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 Sep 30. 2020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

나만의 슬픔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하기

영국의 왕세자빈이었던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는 20세기 동화의 여주인공이라 불렸다. 그녀는 20세기에도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나 그 나라의 왕자님과 결혼까지 했으니, 동화 속 여주인공으로 불릴 만도 하다.


누구나 부러워할 왕자님과의 결혼식은 그녀의 웨딩드레스만 보아도 그 화려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의 실크 웨딩드레스는 1만 여개의 진주와 비즈로 장식되었고, 그 길이는 무려 7미터나 되었다. 보통의 웨딩드레스 길이가 1미터도 되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 길이가 정말로 엄청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쓴 왕관에는 수백 개의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고, 그녀의 부케는 들고 있기도 힘들만큼 많은 꽃들로 장식되었다. 그 결혼식은 전 세계 7억 명의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스무 살의 청순한 신부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때부터 생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수많은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만인의 프린세스로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은 왕세자빈 다이애나의 삶은 그야말로 한편의 동화같다. 하지만 7미터가 넘도록 긴 드레스나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아라, 그리고 그녀를 향한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가 결코 그녀를 동화 속 공주님처럼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성대한 결혼식을 마치고 화려한 일상을 보내던 왕세자빈은 왕자와 함께한 자리에서 자주 우울한 표정을 대중들에게 들켜왔다. 오히려 그녀는 병에 걸린 사람들, 먹지 못해 뼈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 행복한 미소를 보이곤 했다.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모든 이들의 축복과 부러움 속에 치러진 성대한 결혼식, 그로부터 십오 년간 그녀의 화려한 모습과 환한 미소, 그리고 서른여섯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그저 한 편의 동화 속 공주님처럼 막연히 아름답지도, 또 보통의 공주님들처럼 나약하지도 않았다.

 

전 세계에 중계되었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의 그녀의 장례식은 그녀의 결혼식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수많은 영국인들은 그녀가 살았던 켄싱턴궁을 방문하여 산더미 같이 애도의 꽃을 쌓아올리며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가슴 아파했다. 무엇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그녀를 사랑하게 했을까? 서른여섯, 그 짧은 생애 동안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평범했던 소녀 시절

다이애나 스펜서는 영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인 스펜서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기 바로 전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가문의 뒤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던 다이애나의 부모는 또다시 딸이 태어나자 다소 실망했다. 다이애나는 훗날 어린 시절에 자신이 무언가 귀찮은 존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는데, 아마 아들을 바랐던 부모의 마음이 은연중에 그녀에게 전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년 뒤 그녀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가 태어났고, 다이애나는 막내딸이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남동생 찰스는 평생 다이애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집안이 귀족 집안이지만 별 특별할 것 없는 환경에서 평범하게 성장했다고 유년시절을 회고했다.


하지만 어린 다이애나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원래부터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다이애나의 부모는 그녀가 여섯 살 되던 해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녀는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많은 혼란을 겪었다. 어린 다이애나는 부모의 싸움과 어머니의 울음을 자주 목격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고 회고했다.


한번은 사촌의 결혼식에서 들러리가 되어 입을 드레스를 고를 때였다. 아버지는 흰색의 드레스를, 어머니는 초록색의 드레스를 그녀에게 권했는데, 어떤 드레스를 선택해도 선택받지 못한 한쪽의 부모가 슬퍼할까봐 그녀는 오랜 시간 전전긍긍했다. 마음이 여렸던 다이애나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부모의 불화가 더 심해질까 불안했다.


