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로댐 클린턴(1947~)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힐러리는 '최초'라는 수식어와 친하다. 그녀는 웰즐리 여대 졸업식에서 연설을 한 최초의 학생이며, 로즈로펌에 들어간 최초의 여자 변호사이다. 또한 로즈로펌에서 최초의 여성 경영자가 된다. 뿐만 아니라 남편 빌 클린턴이 아칸소의 주지사일 때 그녀는 최초로 직업을 가진 주지사 부인이었으며,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대통령인 남편과 학력이 동등한 최초의 영부인으로 기록되었다. 영부인 출신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경우도 그녀가 최초였으며,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 여성 의원이 당선된 경우 역시 그녀가 최초였다. 그녀가 그토록 많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기까지, 그간의 철통같은 장벽들과 맞서 싸웠을 그녀의 인생 여정이 참으로 험난했을 것 같다.
그녀와 클린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클린턴의 대통령 임기가 끝난 어느 날,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 마침 그 주유소 사장이 힐러리의 예전 남자친구였다. 주유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클린턴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힐러리에게 “저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당신은 주유소 사장의 아내였겠지? 시집 잘 온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힐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저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저 남자가 아마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거야.”
참으로 자신만만한 그녀이다. 그녀는 언제부터 그렇게 자신만만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언제부터 그렇게 많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만큼 강인한 여자였을까? 또한 그녀의 말처럼 정말 클린턴은 그녀의 남편이었기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삶을 들여다보자.
강인한 사람으로 키운 힐러리의 어머니
힐러리는 자영업을 하는 아버지 휴 로댐과 가정주부인 어머니 도로시 로댐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힐러리의 집안은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아버지 휴 로댐은 권위적인 면이 많았고, 자식에게 칭찬도 인색한 편이었다. 그에 비해 어머니 도로시는 늘 힐러리를 지지했고, 그녀에게 훗날 도움이 될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힐러리의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남녀차별을 하지 않았고, 힐러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힐러리의 아버지 휴 로댐은 절약정신을 매우 강조했다. 그녀가 치약 뚜껑을 제대로 닫아두지 않으면 그것을 창밖에 던져 찾아오도록 하셨다. 굉장히 추운 어느 날, 힐러리는 아버지가 던진 치약 뚜껑을 찾으러 나가야 했다. 그런 아버지의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교육 덕에 힐러리는 영부인이 되어서도 뭐든지 절약했다. 그녀는 남은 음식을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링컨 대통령의 부인인 메리 토트나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을 비롯한 많은 영부인들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사치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옷차림에 관심이 없고 백악관에서 파티 같은 행사도 열지 않아서 불평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
힐러리는 특히 어머니 도로시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도로시는 힐러리가 강인한 사람으로 크기를 바랐다. 힐러리가 네 살 때의 일이다. 힐러리가 수지라는 친구에게 맞고 울면서 들어온 일이 있었다. 힐러리는 어머니에게 위로 받고 싶었다. 하지만 도로시는 어린 딸에게 “겁쟁이는 이 집에 들어올 수 없어. 수지가 널 때리거든 너도 수지를 때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힐러리는 수지를 한 방 먹였고, 이에 남자아이들은 어린 힐러리를 굉장히 용기 있는 아이라고 따랐으며, 이후 수지와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 도로시는 힐러리가 강한 사람으로 크기를 바랐고, 그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힐러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강인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훗날 힐러리가 정치에 몸담았을 때에 수많은 정적들이 클린턴과 그녀를 비방했다. 선천적으로 타인과의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던 클린턴은 정적들의 비방에 강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힐러리는 그렇지 않았다. 힐러리의 물러나지 않고 강인하게 맞서는 태도는 어릴 적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로시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할아버지 댁이나 친척집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그녀는 딸에게만은 그런 삶을 살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휴 로댐의 권위적인 면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가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가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도로시의 가치관이 힐러리에게도 영향을 준 것인지, 힐러리 역시 클린턴의 수많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클린턴과 첼시 옆을 꿋꿋하게 지키며 가정을 깨지 않았다.
