.비난을 삼가함으로써 그를 선택한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을 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그녀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라는 긴 이름과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50위 안에 드는 엄청난 부을 가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기
사람들은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가 이제 남은 인생을 사교계의 대모로 편안하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랬듯 그녀는 또다시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여 편집자가 되었다. 이전에 린든 존슨 대통령이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주요국의 대사직을 제의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한 것과 대조적으로, 편집자 일은 그녀가 스스로 찾은 직업이다. 세계인들은 편집자로 변신한 그녀의 선택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블데이에서 편집자로 일했는데 실제로 일반 직원들과 함께 출근하여 회의에 참석하고 업무를 조율했으며, 직원들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소방 훈련에도 참여하였다. 그녀는 돈을 위해 일하지 않았고, 그녀가 유명인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요구하지도 않았다.(입사 당시 일주일 내내 출근하지는 않겠다는 요구는 있었다.) 또한 편집 일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당시 <뉴욕타임즈>는 그녀를 “더블데이의 비밀 병기”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이때가 그녀 인생에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그녀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64세가 되던 해 그녀는 암을 선고받는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그녀는 조용히 삶을 마감하기로 한다. 그녀다운 마무리였다. 그녀는 1994년 5월 19일, 사랑하는 가족과 책에 둘러싸여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배울 점
시련에 대처하는 자세
앞서 그녀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 모든 것과 함께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시련 또한 가져야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고 그 이혼이 낱낱이 공개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또한 그녀는 멋진 남편 케네디와 결혼을 했지만, 그의 엄청난 바람기를 감수해야 했고, 또 남편이 괴한의 사격에 의해 자신의 품에서 죽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그녀와 자식들에게 닥친 죽음에의 위협을 견뎌야 했고, 그로 인한 두 번째 결혼은 많은 이들의 외면과 비난을 받았다. 또 그재혼은 실패로 끝이 났다,
거기다 재키는 네 명의 아이 중 두 명의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특히 막내 패브릭이 세상에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었을 때는 평소 힘든 것을 내색하지 않는 재키도 많은 괴로움을 표출했다고 한다.
이처럼 재키의 인생은 어찌 보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재키가 힐러리와 미셸을 포함하여 전 세계 여성들의 멘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련들 때문이다. 그녀가 놀라운 것은 그 시련을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재클린은 그 모든 힘든 상황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 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부모의 이혼에서 우울증에 걸리거나 방황하는 대신 책 속에 몰입했고, 남편의 죽음과 같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영부인으로서 미국인들을 다독이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오나시스와의 결혼 실패도 여론을 이용하여 가십거리로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시련 앞에서 더욱 강인하고, 누구보다 우아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그녀가 소유한 부와 명성보다 그녀가 시련에 대처했던 그 용기와 의연함이 많은 이들에게 더욱 놀라움과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기
그녀에게 배워야 할 가장 강력한 것은 세상의 소리보다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태도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자 노력했고, 세상의 여러 기준보다 자신의 기준을 더 중요시했으며, 그런 스스로의 선택을 믿었다.
그녀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자신에 대해 먼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고, 타인과 대화하기 전에 스스로와 대화했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미국여성들의 꿈보다 더 큰 꿈을 꾸었고 그 꿈을 믿었다. 어머니가 그녀의 꿈을 반대할 때에도 그녀는 자신의 꿈을 믿었고, 친구들이 케네디를 반대할 때에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의 기준보다 내면의 목소리를 중시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내면의 소리보다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과대조적이다. 또한남들이 하는 말에 너무도 쉽게 흔들리는 우리와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었다.
그녀는 영부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였는데, 정치적인 활동은 자신이 잘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 관심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는 타인의 비난이나 염려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임했다.백악관 복원 사업이 그랬다. 케네디는 재클린에게 백악관 복원 사업이 자칫 낭비벽이 심한 영부인의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건물인 백악관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결국 백악관 복원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1962년 밤<존F.케네디 여사와 함께하는 백악관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새로운 백악관 모습은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썼다. 그녀는 파티나 만찬에 참가하여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독서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즐겼다. 그녀는 외부 행사는 부통령인 존슨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집에서 책을 읽거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고집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주로 유럽 디자이너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이 비난받자 즉시 국내 디자이너를 고용하기도 했고, 백악관 복원 사업에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일을 진행하였다. 훗날 편집자로 일할 때에도 많은 이들과 협력하여 융통성 있게 일을 진행하였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의견을 모두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를 아는 현명한 여자였다. 세상의 많은 소음, 세상이 퍼붓는 비난에 귀 기울이는 대신, 스스로의 마음에 더 집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졌다.
