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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태석 Aug 09. 2020

수학여행의 추억

경남 경주 편(1)

  수학여행.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가 아닌가. 지금은 대부분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일부 해외로 가는 학교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20세기의 끝자락. 1999년 우리는 전통의 명문,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거의 500여 명이나 되는 1학년들이 3월의 마지막에 서울역에 모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지하철 첫 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역. 혹시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서울역이 아니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울역 구역사에서 기차를 타고 머나먼 경주를 향해 떠났다. 첫날은 가볍게 짐을 풀고 불국사 구경만 했다. 역시 경주하면 불국사가 아니겠는가. 


  짐을 푼 곳은 역대로 선배들이 모두 묵었던 숙소였다. 고로 입구의 위치, 근처 가게, 담을 넘을 수 있는 곳 등의 위치는 이미 선배들에게 들어 숙지한 상태였다. 물론 나는 나가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제법 쫄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포커만은 제대로 숨겨 들어와 저녁을 먹고 부모님께 편지 쓰기를 하는 낯부끄러운 시간에 빨리 편지를 쓰고 친구들과 포커 게임을 했다. 물론 적당히 따고 적당히 잃고 일찍 잤다.


  수학여행 이튿날은 비가 왔다. 우리는 양주 통도사를 시작으로 포석정과 석굴암 구경을 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당시만 해도 차를 타고 가다가 본존불상 뒤로 유리에 막혀 있는 석상을 지나가듯 보고 오는 것이 다였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석굴암의 불상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점은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후에는 경주 박물관과 안압지, 천마총을 구경했는데 뭘 보긴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로지 기억나는 건 친구들과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는 기억과 반별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는 것뿐. 


  둘째 날 밤에는 점호 후에 우리 반 여학생들이 남학생 방으로 올라와 놀다가 4시쯤 잠들었다. 선생님들도 피곤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봐주는 건지 모르겠으나(아마 후자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아침을 먹는 걸 포기하고 최대한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자다가 버스에서도 자면서 도착한 곳은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였다. 엄청난 규모와 수많은 도로. 54km에 달하는 선로. 3개의 부두와 자체 발전소까지! 그야말로 하나의 작은, 독립된  도시나 다름없었다. 


  셋째 날 포항제철 관람 후 점심을 먹고 간 곳은 경주와 포항보다도 더 위에 있는 울진이었다. 울진 성류굴을 보기 위해 갔는데 온갖 기묘한 암석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굴 안이 제법 쌀쌀했다. 그래도 역시 기억나는 건 성류굴보다 울진을 오가며 버스 안에서 본 영화였을까. (하하하). 경주로 돌아오는 길에 감포 문무왕 수중릉에 도착해 바닷가를 보았다. 일부 학생들은 이것도 추억이라며 교복을 입은 채 바다에 들어가거나 빠지기도 했지만 언급했다시피 쫄보였던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물을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다. (지금도 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경주에서의 수학여행은 막을 내렸고, 우리는 다음 날 7시 48분 기차를 타고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경주를 다녀오고 친구 H와 재미난 계획을 짜곤 했다. 우리가 문무왕 수중릉의 유품을 찾자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얼토당토않는 일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다. 그리고 유품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대학 때문이었다. 유품을 찾으면 수시로 대학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두려움이 빚어낸 허상이기도 했다. 대학을 가기 위해 유품을 찾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수학여행의 기억과 함께 흐릿해져 갔고, H와 나는 무사히 대학을 졸업해 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지만, 그 아련한 마음의 느낌만은 가슴 한편에 오래도록 남아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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