힐러리의 아버지는 철저한 공화당 지지자였고 어머니는 민주당 지지자였는데, 힐러리의 어머니 도로시는 권위적인 남편이 두려워 실제로 정치색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훗날 힐러리가 공화당 지지자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바뀐 데에 어머니 도로시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힐러리의 부모는 평범한 중산층에 불과했지만 힐러리가 딸이라고 차별한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교육을 중시하여 힐러리의 학업을 격려했다. 힐러리가 태어난 해가 1947년인데, 아무리 미국이 한국보다는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어 있는 나라라 하더라도 그 당시 미국에서도 남녀차별은 심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힐러리가 여자라고 해서 남자들이 할 일을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모의 생각은 보통은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쓰던 “힐러리”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지어준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힐러리에 이어 태어난 두 명의 남동생과 힐러리는 남녀차별을 받지 않고 성장하였다.
그런 부모님의 가르침 속에서 힐러리는 여자라서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힐러리의 생각이 거대한 벽에 부딪힌 첫 번째 사건이 있었다. 그녀가 열네 살 때,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힐러리는 우주항공국에 편지를 보내 어떻게 하면 우주비행사가 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여자는 될 수 없다”였다. 힐러리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자신이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품게 되었다.
열심히 했지만 실패를 맛봐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
학창시절 힐러리는 매우 성실한 학생이었다. 초등학생 힐러리는 과제가 20페이지라면 200페이지를 해갈 정도로 학업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그리하여 중학생 때까지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와는 달리 학생 수가 많은 고등학교에 오자 그녀의 노력에 비해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늘 최상의 성적은 거두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 공부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 리더 활동에 몰두했다. 힐러리는 메인이스트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반장이 되었고, 이듬해 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고등학생 힐러리는 상대 진영의 남학생이 그녀가 여학생이기 때문에 학생회장이 될 수 없다는 흑색선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약만을 잘 선전하며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녀는 상대편을 비방하기보다 자신의 일에만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힐러리는 그 선거에서 패배했다. 상대진영의 흑색선전에 전혀 대응하지 않은 잘못이 컸다. 어쨌든 힐러리는 선거에서 첫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힐러리의 고등학생 시절은 학업도 원하는만큼 성취를 거두지 못했고,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힐러리의 낙담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힐러리는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두 명의 남학생에게만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그마저도 애프터는 받지 못했다. 고등학생 힐러리는 열심히 생활하는 학생이기는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다지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다. 힐러리는 공부에서도, 연애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했고, 또 선거에서는 패배의 쓴맛을 봐야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그 선거의 패배에서, 상대진영의 흑색선전에 대해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무언가 대처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훗날 그녀가 치러야 할 수많은 선거에서 그 깨달음을 실천했다. 고등학생 시절의 첫 실패는 그녀에게 훗날의 디딤돌이 될 경험이 되어주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강연을 듣게 된 후 그녀는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그 연설을 통해 그녀는 백인으로서 알지 못했던 소외된 흑인들의 삶을 접하게 되었고, 인종차별 문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되었다.
웰즐리 여대에서 더욱 성장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힐러리는 대학을 선택해야 했다. 막연히 사회를 개선시키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세울 수 없었다. 우선 그녀에게는 여자여서 선거에서 패배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여학교로 가길 원했다. 그곳에서는 여자라서 차별받을 일도 없었고 남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택한 곳이 웰즐리 여대였다.
그런데 그곳은 힐러리가 사는 곳인 중부와는 멀리 떨어진 동부에 있는 대학이었다. 또한 그곳은 대부분이 부잣집 딸들이 다니는 대학으로, 대체로 해외여행을 무수히 다녔고 전용기를 가진 학생들도 있었다. 대부분 성적도 우수하여 학년을 뛰어넘은 여학생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힐러리는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웰즐리에 갔을 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두각은커녕 처음엔 그곳에 적응하지 못해 돌아가고 싶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힐러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보다는 부모를 잘 만나 잘된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대부분은 즐기는 삶을 원했고 훗날 좋은 남편을 찾는 꿈만 꾸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자신만의 확고한 꿈이 있었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남다른 성실성이 있었다. 힐러리는 곧 그녀의 주특기인 성실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파티에 참여하며 즐기는 삶을 살 때에 힐러리는 책만 파고들었다.