학창시절 다이애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만 부끄러움도 많은, 어느 학급에나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모습의 학생이었다. 그녀는 연극의 배역을 맡을 때 대사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을 정도로 남 앞에 서는 데 수줍음이 많았다. 그녀는 학업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녀의 언니들이나 남동생은 꽤 공부를 잘해서 우등생이었던 것에 비해, 그녀는 낙제를 걱정할 정도로 성적이 낮은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과는 달리 성적이 우수한 언니와 남동생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소녀 다이애나는 다이빙이나 발레, 피아노에는 재능이 많았다. 다이빙 대회에서는 4년 연속 1등을 차지할 정도였고, 한때는 발레리나를 꿈꿀 정도로 발레에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발레리나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따뜻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또래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특히 그녀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부모가 이혼한 친구들과는 무조건 친구가 될 정도였다. 그녀는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긴 했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또래의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약간의 장난기도 가지기도 했고, 그로 인해 부모님이 학교로 불려 오신 일도 한 번 있었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으면서 장난기도 있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다분히 평범한 모습으로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왕세자빈이 되는 행운

그런 그녀의 인생에 아주 특별한 사람이 끼어들게 된다. 바로 영국의 왕세자 찰스 윈저인 것이다. 그처럼 특별한 인물이 그녀의 인생에 들어오면서 평범했던 그녀의 삶 역시 180도로 바뀌게 되었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열여섯 살 때이다. 귀족 신분이던 다이애나는 여왕의 별장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처음 왕세자를 보게 되었다. 당시 찰스 왕세자는 마운트배튼 백작의 장례식에서 막 돌아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던 터였다. 그 모습을 본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에 대해 '슬픔이 많은 사람이구나' 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 만남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에게 함께 춤을 출 것을 권했고, 화랑을 구경시켜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찰스는 다이애나의 둘째 언니인 사라와 교제 중이었고, 따라서 다이애나와의 로맨스는 없었다. 다이애나는 그저 그처럼 특별한 사람이 자신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권해주었던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사라와 찰스는 9개월 정도 연애를 했지만 둘은 맞지 않았고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언니의 남자친구였던 찰스와 다이애나와의 인연도 거기에서 끝이었다.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였다. 필립 드 파세의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왕세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녀는 3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우울한 표정이 안타까웠다고 이야기한다. 늘 대중의 관심 속에서 왕세자의 임무에 지쳐있던 찰스는 다이애나가 자신을 이해준다고 느꼈고 그때부터 둘은 급속도로 친해진다.


당시 서른둘이었던 왕세자는 결혼에 대한 외부의 압박이 심했다. 그런 때에 만난 다이애나는 왕세자에게 더없이 좋은 신붓감이었다. 그녀는 왕세자빈의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했다. 그녀는 귀족이었고, 개신교 신자였으며, 처녀였다. 거기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고 순수했으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이유들로 찰스는 다이애나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언론에서도 다이애나를 왕세자빈으로 주목했다.


곧이어 찰스는 다이애나를 불러 정식으로 청혼을 한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왕세자빈이 된다는 사실에 황홀감을 느꼈고,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찰스가 멋지다고 생각했으므로 당연히 오케이를 했다. “나와 결혼해주겠소?”라는 찰스의 청혼에 다이애나는 “좋아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찰스는 자신과 결혼하는 것은 훗날 왕비가 되는 것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왠지 자신이 왕비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녀는 왕세자빈이 된다는 사실에 무척 들떴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특별한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고 아버지 스펜서 백작에게 말하곤 했는데, 이토록 높은 지위의 사람과 결혼할 줄은 몰랐다. 청혼을 받은 날, 그녀는 자신만의 비밀을 친한 친구 둘과만 나누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인 스펜서 백작에서 청혼 소식을 알리자, 그녀의 아버지 역시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렇게 다이애나는 부끄럼 많던 평범한 소녀에서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왕세자빈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녀의 집안은 귀족 중에서 지위가 낮은 편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의 결혼을 20세기의 동화라고 불렀다. 그녀 역시 너무도 멋진 왕자님 찰스와 결혼하고, 또 앞으로 왕세자빈으로 불리는 그 삶을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행운은 불행의 씨앗이 되어

하지만 그것이 결코 행운이 아니었음을 다이애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화 속 공주님이 되는 행운의 대가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혹했다.


왕세자의 청혼을 받은 후 그녀는 결혼 준비 겸 들뜬 마음도 진정할 겸, 어머니와 함께 3주간 호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 그녀는 결혼을 약속한 찰스가 그리웠다. 하지만 찰스는 그녀에게 먼저 전화해주지 않았고 그녀의 전화에도 대부분 연결되지 않았으며 이후 다시 전화해주지도 않았다. 찰스 왕세자가 바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지만 그녀는 왠지 슬픈 예감이 들었다.   