“우리 남편은 기자들이 무슨 얘길 하는지 궁금해 하죠. 하지만 난 내 선택을 믿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 이것이다. 우리가 재키처럼 부유한 집, 대통령인 남편, 세계 최고 갑부인 남편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도 재키처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공부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독서에 대한 열정
그렇다면 그녀의 그 의연함과 현명함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녀의 독서와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녀는 유명한 독서광이었다. 그녀의 남편 케네디 역시 유명한 독서광이었고,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할만큼 유능한 작가이기도 했는데, 그런 케네디마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클린은 독서를 사랑했다. 두 번째 남편 오나시스는 그녀가 너무 많이 책을 읽는 것에 불평할 정도였고, 재키의 많은 친구들 역시 그녀가 지나칠 정도로 책을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8~1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녀는 주로 모든 지식을 책을 통해 얻었는데, 영부인으로서 어떤 나라를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그 나라의 문화, 역사, 언어에 대한 책들을 섭렵했고, 그녀가 첫딸 캐롤라인을 낳았을 때에는 유아심리 관련 책들을 섭렵했다. 남편 케네디의 장례식을 준비할 때에도 유명 장례식에 관한 책들을 통해 그의 장례식을 구상했다. 훗날 그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본 <스포크 박사의 영유아 돌보기>는 재클린의 유품 경매에서 6900달러에 판매되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독서를 통해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었고, 또 꼭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독서 자체를 즐기고 사랑했다.
그녀는 배움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그녀는 늘 우등생이었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반대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던 그녀는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워싱턴에서 새로 대학에 등록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또한 케네디와 결혼할 즈음에는 정치가인 남편의 직업을 공부하기 위해 정치 외교와 관련된 대학을 등록하여 수업을 들었고, 오나시스와 결혼하여 그리스에 갔을 때에는 그리스어는 물론 그리스 문화와 역사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미모는 사실 그리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케네디의 프로포즈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끝을 알 수 없는 눈부신 지성미 덕분이었다. 그것이 케네디 뿐 아니라 훗날 유럽의 수장들도 반하게 한 그녀만의 매력이었다.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능력
재클린은 사람, 특히 남자들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 미남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케네디, 세계 최고의 갑부였던 오나시스에게 청혼을 받았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성미가 안 좋기로 유명한 소련의 흐루시초프를 웃게 만들었고, 자기중심적이며 여간해서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샤를 드골에게도 찬사를 받았으며,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인도의 네루 수상은 그녀에게 반해 직접 요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녀를 한번 본 남자들은 연약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를 자신들이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믿었고, 실제로 수많은 유명인들은 앞 다투어 남편을 잃은 그녀를 보호해주려고 나섰다. 심지어 파파라치도 그녀의 사진을 찍을 때 그녀의 단점이 부각되는 사진은 찍지 않을 정도였고, 어떤 기자는 그것이 날조인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글을 써주었다.
어떻게 그녀는 모든 남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앞서도 말했듯 그녀는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다. 그녀는 사각턱이었고 미간이 너무 넓었으며, 가슴도 작았다. 다만 자신의 단점을 잘 가리는 패션센스가 있었고, 평생 승마와 요가로 날씬한 몸매를 만들었다는 점은 인정할만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먼저 일반 미녀들과는 확연히 다른 빛나는 지성미를 꼽을 수 있다. 단순히 “학벌이 높다. 똑똑하다.”의 수준이 아니라 그녀는 진정으로 배움과 독서를 사랑했고 평생 그것을 즐겼다. 독서와 배움을 사랑하고 그것을 평생 실천한 태도가 그녀만의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또한 그녀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여자였다. 몸매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여 그녀는 평생 소식과 요가, 승마로 몸을 단련했다. 특히 그녀는 어릴 때부터 승마를 해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런 바른 자세는 그녀를 더욱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조용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는 남자들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녀는 좀처럼 급하게 말하는 법이 없었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상대방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 태도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녀 앞에 서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하게 했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미간을 넓히며 얼굴 가득 짓는 그 미소는 정말로 사랑스러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이 화장법이나 성형에만 관심을 가지며 겉을 꾸미는 데 집중하는데, 재클린처럼 내면을 아름답게 만들고, 우아한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백조처럼 우아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백조가 물 위에서만 우아하고 물 아래에서는 무척이나 투철하듯, 그녀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끊임없이 발을 휘젓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보이는 삶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성의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노력을 했다.먼저 자신을 열심히 공부했으며,세상에 대한 공부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떠한 시련에도 강인하게 인내했다. 그런 그녀의 노력이 힐러리와 미셸을 비롯한 전 세계 여성들의 가장 강력한 멘토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 감동을 주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하라. 그래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