그러자 곧 성적이 향상되었고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힐러리는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성공적인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힐러리는 꿈을 확고히 하고, 즐기는 삶 대신 노력하는 삶을 선택하였으며, 실제로 철저한 노력을 실천한 결과였다.
힐러리가 대학을 다니던 1965~1969년의 시절은 우리나라 유신정권 때와 비슷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무리하게 베트남 전쟁을 진행했고 그것에 반대하는 여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 곳곳에서 시위가 계속되었다. 또한 그녀가 존경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자, 그전까지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공화당이었던 힐러리는 민주당으로 지지노선을 바꾼다. 그렇게 힐러리는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자주 접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꿈을 더욱 강력하게 가지게 되었다.
힐러리는 정치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힐러리는 여자들끼리만 경쟁하면 되었던 선거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녀는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학생회장으로서 많은 역할을 해내었다. 당시 정부에 대한 과격 시위가 한창이었으나 힐러리는 그런 과격 시위에는 반대했다. 그녀는 제도권 내에서 대화로 해결하길 바랐다. 그런 힐러리가 학생회장이 되자, 학교와 학생의 입장을 중간에서 잘 전달하고 합의점을 찾는 역할을 잘 해내게 되었다. 힐러리는 학교와 학생들 모두에게서 신뢰를 얻었다.
힐러리는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힐러리는 민주당 반전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고, 여름방학에는 워싱턴 인턴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다. 활발한 활동을 하던 대학 시절도 어느덧 끝이 나고, 마침내 웰즐리 여대의 졸업식이 다가왔다. 그 졸업식에는 공화당 의원들이 줄줄이 와서 전쟁 지지 연설만을 할 것이 뻔했다. 이는 당시 반전 운동으로 과격한 시위가 계속 되던 사회 분위기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처사였다. 학생들은 자신들도 졸업식에서 연설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 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전국의 방송에 나갈 졸업식 연설을 누가, 어떤 내용으로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중재자 힐러리가 나섰고, 그녀가 학교 측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는 수준에서 자신이 연설하겠다고 말하자, 마침내 학교는 연설을 허락했다. 힐러리는 웰즐리 졸업식 최초로 학생 연설을 하게 된 것이다. 힐러리는 학교를 난처하게 하지 않는 적정한 수준에서 학생들과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졸업식 당일, 웰즐리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고위 인사와 신문, 방송 기자들이 참여했다. 그녀에 앞서 공화당 의원인 브룩 상원의원이 연설했는데, 그는 전쟁과 당시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옹호하는 연설만을 했다. 이에 힐러리는 분노했고, 그녀가 준비한 원고 대신 즉석에서 브룩 의원의 연설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전쟁의 무의미함과 공화당의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을 쏟아내자 졸업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일어서서 7분 동안이나 기립박수를 쳤다. 힐러리의 이 연설은 생중계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 연설로 인해 힐러리는 단연 인기인이 되었다. 이후 힐러리는 텔레비전 쇼에도 나갔고, 주간지에도 소개되었다. 힐러리는 졸업식 연설로 동시대 여성들의 우상이 된 것이다.
졸업과 함께 힐러리는 또다시 미래를 선택을 해야 했다. 힐러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고, 그 변화는 과격 시위가 아니라 제도권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법률로써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다다랐고, 예일 법대에 진학하여 변호사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녀 인생의 중대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클린턴이라는 남자
1969년, 힐러리는 예일 법대에 입학할 때부터 웰즐리 졸업 연설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힐러리는 남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자신들보다 강한 여자로 보이는 힐러리에게 선뜻 접근하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힐러리를 힐끔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힐러리는 그 남자의 시선을 의식했고 먼저 다가가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통성명이나 하자”라고 말했다. 그 남학생은 먼저 다가온 힐러리가 놀라워 자신의 이름조차 까먹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미국의 제42대, 43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다.
