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결승선에 꼴찌로 들어가도 완주하면 내가 위너

(지나간다 – 김범수)

by 피알봇

8. 결승선에 꼴찌로 들어가도 완주하면 내가 위너

(지나간다 – 김범수)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그 믿음이 없인 버틸 수 없어 그 희망이 없었으면 난 벌써

쓰러졌을 거야 무너졌을 거야 그 희망 하나로 난 버틴 거야



팀장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장, 본부장은 천지를 창조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


뭐든지 척척 해내는 것도 그랬고,

많은 것들이 그들의 의사결정에 따라 정리가 되니까.

근데 내가 그 자리에 오르고, 그들과 가깝게 일하는 연차가 되고 보니,

다 같이 버티고 견디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위에서 깨지기만 하다가 '이대로 들어가면 깨지겠다'라는 촉이 오기 시작하고

몇 번을 읽어도 찾지 못하던 오타가 보이는 경지에 이르고 나니,

많은 시간의 축적으로 '숙련된 사람'이자, 나의 사무실 선배가 나의 상사들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 화살을 날리듯,

하, 말에 칼날이 들었나 싶게 촌철멘트로 주변을 주눅 들게 하는 이들도

주말에는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에 스트레스를 받는 가장이고,

매일 보면서도 감탄하게 되는 부장님의 스타일링은

사실 새벽 4시에 아이들의 간식을 만들어둔 후에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훈장이랄까.


사무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이렇게 공황장애가 오는구나...라고 나 자신을 직시했던 그 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달력이었다.

매일 달력을 X자로 표기하면서 지워나갔다.

출근하고 나면 나의 메모장에 '이 시간도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을 쓰고,

달력을 열어 X자를 그었다. 하루를 여는 신성한 의식처럼.

본래 디데이란, 상징적인 그날을 상징하기 위해서 쓰는 표현이고,

나는 살면서 동그라미, 별표, 하트로 표기해 두고 기다려봤다.


언어가 생각을 지배하고 내 행동을 지배하고,

부정적인 말을, 생각을 하면 안 좋을 거란 생각에

끊임없이 긍정의 긍정의 긍정의 단어 만들을 고르고 고르며 참아냈지만

견딜 수 없었다.

앞에서 웃다가 비상계단으로 불러서 업무를 떠넘기는 선배나,

군기를 잡는다며 첫 차를 타야 출근할 수 있는 시간에 맞춰 업무를 지시하던 팀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군상이 한 곳에 모여, 환장종합세트 같았던 반년의 시간들.


어느 순간, 나뭇가지가...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던 나뭇가지가 가벼운 눈송이에 부러지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다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서 X표를 하면서 지나가가길 바랐던 것은 정녕,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모두가 힘들었기에, 서로에게 웃으면서 인사할 마음의 여유조차 사치 같았던 그 시절,

나의 위로는 '시간이 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순간도 지나갈 것이다."라는 진리였다.


저 자식을 곧 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온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나아질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너무 고통스럽지만, 디데이만 버티면 이제 끝이 난다.

혹자는 무식하게 모든 순간을 견뎌낼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포기도 습관이라는 말이 있지만,

포기도 전략이고 결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생각과 긴 시간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내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의 목소리를 이겨내게 되는 순간.

하지만 내가 너무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그깟 놈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어렵게 얻은 기회를 시작도 해보지 않고 걱정으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내 선택이 무식했는지, 현명하지 않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헤드헌터의 연락을 받고, 고민 없이 옮겼다면 지금 더 나은 연봉이 나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지.

크게 결단하지 않고, 무엇가를 선택하지 않아도

쉽지 않은 순간을 견뎌내는 것만으로 도는 나는 승리라고 생각한다.


10Km 달리기 완주를 목표로 했다면, 수만 명의 러너 중에 꼴찌로 들어왔다고 해도

나는 이미 승리자.

조직생활을, 사회생활을 나의 페이스에 맞춰서 살아가다 보면

힘든 순간도 '지나가게' 되니까.


누군가는 상황이 그 사람을 악하게, 나쁘게 만든다고 위로했다.

당시에는 타협할 수 없었던 문장이지만,

살아보니 그래, 순간순간 개인으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관리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나이가, 경력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순간에 할 수 있었던 다양한 선택의 기로를 알게 되는

경험으로 '책임감'이란 세 글자의 잴 수 없는 무게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선배가 되어가고,

나의 선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선배의 결정들도 그대로...)


어떤 사람도 그 상황을 겪지 않으면 백 퍼센트 공감하게 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지나가서,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의 무게가 덜어지는 위로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처럼

나이가 들고, 주름이 생기고, 새치를 염색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순간이 되어서도

'지나간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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