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인내하고 또 인내하다
“엘리자베스 1세”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막강한 힘을 가진다. 그녀는 영국의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녀가 통치하던 시대의 영국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영제국과는 거리가 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영국은 강력한 힘은커녕, 내부의 전쟁에만도 많은 힘을 소진해야 했다. 이웃나라 스페인과 프랑스 역시 호시탐탐 영국에 대한 공격의 기회를 노렸기에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와 언니 메리 여왕은 종교 분쟁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고, 그리하여 그들이 남긴 영국은 국고가 바닥나고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나라였다. 그런 영국을 유럽 최강국의 대영제국으로 도약하도록 만들었으니, 엘리자베스 1세라는 이름이 가지는 강력한 힘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강대국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해상패권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영국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유럽의 최강국이 되도록 만들었다. 영국의 종교개혁과 민족 통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세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문화인사를 후원하며 영국 문화의 르네상스를 연 왕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녀는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며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세계 최강의 해상국가로 만들며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이룬 여왕이다. 영국인들은 그녀를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부르며 사랑했고, 그녀는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영국을 위해 힘썼다. 그런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손꼽힌다.
남녀를 통틀어 수많은 왕들 중에서도 최고로 칭송받는 그녀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무척이나 고귀했고, 귀하디귀하게 자랐을 것 같다. 왕실의 지원을 받는 유명 인사들에 둘러싸여 최고의 사교육을 받아 훌륭한 여왕으로 '만들어'졌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힘든 시간을 그녀는 견뎌냈다. 그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인내하기에 있어서 가장 최고였던 사람이다. 지금부터 그녀의 시련 많았던 삶을 따라가보자.
아버지 헨리 8세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업적보다 여성편력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며, 그의 여자 문제 때문에 영국의 국교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뀌게 되었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헨리 8세는 다섯 번이나 부인을 갈아치워 총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스페인 출신의 캐서린이다.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강대국을 등에 업고 있었던 캐서린이지만,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 못했고 아들을 낳지도 못했기에 헨리 8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메리라는 공주 한 명만 두었다.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 그녀는 캐서린의 시녀였으나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말이 시녀이지 앤 불린 역시 높은 귀족 신분의 여성으로, 왕비 캐서린의 말벗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헨리 8세는 아름다운 앤 불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당시의 부인이었던 캐서린을 대신하여 앤 불린을 새왕비로 맞이하고 싶었다. 사랑에 눈이 먼 헨리 8세는 스페인 출신의 캐서린과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데, 이는 여러모로 위험한 결정었다. 당시 영국의 국교였던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캐서린은 강대국 스페인의 공주였다. 캐서린과의 이혼은 강대국 스페인과, 또 정신적으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교황과도 등을 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이런 일들을 끝내 감행하였고, 영국의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었다. 끝까지 이혼을 거부하던 캐서린은 변방으로 쫓아버리고, 결국 앤 불린과 결혼하였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이토록이나 집착했던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앤 불린이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아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앤 불린의 뱃속 아이를 아들로 확신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우여곡절 끝에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아들임을 굳게 믿었던 헨리 8세는 아이의 탄생만을 고대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가 낳은 아이는 딸, 바로 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였다.
헨리 8세는 변덕이 심한 남자였다. 스페인과 교황과 등을 지면서까지 힘들게 앤 불린과 결혼하였건만, 그녀에 대한 사랑은 3년 만에 식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결혼을 위해 앤 불린에게 간통죄 혐의를 덮어씌우고, 그녀를 단두대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가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한때는 사랑해마지않던 남편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를 새왕비로 맞이한다. 다행히 그녀는 왕자를 출산하였고, 그 왕자가 바로 훗날의 에드워드 8세이다.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의 기쁨은 매우 컸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또한 에드워드 8세 역시 15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된다. 에드워드 8세의 요절을 두고 그 이유가 아버지 헨리 8세가 성병에 걸렸을 때 낳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는 아들을 낳아 준 덕분인지, 그 후로도 헨리 8세가 세 명의 부인을 더 두었지만, 죽을 때 제인 시모어 옆에 묻히며 그녀를 가장 진정한 왕비로 여겼다.