사실 클린턴은 예전부터 힐러리에 대해 알고 있었고 친해지고 싶었으나, 다른 남학생들처럼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힐러리도 클린턴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그는 로제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을 갔다 온 우수한 학생이었다. 클린턴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못사는 자신의 고향 아칸소로 돌아가 그 곳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며 눈빛을 반짝이는, 조금은 특이한 남자였다.
외모가 멋졌던 클린턴은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 있는 남자였다. 그에 비해 힐러리는 유명세는 있었지만 외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늘 헐렁한 티에 청바지를 입었고 머리는 질끈 묶었으며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당차게 할 말을 다하는 힐러리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도서관에서의 첫 만남 후에도 두 사람은 좀처럼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정권과 시민권> 수업 후 클린턴은 용기내어 힐러리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학기 수강 신청하러 학사과에 간다는 힐러리의 말에 클린턴은 자기도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며 함께 걸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학사과 직원은 클린턴에게 “빌 아직도 여기 있니? 넌 아까 수강신청 끝냈잖아”라고 말해 클린턴은 힐러리에게 마음을 들켰다. 이에 솔직하게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거짓말 한 거야"라고 말했고, 힐러리는 클린턴의 그런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둘은 오랫동안 걸으며 대화를 했다. 그리고 힐러리는 클린턴이라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다. 훗날 힐러리는 클린턴에 왜 좋았냐는 질문에 “그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라고 답했다. 강한 여자였던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고 기죽지 않았던 클린턴에게 힐러리는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 힐러리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클린턴에게 더 빠지게 되었고, 그 남자친구를 차고 클린턴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통하는 게 많았다. 둘다 미국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큰 꿈이 있었고, 그런 면에서 둘은 대화가 잘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똑똑했고 서로의 가능성을 확고하게 믿었으며, 서로의 부족한 점은 보완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평생의 짝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 앞서 동거를 했다. 힐러리는 결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신중했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아칸소로 돌아가 자신의 고향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힐러리에게는 워싱턴에서의 보장된 빛나는 삶이 있었다. 그와의 결혼은 자신의 꿈을 버리고 시골 마을에 가 하급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힐러리는 클린턴을 사랑했지만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그 중간에 클린턴은 수없이 청혼했지만, 힐러리는 늘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칸소에서 힐러리가 지나가는 말로 “이 집 참 예쁘다”라고 했던 그 집을 클린턴이 사면서 “이 집에서 함께 살자”라고 한 번 더 청혼했다. 힐러리는 자신의 꿈만큼이나 그 남자와의 사랑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부부가 되기로 했다. 1975년 10월 11일, 그들의 결혼식은 아칸소의 그 집 거실에서 소박하게 이루어졌다.
힐러리는 클린턴을 사랑했지만, 쉽게 결혼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힐러리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랬기에 훗날 자신의 결혼에 더 책임을 질 수 있었다. 클린턴이 수많은 스캔들로 그녀를 괴롭혔을 때에도, 힐러리는 결혼을 결정할 때처럼 신중하게 이혼을 고려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 힐러니는 결혼도 이혼도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클린턴과 힐러리는 함께 이루어나갈 꿈이 있는 부부였고, 정치적인 동지였으며, 서로에게 가장 적절한 조언자요 격려자였다. 클린턴은 어떤 일에서나 힐러리의 조언을 가장 중시했고 힐러리를 존중했다. 결혼 후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의 관례를 깨고 힐러리는 처녀 적 성인 로댐을 계속 쓴다고 했을 때도, 클린턴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많은 이들이 힐러리가 너무 대통령직에 관여가 심하다고 비난했을 때에도, 클린턴은 힐러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힐러리 역시 누구보다 클린턴을 믿고 존중했다. 그녀가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클린턴을 따라 시골 마을에 간 것부터, 그녀가 얼마나 클린턴을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보여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부부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미래를 함께 그렸다.
