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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Aug 11. 2020

교관 누나님

충남 천안 편

  고등학교 3년 중에서 가장 밝은 시기를 보낼 수 있는 수학여행이 끝났다. 그리고 고2가 되었다. 수험생은 아니지만 무언의 공부의 압박이 들어오는 시기. 그리고 5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2박 3일 일정으로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수련회는 수안보로 갔었고, 고등학교 역시 같은 지역의 공립학교였기 때문에 또 똑같은 곳으로 가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우리가 간 곳은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이었다. 아마도 그곳의 2박 3일 수련회 코스가 있었나 보다. 그렇게 난생처음 독립기념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2시간 조금 넘게 걸려 도착한 곳은 유관순 사우. 유관순 누나(당시에만 해도 무조건 '누나'였다.)의 기념관, 기념비, 동상 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대신 유관순 사우 관람 후 점심 도시락을 먹은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8km 행군. 그저 관광이었던 수학여행과는 달리 시작부터 엄청 힘들게 했다. 8km를 3시간 정도 걸었던 것 같은데 당시로서는 체력이 좋은 시기였음에도 힘들었던 걸 보면 아마 요령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군대에서 8km면 대략 2시간 안으로 끊는다.)


  그렇게 8km를 걸어서 독립기념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입소식과 예절교육, 심성 계발 등을 했는데 공부에서 벗어난 것들이라서 그런지 제법 좋았다. 그리고 각 반별로 교관님들이 배정되었는데 우리 반의 담당 교관은 착하게 생긴 힙합 스타일의 여성 분이었다. 아마 대학생 정도의 나이 또래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말 안 듣는 고등학생들 데리고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숙소는 독립기념관 근처의 리조트였는데 큰 방이 2개 정도 딸린 객실에서 남학생 17명이 함께 묵었다. 아, 우리 반은 문과반이라서 남학생이 모두 17명이었다. 그리고 수학여행 때보다 더 강력하게 소지품 검사를 하여 술을 모두 걷어갔지만 내 신발 속에 남아 있던 포커는 역시나 걸리지 않았다. 


  낮에 힘들게 행군을 했음에도 밤에 TV를 새벽까지 보는데 친구 한 녀석이 장난을 치다가 불침번을 서는 교관에게 걸려서 웃겨서 한 번 깼고, 애들 몇 명이서 여학생들 방에 놀러 간다고 또 한 번 깨고 하며 잠을 설쳤다. 그러고 보면 수학여행은 온전히 선생님들이 통제하는 것에 비하면 수련회는 교관들이 있어서 선생님들은 의외로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대 가서 불침번 서보면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 수 있는데, 교관들도 하루 종일 우리와 씨름하고 불침번까지 서면 힘들지 않았을까?


  둘째 날 역시 독립기념관에서 한국 문화의 이해, 안창호의 생애, 이성교제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물론, 이런 강의는 대부분 잔다. 학교 수업도 자는 마당에 이런 졸음이 솔솔 오는 강의에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다. 전날 잠을 설쳐서인지도 모르겠다. 점심 먹고 오후에는 탈춤을 배우면서 나는 국어 시간에 배운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를 되새김질했다.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역사 정보 사냥과 OX 퀴즈로 오후 일정을 마무리하고, 저녁 식사 후 캠프파이어까지 했다. 각 반별로 동그랗게 모여 노는데 우리 반 교관은 역시 힙합 스타일처럼 춤을 제법 잘 추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모처럼 신나게 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반에서 술을 사다가 사고가 날 뻔해서 분위기가 엄청 무거웠다. 덕분에 그날 밤은 수련회 마지막 날 밤이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마지막 날 아침. 오전에 독립기념관에서 택견을 배웠다. 이크. 에크. 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퇴소. 우리는 자기 명찰을 다 떼어 교관 누나의 옷에 붙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3일 동안 썼던 교재에다가도 롤링페이퍼 비슷한 것들을 쓰고 먹을 것과 꽃을 드렸다. 뜻하지 않게 오글거리는 우리의 행동에 당황하신 교관 누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감동적인 이별과 함께 2000년의 수련회는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교관 누나는 잘 살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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