헨리 8세의 네 번째 부인은 클레브스의 앤이다. 헨리 8세는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실제 얼굴을 보니 초상화와 너무 달랐다. 헨리 8세는 그녀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그녀와 이혼했다. 클레브스의 앤은 헨리 8세에게 일찍 이혼당해서인지 죽음에 처해지지 않았고 말년을 편안하게 보냈으니, 어쩌면 헨리 8세의 부인 중 가장 무난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하워드는 아름다웠으나 문란하다는 이유로 앤 불린과 마찬가지로 단두대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여섯 번째,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는 늙은 헨리 8세를 잘 돌보아 주었다. 그녀와의 결혼생활 중에 헨리 8세는 죽었다. 캐서린 파에게는 따로 애인이 있었는데, 만약 헨리 8세가 조금 더 늦게 죽었더라면 그녀 역시 단두대로 보내졌을 것이다. 헨리 8세가 다행히 죽은 덕에 그녀는 목숨을 부지했고, 훗날 그 애인과 함께 살았다.
헨리 8세는 이렇게 6명의 부인 중 두 명은 이혼, 또 두 명은 직접 처형시킨 매정한 남편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듯 딸 엘리자베스에게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힘겨웠던 유년시절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앤 불린을 간통죄 혐의로 처형시키고 그녀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자, 딸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가 되었다. 그리고 간통죄로 죽은 앤 불린이었기에 엘리자베스가 헨리8세의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딸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된다. 헨리 8세는 딸 엘리자베스의 양육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점점 모서리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고귀한 공주로서의 삶을 누리기는커녕 사생아라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라는 온갖 손가락질을 받으며 성장해야 했다.
당시 어린 엘리자베스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였고, 자신을 사랑하기는커녕 딸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겨우 공주라는 허울을 유지하였으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왕이 될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살아남을 의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끔찍이도 사랑했던 이복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딱 버티고 있었고, 만에 하나 그 동생이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더라도 이복언니 메리가 있었다.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는 마당에 그녀에게 왕위가 돌아올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했다.
만약 내가 엘리자베스의 상황이었다면 그 시간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 아버지의 외면, 그 누구도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는 현재, 그리고 암담하기만 한 미래.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상황을 그저 묵묵히 견뎌냈다.
아버지가 왕이었으나 공주로서의 삶을 전혀 누리지는 못했던 엘리자베스. 하지만 아버지가 죽고 이복동생인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누나 엘리자베스에게 관대했고, 이복 남매인 그들의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이때가 엘리자베스가 유년시절에 누린 유일한 안락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헨리 8세를 비롯, 왕실에서 그토록 귀하게 키운 에드워드 8세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게 된다. 왕위는 그녀의 이복언니인 메리 공주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고난의 시간이 펼쳐진다.
“피의 메리”라 불리는 메리 여왕은 앞서 언급되었던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캐서린의 딸이다. 캐서린을 변방으로 쫓아버리고 왕비가 된 앤 불린은 캐서린의 딸인 메리에게도 무척이나 냉정했다. 앤 불린은 메리 공주를 서출로 만들며 공주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했고, 갖은 모욕을 안겨주었다. 엘리자베스가 태어나기 전까지 메리 공주는 헨리 8세의 유일한 자식으로 왕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메리 공주를 앤 불린은 호시탐탐 죽이려고 기회를 노렸으며, 그게 잘 안 되자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시중을 들도록 하며 메리에게 치욕을 안겨 주기도 했다.
메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비극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갖은 모욕을 안겨준 앤 불린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앤 불린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앤 불린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미움은 고스란히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몫이 되었다.
피의 메리라 불리는 그녀는 영국국교회를 다시 가톨릭으로 바꾸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메리는 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를 죽음의 그늘에 묶어 두었다. 메리 여왕의 집권 기간 동안 소녀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 갇혀 지내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소녀 엘리자베스는 감금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한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었다. 그 힘든 상황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한 인내뿐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엘리자베스의 불행에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메리 여왕이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메리 여왕은 여러 번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간절히 후사를 바랬지만, 결국 한 명의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에 따라 당시 헨리 8세의 유일한 혈육인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되었다.