아칸소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하다
결혼 후 힐러리는 클린턴의 고향 아칸소에서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힐러리는 워싱턴에서의 잘나가는 변호사 자리를 포기하고, 아칸소에서 교수와 변호사로 일했다. 이 때 힐러리는 로즈로펌에서 일했는데, 로즈로펌에서 일한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기록되었다. 훗날 로즈로펌 최초의 여성 경영자가 되기도 했다.
클린턴은 예일 시절부터 입버릇처럼 말한 아칸소의 변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었다. 1979년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클린턴은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아칸소주지사로 당선되었다.
힐러리는 남편의 당선을 축하했지만, 그녀는 단순히 주지사 부인으로만 살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지사 부인이 해야 할 파티 주최나 리본 커팅식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대신, 원래 하던 변호사 일을 계속 했다. 물론 주지사인 남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처신하면서였다. 그녀는 자신의 꿈이 있었기에 남편의 부속품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주지사 부인이 계속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상대 진영의 비난을 받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지사 부인이 직업을 가졌다는 그 자체로 비난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도 자신의 일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일을 포기하면 훗날의 꿈까지 포기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녀가 결혼했음에도 성을 바꾸지 않고 처녀 적에 쓰던 성을 계속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주지사 부부로서 그들에 대한 비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딸 첼시를 임신했을 때 부부가 함께 라마즈교실에 다닌 것을 두고도 남편으로서 위엄이 없는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정적으로 클린턴은 젊은 주지사로서 혈기왕성했고 여러 개혁에 손댔는데, 그 개혁을 위해 세금을 더 거둬들이자 시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클린턴은 2년 후 재임 선거에서 패배하게 된다.
클린턴은 선거의 패배로 상심이 컸고 깊이 방황하였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편이었던 클린턴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잘못들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을 찾아다녔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술을 마셨다.
당시 갓난아기인 첼시를 키우면서 변호사 일까지 했던, 그것만으로도 버거웠던 힐러리는 그런 남편을 다독이지 못했다. 클린턴은 자신을 위로해주는 여자들과 어울렸고 바람을 피웠다. 힐러리는 힘든 상황을 술과 여자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클린턴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까지 유보하며 그와 결혼한 것이 아닌가. 힐러리는 클린턴을 이해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클린턴은 불우한 가정환경은 가진 남자였다. 그의 친부는 그가 갓난아기 때 죽었고 계부 밑에서 자랐는데, 계부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훗날 또 아버지가 바뀌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방탕한 삶을 가까이서 접했으므로 그런 삶이 익숙한 것이었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환경 탓에 그가 그렇게 되었다고, 힐러리는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의 재기를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결심했다.
클린턴이 재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칸소의 사람들과 클린턴이 화해해야 한다고 힐러리는 생각했다. 힐러리는 클린턴을 비판하는 풍자극에 클린턴 본인이 직접 출연할 것을 제안했다. 클린턴은 그런 무대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지만 힐러리는 그 무대를 통해 시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결국 클린턴은 힐러리의 조언대로 풍자극의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자신을 조롱하는 역할을 했고, 마지막에 가면을 벗자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클린턴은 재기에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힐러리의 내조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풍자극 출연 후 클린턴의 인기는 높아졌다. 힐러리는 남편의 재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주지사 부인이 그에 맞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았기에, 주지사부인으로서 적합한 외모로 바꾸었다. 그동안 고수해오던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퍼머와 염색을 했다. 또한 청바지에서 정장차림으로 바꿔 입었고, 성도 남편의 성을 따라 힐러리 로댐에서 힐러리 로댐 클린턴으로 바꾸었다.
힐러리는 자기만 떳떳하면 된다는 주의였지만, 점차 정치인으로서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힐러리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점차 성숙해져갔다.