다이애나의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다른 여자가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찰스는 “카밀라 파커 보울스”라는 여자를 위해 꽃을 샀고, 그 여자에게 자신의 이니셜과 그녀의 이니셜을 새긴 팔찌를 선물했다. 다이애나는 여러 번 찰스에게 그 여자에 대해 물었지만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다이애나는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이미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이미 전 세계는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그녀 앞에는 그 어떤 결혼식보다 더 성대한 그녀의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결혼식 전날 밤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의 결혼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고 계신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그녀로서는 결혼을 하면 찰스도 변할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1981년 7월 29일, 영국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는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그 결혼식의 주인공인 다이애나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신부였다. 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날을 시작으로 15년에 걸친, 그녀의 행복한 왕세자빈으로서의 연기가 시작된 것 뿐이었다.  


그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느라 다이애나와 찰스는 녹초가 되었다. 첫 공식행사라 할 수 있는 결혼식을 무사히 치러낸 것에 대해 다이애나는 스스로 뿌듯했다. 그녀는 찰스에게 따뜻한 칭찬과 격려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찰스는 그녀에게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고, 3주간 이어진 신혼여행에서 그는 새로 나온 소설을 읽을 뿐이었다. 찰스는 신혼여행지에서도 카밀라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힐 거식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이애나는 갑작스럽게 세상이 그녀를 주목하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원래부터 남 앞에 나서는 데 수줍음이 많던 그녀가 아침엔 스웨덴 국왕부부를 맞이하고, 또 돌아서면 자신을 보러 온 어느 나라 대통령을 맞이해야 하는 그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언론 또한 지나치게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그녀는 과도한 언론의 관심에 대해 찰스에게나 왕실언론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모두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답했다.


남편, 왕실, 여왕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얻을 수 없었던 다이애나의 거식증은 점차 심해졌고, 사람들은 몸이 약한 아내를 얻은 찰스를 불쌍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심한 거식증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때에도 찰스는 자신의 공적 일을 우선시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첫째 아들 윌리엄을 임신했다. 그녀는 무척 기뻤지만, 거식증에 입덧까지 더해지면서 그녀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찰스의 무관심은 계속되었고, 그녀는 찰스에게 자신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실의 그 누구도 다이애나의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는 윌리엄을 임신한 몸으로 찰스 앞에서 계단을 구르기도 했다. 하지만 찰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넘어진 그녀를 두고 나갈 뿐이었다. 그녀는 찰스 앞에서 칼로 자신의 몸 여러 군데를 긋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남편에게 관심과 도움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불만을 표현하는 그녀에게 찰스는 더욱 냉담해져 갔다.


다이애나는 어릴 적 소망으로 따뜻한 남자와 결혼하길 원했다. 그녀는 남편이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잘했어.” 또는 “아니지, 그건 별로 좋지 않았어.”라고 말해주길 꿈꿨다. 하지만 찰스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이애나와 찰스는 여러 면에서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찰스는 공부를 잘했고 책을 좋아했으며, 여러 모로 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에 비해 다이애나는 책보다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좋아했고, 이성적이기보다는 마음이 따뜻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는 자신들의 이혼에 대한 미안함을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보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늘 값비싼 선물보다는 자상한 손길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남편에게서도 그의 따뜻한 손길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가 그랬듯 찰스 역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왕세자빈이 되는 것에 들뜨고 행복해했지만, 다이애나는 그런 명예나 권력보다는 따뜻한 애정을 더욱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이후로도 다이애나는 찰스가 보는 앞에서 여러 번 자해를 했고, 심지어 자살 시도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찰스는 냉담했고, 찰스 역시 그런 그녀에게 지쳐갔다. 그렇게 그들 부부 관계는 더욱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에게 냉담했던 것은 찰스뿐만이 아니었다. 왕실은 그들 부부의 불화 원인을 다이애나의 거식증으로 돌렸고, 끊임없이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의심했던 다이애나를 정신병자로 몰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왕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왕실의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는 다이애나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여전히 19세기의 왕실의 모습이었다. 왕실은 자신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다이애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것에 대해 다이애나가 의견을 말하면 일부러 화제를 돌리며 그녀를 무시했다.