처형당한 왕비의 딸로 사생아로 손가락질 받았던 시간을, 이복언니의 끊임없는 죽음에의 위협을, 꿋꿋이 인내하고 또 인내한 그녀가 이제 영국의 어엿한 왕이 된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왕이 되었으니 이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왕이 된 후로도 그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여왕이 되고도
1558년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었지만, 교황은 그녀를 영국 여왕으로 승인해주지 않았다. 교황은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여겼고, 그리하여 사생아에 불과한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아버지인 헨리 8세를 따라 신교를 믿었으므로 교황은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교황은 엘리자베스의 사촌이자 헨리 7세의 외손녀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는 교황과 스페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엘리자베스가 왕이 된 후에도 거의 20년 동안이나 그녀의 왕위를 위협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중심으로 스페인 등이 합심하여 여러 차례 엘리자베스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녀는 왕이 되고도 자신을 향한 수많은 반목과 음모들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왕이 된 그녀의 고난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언니 메리 여왕이 남긴 영국은 국내외에서 온갖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여전히 종교 갈등이 심각했으며, 경제는 위기에 빠졌고, 국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다. 스물다섯 살의 어린 여왕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영국을 물려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까지 포기하며 잉글랜드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언니 메리가 철저한 가톨릭신자였다면, 그녀는 신교도이긴 했지만 중도 노선을 택했다. 인재 등용에 있어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종교 갈등을 해결코자 한 여러 정책들 덕분에 그간의 심각한 종교 분쟁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 수 있었다.
바닥난 국고를 메우기 위해서는 해적들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그 해적을 이용하여 점차 해상권도 장악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해적 드레이크를 신임하여, 사비를 털어 그에게 네 척의 항해 선박을 마련해주며 세계 일주를 독려했다. 드레이크는 일주 항해 중에도 해적질을 계속하여, 스페인 상선을 습격하여 많은 재물을 탈취했다. 2년 10개월의 항해 끝에 그는 세계의 진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세계 각지의 보물을 약탈해왔다. 많은 돈과 함께 영국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여 돌아온 그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은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이 해적은 스페인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 스페인이 드디어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그녀는 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1588년 7월, 영국해협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포진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은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들여와 국력을 증강시켰고, 과거 로마에 비교될 정도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하던 나라였다. 1580년에 포르투갈과 연합하면서 스페인은 더욱 강성해졌고, 스페인 군대는 최고의 기량을 자랑했다. 당시 국고가 바닥나고 백성들은 가난에 찌들어 있던 영국과는 여러 모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 스페인과의 전쟁은 그녀의 정치 인생뿐 아니라 그녀의 목숨을 건 전쟁과도 같았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늘 눈엣가시였고, 이전부터 엘리자베스를 죽이려는 음모도 수없이 저질렀다. 그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그녀의 목숨 자체까지 위협받는 것이었다.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그야말로 무적으로 보였다. 반면 여왕을 보호할 제대로 된 군대조차 없던 잉글랜드였다. 130여척의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해협에 나타난 스페인은 엘리자베스와 영국에게 충분히 위협이 되고도 남았다. 선박이 턱없이 부족한 그녀는 상선, 해적선까지 동원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상대로 싸워야 했다.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해 보이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시련을 꿋꿋하게 이겨낸 보상일까? 행운의 여신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숫자로는 턱없이 밀렸던 그녀의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영국의 함대는 스페인에 비해 그 크기나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작은 크기였기에 속도만큼은 스페인 함대를 앞섰다. 민첩한 기동성을 갖춘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를 당황시켰다. 영국함대는 기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했고, 영국의 의외의 공격에 당황하던 스페인 함대는 결국 한 발 물러서 후퇴를 결심했다. 그런데 후퇴하던 스페인 함대가 귀환 길에 폭풍우를 만나, 남은 1백여 척의 함대도 모두 침몰하게 된 것이다. 그 영국과의 전쟁에서의 패배로 스페인 제국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과 스페인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영국은 스페인을 대신하여 해상강국으로 성장하였고, 스페인이 그랬듯 전 세계에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의 영국은 지금의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된 것이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엘리자베스 여왕의 인생에도 안정기가 찾아왔다. 영국을 위협하던 스페인이 잠잠해지자 여왕은 국내 정치에 힘썼다. 여왕은 추밀원을 중심으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고,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여 경제를 부흥시켰다. 튜더구빈법이라 불리는 복지정책을 실시하였고, 1년에 두 번씩 순시하며 민중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민중의 생활 안정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애민정치를 실현한 여왕으로 평가받는다. 엘리자베스의 훌륭한 정치 덕분에 영국은 대내외적 안정을 이루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를 이끌어냈다.