힐러리와 클린턴의 노력의 결과, 1982년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초심으로 돌아갔다. 아칸소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는 그의 일념은 변함없었고 그를 위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먼저 교육개혁을 실시했다. 이 개혁에는 힐러리가 깊이 참여했다. 힐러리는 그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힐러리는 아칸소 곳곳을 돌아다니며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고, 그에 반대하는 교사 노조와도 강력하게 맞섰다. 결국 그 개혁은 성공적이었고, 주민들이 먼저 세금을 더 내서라도 교육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클린턴은 신뢰를 얻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주지사에 당선된다. 이후로도 클린턴의 여러 정책은 성공적이었고 아칸소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의 주지사로서의 이러한 경력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미국인들은 조심스레 클린턴의 백악관 입성까지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클린턴의 성 스캔들이었다. 상대 진영에서는 엄청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통령으로서 아직은 준비가 덜 된 면도 있었고, 또한 아직은 어린 딸 첼시가 아빠의 성 스캔들로 인해 겪을 정신적 상처가 두려웠던 부부는 대통령 선거를 4년 후로 미루었다.
드디어 백악관에 입성하다
하지만 4년 후가 되어도 클린턴에게 유리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 힐러리는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1991년 10월, 마침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힐러리는 남편을 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클린턴의 성 스캔들이 붉어지기도 했고, 힐러리의 지나친 참여가 비난 받기도 했지만, 그들 부부는 꿋꿋하게 선거 운동을 해나갔다.
여전히 여성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화당은 힐러리의 적극적인 참여를 자주 비난했고, 그녀를 급진적인 여권주의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힐러리는 자신으로 인해 클린턴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고, 방향을 수정하여 과감하게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이러한 융통성 있는 변화는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1992년 11월 3일, 마침내 클린턴은 제42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3년, 클린턴은 대통령으로, 힐러리는 영부인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백악관 입성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선거 기간 동안 힐러리는 잠시 조용한 내조를 했지만, 클린턴 부부는 공동정부를 꿈꾸었다. 사실상 힐러리 없이 클린턴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었던 일이기도 했다. 영부인의 사무실이 백악관 동관에 마련되었던 관례를 깨고 대통령 집무실에 가까운 곳 서관에 영부인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의료개혁의 책임자로 힐러리가 임명되었다.
이것은 상대진영에게 비난받았고, 국민들도 두 명의 대통령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하게 몰아붙이는 데 익숙했던 힐러리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의료개혁을 위해 힘썼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의료개혁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며 계속 난항이었고 마침내는 실패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이트워터 게이트, 클린턴의 성 스캔들, 트래블 게이트 등이 그들을 계속 위협하였다. 그 결과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다수의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는 클린턴 정부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했다.
미국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꿈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지 2년 만의 중간평가에서 그녀는 완전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더 이상 자기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전통적인 영부인으로서의 역할만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세계로 눈을 돌리자 고통 받는 여성들과 아이들이 보였다. 힐러리는 그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는 동안 클린턴은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고 미국 사회는 경제발전 등과 더불어 전체적인 호황을 누렸다. 1996년 클린턴 정부는 국가 적자를 반 이상이나 줄였고 1천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생겨났다. 최저 임금이 오르고 복지 개혁이 성공했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클린턴 정부는 비교적 성공적인 항해를 하고 있었다. 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클린턴은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고, 그들 부부에게는 이제 안정기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2년 뒤 힐러리에게는 여자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체험을 해야 했다.
그 유명한 르윈스키 성 스캔들로 남편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클린턴은 끊임없이 성 스캔들이 있었지만 힐러리는 그럴 때마다 그를 믿었다. 상대 진영의 공격으로 과장된 사실일 뿐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클린턴도 늘 그렇게 말했고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 하지만 전 국민 앞에서 그의 거짓말이 밝혀지자 힐러리도 여자인지라 많은 상처를 받았다. 힐러리는 대국민 사과 연설문을 작성하는 클린턴이 도움을 요청하자, 처음으로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세월을 함께 해온 부부였다. 그녀만 용서해주면 클린턴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힐러리는 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여자였다. 이번에도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이 아내에게는 큰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지만 대통령으로서 탄핵 받을 만큼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구명에 앞장섰고, 미국인들은 아내 힐러리가 용서한 마당에 자신들이 클린턴의 죄를 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여론이 형성되자 마침내 클린턴은 무죄로 선언되고 클린턴은 끝까지 임기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힐러리는 도저히 이성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훗날 힐러리는 당시 클린턴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가 미웠다고 말했지만, 부부 문제는 이후 부부 상담을 받으며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을 같은 꿈을 바라보며 고통과 위기를 함께 넘긴 남편을 쉽게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 꿈을 향해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8년 동안 영부인으로서 그녀의 임무도 끝나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꿈을 다시 이루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며 20살 때 이미 내각 구성을 다 짜두었다. 그녀에게 정치인의 꿈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도 벌써 쉰이 넘었다. 남은 시간 영부인으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평소에도 헌신했던 여성문제 아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편안히 살고 싶기도 했다. 또한 선거에 당선될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녀는 뉴욕 주 상원의원에 출마하고자 했는데, 그녀는 뉴욕 시민이 아니었고 또한 그녀의 경쟁자가 될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막강한 상대였다. 하지만 힐러리에게 새로운 도전은 익숙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힘들지만 도전하기도 결심했다.