왕실은 다이애나가 화려한 옷을 입고 우아하게 미소 짓는 예쁜 인형 같은 왕세자빈으로 남아주길 원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그런 마네킹은 되고 싶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궁을 나서면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와 사랑을 받았지만, 궁에 들어오면 왕실 사람들의 철저한 무시와 소외를 받아야 했다.


훗날 작가 아담 니콜슨은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자해와 자살 시도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마치 공기와 빛을 찾아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용감하게 또는 맹목적으로 분투했다.”    



성숙해져가는 왕세자빈

결혼 초반, 누구나 그렇듯 다이애나는 찰스와의 원만한 부부관계를 원했다. 그랬기에 다이애나는 찰스에 대한 불만을 자해나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며 끊임없이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5년의 결혼 생활 후, 그녀는 찰스와의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찰스는 여전히 다이애나에게 냉담했고, 심지어 다이애나의 높아져가는 인기를 질투하며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왕실 사람들은 부부의 불화 원인을 다이애나에게 돌렸고, 심지어 찰스의 친구들은 찰스와 카밀라가 몰래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며 찰스의 불륜을 도왔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몸을 헤치면서까지 자신을 봐달라고 호소하는 일을 이제는 그만두기로 했다. 다이애나는 찰스와 카밀라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결심했고, 대신 훌륭한 왕세자빈과 좋은 어머니가 되는 일에 충실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다이애나는 왕세자빈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녀는 대중에게 힘이 되는 왕세자빈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언니나 남동생과는 달리 공부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능력으로 인정받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세자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왕세자빈으로서 그녀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따뜻한 사랑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이애나는 말기 환자나 에이즈 환자를 방문하여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정신지체아들을 초청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에이즈, 구타당하는 아내, 약물중독과 같은 일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의 이런 노력들을 왕실에서는 남편에게 모욕을 주려는 행동으로 보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행동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에게 망신을 주려거나 단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을 도와주는 그 순간 자신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찰스나 왕실 가족들이 자신을 무시했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열렬하게 환호했고, 그녀의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럴 때 다이애나는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왕세자빈은 매일 직접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기로 유명했다. 그 편지는 자선기관에서 온 것도 있었고 일반 서민들에게 온 것도 많았다. 그녀는 종종 직접 답장을 썼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직접 가서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그녀는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연금 생활자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도 어려운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바랐다. 그래서 에이즈환자의 병동에 윌리엄 왕자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왕세자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데 충실했다. 그것은 스무 살의 어린 신부에서 일국의 왕세자빈으로, 그녀의 성숙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녀는 힘겨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버텨냈고, 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그녀의 궁인 켄싱턴으로 돌아와 “나는 매일 참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했다.”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을 포기하고 왕세자빈의 역할에만 충실한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제 연기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물론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며 느끼는 행복도 좋지만, 여자로서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찰스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그녀는 본질적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권력이 숨어있던 왕실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그녀를 더욱 힘겹게 할 뿐이었다.


왕세자빈의 인기는 왕세자를 한참이나 넘어섰다. 그런 다이애나의 인기에 대해 찰스와 왕실은 더욱 다이애나를 견제하게 되었고, 심지어 언론을 이용하여 다이애나를 폄하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남편의 무시와 왕실 사람들의 냉소 속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왕세자빈에게 이혼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혼하기 위해서는 여왕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여왕은 절대로 이혼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왕실의 철저한 감시를 속에서도 자신의 진실을 담은 책을 발간하기로 했다. 1992년 발간된 <나, 다이애나의 진실>은 다이애나가 왕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작가와 접촉하여 힘들게 펴낸, 그녀의 최초이자 최후의 책이었다. 그 책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이제까지 숨겨진 다이애나의 고통과 찰스의 불륜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책 이후 찰스와 왕실 측에서의 다이애나에 대한 감시와 비방은 더욱 심해졌다. 찰스는 맞대응으로 다이애나의 스캔들을 폭로하였고, 그녀의 봉사활동을 천박한 것으로 몰아세웠다. 이전까지는 언론이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까지 대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왕세자나 왕실과 등 돌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더 이상 나약하기만 한 스무살의 다이애나가 아니었다. 찰스 쪽의 갖은 방해와 모함에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동안 익혀왔다. 1994년, 다이애나는 왕실의 감시를 피해 BBC의 파노라마와의 인터뷰를 힘겹게 성사시키면서, 영국 전역에 찰스의 불륜과 그로 인한 자신의 고통, 그리고 왕실의 위선 등을 폭로했다.