자신의 결혼이 가져올 혼란을 걱정하여 끝내 결혼을 하지 않았던 여왕은 말년 많은 남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더들리 백작, 프랜시스 월싱엄, 로버트 세실, 롤리 경, 에섹스 백작 등 그녀가 총애했던 남자들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말년을 보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1603년 3월 24일, 44년의 재위 끝에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시련 많았던 삶 속에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그녀에게 배울 것
엘리자베스 1세, 그 이름만으로도 영국의 찬란한 영광이 떠오르는 그녀의 삶이 실제로는 파란만장한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줄만 알았던 그녀의 인생이 실은 온갖 불행과 고통 속에서 성장해 온 것이었다. 이처럼 시련과 고통은 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적인 것이다. 문제는 그 시련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역시 이복언니 메리 여왕처럼 어린 시절의 고통을 핑계 삼아 신경과민으로 컸을 수도 있다. 자신을 괴롭히고 무시했던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고, 그로써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파란만장한 시련들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견뎌내었다. 또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고 현재에 찬란한 영국을 만드는 데에만 힘썼다. 그 결과 “훌륭한 여왕 베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왕위를 계속해서 위협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역시 자신의 불행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는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왕가에 시집갔다. 프랑스 왕세자빈이었던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호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왕위를 물려받을 남편이 일찍 죽게 되자, 그녀의 호화로운 삶도 끝이 난다. 그녀는 더이상 프랑스에 머무르지 못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세련된 문화를 가진 프랑스를 떠나 촌스러운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에 돌아오자,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이후 그녀는 스코틀랜드 왕실을 프랑스처럼 세련되게 꾸미는 데에만 집중했다. 또한 그녀는 새로운 신랑감을 모색하기 위해 남자들을 만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녀는 여러 남자와 자주 사랑에 빠졌는데, 결국 그녀는 그 남자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자신의 결혼이 가져올 혼란을 걱정하여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성적인 모습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여러 남자들에게 이용당하던 메리 여왕은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야 할 상황까지 왔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변방의 탑에 가두고 그녀를 감시했다. 그곳에 갇혀서도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만을 그리워하던 메리는, 자의든 타의든 여러 차례 엘리자베스의 목숨을 위협하게 되었고, 결국은 엘리자베스에 의해 처형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는 여러모로 엘리자베스보다 좋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무척이나 아름다웠으며, 카톨릭 신자로 스페인과 교황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결말이 비극적인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닥친 위기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기와 시련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인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작은 섬나라 영국을 대영제국을 이끈 위대한 업적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화려한 업적보다 유년시절의 견뎌내기 힘들었을 그 시간들을 꿋꿋하게 견뎌낸 그녀의 인내심이 더욱 존경스럽다. 그녀에게 시련은 시험일뿐이었다. 그 시험들을 잘 통과해내었기에 결과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엘리자베스 1세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여러 시련이 닥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련이 아니라 시험일뿐이다. 우리가 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양분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이 너무 가혹하다며 신에게 원망을 퍼붓는 대신 그 시련을 잘 관리하며 견뎌내자. 엘리자베스가 인내하고 또 인내하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간 것처럼 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찬란한 결말을 꽃피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