힐러리의 선거운동을 도울 “힐러리의 급행버스”가 조직되었고, 1년여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경쟁상대였던 루돌프 줄리아니가 병으로 출마가 어려워진 상황이 있었지만, 어쨌든 뉴욕 주에 살아본 적도 없었던 힐러리가 뉴욕 주 상원으로 당선되었다. 영부인으로서 상원의원이 된 경우도, 뉴욕 주의 여성의원으로서도 그녀가 최초였다.
한때는 영부인이었지만 이제는 초선의원이 된 힐러리는 겸손하게 행동했다. 예전처럼 독선적으로 자기주장만 내세우지도 않았고, 한때는 남편을 탄핵했던 공화당 의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렇게 그녀는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우며 한층 더 성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2001년 뉴욕에 9.11테러가 발생하여 또다시 그녀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이번에도 그녀는 온갖 노력과 인맥을 동원하여 수많은 기금을 모금하며 뉴욕시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정치인으로서 유능함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녀는 2006년 뉴욕 주 상원의원에 재당선되었고, 민주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점차 성숙해갔고 유능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다.
2007년, 마침내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또 다른 후보인 오바마도 만만찮은 상대였다. 이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냐를 둔 흥미진진한 대결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들에게는 힘겨운 대결의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지지율을 늘여갔다. 점차 오바마 쪽으로 판세가 기울었지만 힐러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더욱 전투적으로 몰입했다. 하지만 2008년 6월 7일, 그녀는 1천 8백만장이 넘는 표를 받았지만, 오바마에게 패배했음을 인정하는 연설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그녀답게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오바마의 지지를 호소했다.
2009년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오바마 대통령은 힐러리를 행정부에서 가장 높은 외교관인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60세가 넘은 힐러리는 전 세계를 방문하며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이후 힐러리는 2016년, 70세의 나이로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낙선하며 대통령직과는 끝내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자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높고 단단한 유리 천장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덕분에 수천개의 금을 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녀가 최초의 미국 여성대통령이라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녀 이후 여성 정치인의 길이 더 많이 열린 것은 분명하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현대사에 기여한 공은 크다.