그런 일련의 일들로 다이애나의 여러 차례의 호소에도 참으라는 말뿐이던 엘리자베스 여왕도 결국 둘의 이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1996년 마침내 찰스와 다이애나는 15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남남이 되기로 했다.


1996년 2월 28일, 다이애나는 찰스와의 이혼 발표문을 직접 발표했다. 이혼을 원하기는 했지만, 다이애나는 그 날을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그 발표문에서 다이애나는 동등한 양육권과 켄싱턴궁에 기거할 것, 왕세자빈의 칭호를 계속 유지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1996년 8월 공식적인 이혼에서 그녀는 1700만 파운드(대략 250억원)에 달하는 위자료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왕세자빈의 칭호는 잃어야 했다. 엘리자베스여왕이 다이애나의 칭호를 뺏은 것에 대해 영국 국민들은 여왕에 대해 비난했지만, 다이애나는 그 칭호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여 1996년 8월, 다이애나와 찰스는 공식 이혼하게 되었고 “세기의 결혼식, 20세기 동화”라 불리는 성대한 결혼식 후 그들의 15년간의 결혼 생활도 공식적으로 끝났다. 다이애나는 15년의 왕세자빈 생활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도 알았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나 자신이 되려 하고 나 자신에게 충실할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남들이 말하는 대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남을 수 있다면 죽은 것이 아니다.

이혼 후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선사업에 더욱 충실했다. 이혼 전에도 그녀는 자선 디너파티에 참여하기보다 에이즈, 암, 나환자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이제 그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선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1997년 여름, 그녀는 자신의 값비싼 드레스들을 모두 경매로 넘기며, 그 돈을 에이즈 환자를 돕는 기금으로 썼다.


또한 수상의 승인 하에 영국의 인도주의 대사가 되어 더욱 활발하게 구호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에이즈, 암, 심장병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봉사활동에 나섰으며, 특히 대인지뢰 추방 국제캠페인에 적극 관여해 앙골라, 보스니아를 순방하기도 했다. 그녀는 에이즈,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짓고, 지뢰로 손발을 잃은 아이들에게 의수와 의족을 선물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에이즈 환자와 키스했고, 나병 환자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또한 그녀가 직접 지뢰밭을 걷는 사진은 전 세계인에게 지뢰의 위험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까지 왕세자빈이라는 화려한 허울뿐인 삶이 주는 허무함을, 타인을 돕는 데서 오는 충만함으로 승화시키며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즈음 새로운 사랑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녀는 찰스 왕세자 이전에는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었고, 첫 남자였던 왕세자와의 사랑은 철저히 실패였다. 불륜이었지만 전직 호위대 장교 제임스 휴이트는 왕실에서 외로웠던 그녀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그녀와의 사랑을 책으로 발간함으로써 그녀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그처럼 사랑에 상처가 많았던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되는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이집트 부호의 아들이었던 도디 알 파예드였다. 그도 플레이보이라는 소문이 많았지만, 다이애나에게만은 진심인 듯 보였고 그녀는 그로 인해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그녀가 도디와 함께 휴가를 보낸 후 친구들에게 “요즘처럼 행복한 적은 없어. 여기는 천국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길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1997년 8월의 마지막 날, 그 날은 이혼 후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파리에서 도디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파라치를 피해 160킬로미터로 빠르게 달리던 차가 터널에 들어서며 기둥을 들이받는 대형 교통사고가 난다. 운전기사와 도디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다이애나는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겼지만 곧 죽고 말았다. 그렇게 만인의 프린세스 다이애나는 인도주의 대사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앞으로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남겨둔 채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많은 영국인들은 진심으로 슬퍼했다. 오랜 시간 자신만이 아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고, 그 결과 드디어 행복을 찾아 새 걸음을 내딛은 그녀의 삶이 그토록 짧게, 허무하게 끝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 “언젠가는 누나가 언론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왕세자빈 다이애나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심한 언론의 관심을 늘 우려했다. 그런데 정말로 다이애나는 파파라치에 의해 죽게 된 것이다. 다이애나는 언제나 자신을 촬영하기 위해 위험한 자세로 사진을 찍는 파파라치들을 걱정했으나 결국 다친 것은 그녀였다.