혹자들은 그녀가 지나치게 권력욕과 정치에 대한 야망이 크다고 비난한다. 그로 인해 클린턴의 바람까지 눈감아주었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그녀의 권력욕이 어떠한지, 남편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지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 힐러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그녀가 단지 권력욕이나 정치적인 야망을 품은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힘없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정책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돈이 되는 변호사일보다 무료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일들을 더 많이 했다. 마지막 대통령선거에서 그녀의 30년 전의 변호사 시절에 여아 성폭행범을 감형시켜 준 것을 자랑한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는 등 그간의 잘못이 드러나기도 했고, 이메일 스캔들로 공직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칸소에서의 교육개혁이나 영부인으로 있을 때의 의료개혁, 대통령 선거에서의 공약들 모두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익을 주려는 그녀의 바람이 담긴 정책들이었다. 그녀는 늘 여성과 아이들, 소외계층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그랬기에 그녀의 정치인생과 꿈이 권력욕이나 야망으로 매도되기 힘들며, 그녀의 일부 실책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한번의 잘못이 평생 염원한 꿈을 꺾을만큼 파장이 크다는 것 역시 그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녀에게 배울 것
힐러리의 삶을 보면 정말 한 명이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낸 것이 맞나 싶을 만큼 다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여성 변호사였고, 영부인이었고, 또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거론될 정도로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그녀는 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그녀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처럼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못했고, 에바 페론처럼 아름다운 외모도 가지지 못했다.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한결같은 성실성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명성을 등에 업고 무언가를 해보거나 그들의 후광을 이용하여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일을 가지기를 바랐다. 그녀는 당시 보통의 여자들처럼 남편의 덕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들을 담당했고, 때로는 남편 연봉의 5배를 넘게 벌면서 가정 경제를 책임지기도 했다. 부부 관계에서 힐러리는 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고, 언제나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려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어떻게 그녀는 그렇게 강인한 여성이 될 수 있었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힐러리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여자들이 결혼 후에는 자신의 꿈이나 일을 접고 남편에게 올인 한다. 훗날 남편이 조금이라도 배신하면 “내가 어떻게 헌신했는데.”라며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물론 힐러리도 결혼 후 남편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다. 클린턴을 위해서 워싱턴에서의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아칸소의 시골 마을에 정착했고, 클린턴이 선거에서 패배하자 자신의 신념을 바꾸며 외모를 변화하고 성도 바꾸었다.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 직업을 잠시 그만둔 적도 있었다. 이렇게 남편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고 자신의 꿈도 나중으로 미루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을 믿었지만 그보다 자신을 더 믿었고, 남편에게 모든 걸 거는 대신 늘 자신의 꿈과 일은 남겨두었다. 주지사 부인이 직업을 가졌다고 맹비난을 받을 때에도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먼저 남편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왔지만 그런 뒤에는 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했다.
꿈을 가진 여자였기에 늘 똑똑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꿈으로 인해 남편에게 모든 것을 걸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훗날 남편의 실수까지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을 갖지 않았을까? 모든 걸 남편에게 걸고 사는 여자일수록 남편의 바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언제부터 이렇게 강하고 현명했을까? 그녀도 처음부터 이렇게 똑똑하고 강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도 어리석고 실수투성이였다. 힐러리는 고등학교 때 인기도 없었고 공부도 최상위가 아니어서 자책하기도 했다. 선거에서 상대진영의 공격에 아무 말도 못해 패배하기도 했다. 웰즐리 여대 시절에는 집에 가고 싶다고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울기도 했다. 주지사 부인으로 있을 때에도 주지사 부인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못하기도 했고, 영부인이 되었을 때에는 너무 강하게 몰아 붙여 클린턴 정부의 실패의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상대의견에 귀 기울일 줄도 몰라 독단적이라는 비난도 수없이 들어야 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그런 실수와 실패 속에서 늘 깨달음을 얻어 변화했다. 그녀가 촌스러운 외모에서 세련된 외모와 헤어스타일로 변신한 것뿐만 아니라 인격도 변화한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비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상원의원으로 있을 때에는 남편 탄핵한 사람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아량을 가지게 되었다. 클린턴 부부를 가까이서 지켜본 보좌관 중 한 명은 힐러리가 영부인 시간을 거치며 더욱 많이 성숙했다고 말했다. 클린턴이 8년의 시간동안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 힐러리는 훨씬 더 성숙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힐러리는 실수하지 않는 여자가 아니라 실수에서 배우는 여자이다.
여자로서의 힐러리도 마찬가지였다. 힐러리도 처음에는 클린턴에 바람에 발끈하기도 했고, 그와 연애하던 시절에는 조금만 연락이 안 돼도 불안해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르윈스키 스캔들 후에는 클린턴과 르윈스키 두 사람 모두를 감싸는 여자로 발전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힐러리의 정치 인생을 천천히 곱씹어 보면, 모든 위인들의 인생이 다 그러하지만, 늘 위기와 그 극복의 반복이었다. 그 많은 위기 속에서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좌절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후광이나 여자로서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해 살아가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성실함으로 승부하려 했던 힐러리 로댐 클린턴, 그녀가 걸어온 길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