사고 직후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이애나에게 파파라치들은 응급구조 대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어느 한 명 응급구조를 시도하지 않았고 피를 흘리고 쓰러진 다이애나를 향해 플래시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 플래시는 다이애나에게 소리 없는 총성과도 같았다.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실천했던 다이애나에게 너무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그녀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것

왕세자와 결혼하던 스무 살의 다이애나는 어렸다. 그녀뿐 아니라 스무 살은 누구나 다 그렇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한 그녀는 갑작스럽게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고, 안타깝게도 그 변화는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즐기기보다 수줍어했고, 유명인이 되어 주목 받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유치원 교사를 할 때 만족했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삶을 꿈꿨다. 그런 그녀였기에 모든 이의 시선이 한몸에 집중된 왕세자빈의 역할이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특히나 더 어려웠다.


물론 그녀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그녀는 왕세자빈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했다. 어린 다이애나는 왕세자빈으로서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고, 자신에 대해서도 배우자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고작 13번을 만나고 결혼을 했다. 결혼 전 왕세자의 바람기를 알고 있었지만, 막연히 결혼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던 것도 그녀가 너무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어리석기만 한 여자는 절대 아니었다. 힘든 일로 인해 넘어질 수는 있지만, 계속 넘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점차 자신의 위치와 그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 갔다.


찰스는 다이애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여자이며, 그래서 왕실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찰스가 생각한 것처럼 무능한 여자가 아니었다. 다이애나는 누구보다도 자의식이 강했고, 시대를 보는 눈도 탁월했으며, 무엇보다 남편의 순종적인 내조자 역할에만 머물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강한 여인이었다. 다이애나는 화려한 옷들의 모델이 되는 일을 거부했고, 자신의 외모나 옷에 의해 판단당하는 대신,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통해 판단 받고 싶어 했다.


또한 그녀는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 속에 매몰되는 대신 그 슬픔을 타인을 위한 삶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녀의 특기인 타인을 도와주는 일에 더욱 심취했다. 이것은 그동안 왕실이나 최고위층이 보여주는 허례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진심이 담긴 것이었기에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찰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자였다.     


다이애나는 허례의식에 연연하지 않았고, 권력이나 명예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가식과 권위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진솔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다이애나는 원치 않는 상황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겪었다. 다이애나에게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수줍은 미소와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나약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강인한 여자이기도 하다. 다이애나는 그 고통과 슬픔을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극복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만인의 프린세스로 남을 수 있었다.


“다이애나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라는 토니 블레어 수상의 말처럼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기 충분했다. 타인을 도움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던 그녀의 삶은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이어졌다. 지금은 아주 익숙한 모습인 연예인들이 아프리카 아이들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시작한 사람이 다이애나였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인류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죽음 이후 더욱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웨스트민스터 교구장이 낭독한 추모 기도문은 다이애나의 삶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왕세자비였지만 우리는 멀리서나마 그녀에게 감히 애정을 품었다. 우리는 그녀의 인간적인 고민과 그녀가 사람들을 만나 어떻게 이들을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는 또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자질과 장점, 상처받기 쉬운 면모와 눈부시고 활기찬 성격, 따뜻함과 애정을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 힘찬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전 세계의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할 준비가 된 그녀의 모습에 감사한다.”         

이전 09화 힐러리 로댐 클린턴(194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