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 배냇저고리를 품고 있는 엄마에게

(엄마가 딸에게 – 양희은, 김창기)

by 피알봇

9. 내 배냇저고리를 품고 있는 엄마에게

(엄마가 딸에게 – 양희은, 김창기)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속을 뒤져할 말을 찾지……



엄마-라고 부르는 나의 그녀.

'엄마'는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말해보는 단어이기도 하고,

너무 놀라거나 당황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내뱉는 외침이기도 하고,

힘들고 속상할 때는 기도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종교이자, 내 마음의 안식이 되기도 한다.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사실, 필요하니 구매하는 것도 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동시에 결제를 하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덜컥 사거나, 언젠가 필요할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 대비 관점에서 쟁여놓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맥시멀리스트다. 중고거래 앱을 통해서 쏠쏠하게 부수 수입 올리는 분들도 많지만

게으르기도 하고, 오고 가는 협상의 시간이 재미보다는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사람이라,

옷은 아름다움 가게에, 책은 주변에 선물하거나 기증하는 방식을 택한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 니트를 꺼내면서 옷을 한번 정리해야지... 벼르던 날이었다.

주섬 주섬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나를 보며 엄마가 답답해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 모자는 아이슬란드 가서 오로라를 볼 때 썼던 모자야 나에겐 의미 있는 날이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야

이 티에는 펭수의 사인이 되어 있어. 현장에서 받은, 나에게는 너무 중요한 티셔츠야

이 바지는 나 다이어트 성공하면 입을 거야...

각각의 아이템마다 각각의 사연이 있었고,

그래서 내가 그들을 품고 있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내가 하는 꼴을 잠깐 지켜보던 엄마가 안방에서 곱게 싸인 파우치를 가지고 나오셨다.

나의 배냇저고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은 나의 옷.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엄마가 잘, 오래,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은

내 배냇저고리였다.


양쪽 집안의 첫 손주로 우리 오빠가 태어나고,

초보 엄마 아빠인 우리 부모님은 오빠가 울어도, 아파도,

어른들 눈치가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

온 가족에게는 첫 정,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이 너무 사랑스럽고 대견한 우리 오빠를 키우다가

사촌들이 많이 태어나기 시작하는 그 시점, 나도 그 레이스에 합류했다.

세 살 터울인 오빠와 나의 생일 사이에 사촌들이 태어났고,

그래서 나의 탄생은 예쁜 손녀이자 조카이지만 세상 태어나 처음 만나는 조카의 타이틀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키우는데 정말 내 자식 같았다고 했다.

울어도 마음이 편하고, 넘어져서 다쳐와도 애들이 크면서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첫 딸을 키우는데 마음이 너무 편하고 기억이 많이 났다고 그때를 생각했다.


첫 아이라 꾸준하게 썼던 오빠의 육아일기 뒤에는 내 분량은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걸음마가 아니라 뛰기 시작하는 오빠를 챙기느라

마음과 시간을 내지 못했지만,

의사가 아들일 수도 있다고 해도, 엄마 마음에는 무조건 딸일 것만 같아서 아기용품들도 여자아이용으로 준비했다는 우리 엄마는 배냇저고리를 만져보라며 내밀었다.


건강하게 태어나길 기원하는 마음과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그 시절의 기운이

가득 담겨있다고 믿는 엄마.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배넷저고리는 부적 같은 힘을 지닌다고 믿는 우리 엄마.

엄청 촌스럽게, 나 울었다.


우리 엄마가 지금보다 더 젊은 엄마였을 때,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곧이어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우리 엄마.


나보다 감수성 풍부하고, 대화의 중간중간 눈을 흘기며 나에게 T 냐고 묻는 우리 엄마가 곱게 간직하고 있는 배냇저고리가 나에게는 사랑이고, 응원이고, 이런 엄마가 있다는 게 축복 같아서.

눈물이 났다.


매 순간마다 엄마를 찾으면서,

힘들 때 엄마한테 허락도 없이 마음껏 기대면서

엄마가 그 자리에 있는 건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날짜와 그날의 날씨, 내가 뛰어갈 때 스쳤던 사람들의 얼굴 표정까지 기억나는 금요일 저녁.

엄마 친구에게 전화를 한통 받았다.

엄마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귀가하는 길에, 엄마 숨이 가빠지며 쓰러지셨다고 했다.

대형병원 응급실에 있는 엄마를 보러 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를 느꼈다.

차는 왜 이렇게 막히니, 사람들은 왜 지금 다 퇴근하는 건가... 빨리 못 가면 어떡하지.

아무 일도 없겠지,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어떡하지.

심장이 약하고, 저혈압이 있는 우리 엄마는 그 이후로 여러 차례 병원 신세를 지셨다.

다행이었고, 감사한 도움 덕분에 여전히 나에게 다양한 레퍼토리로 잔소리를 하신다.

그야말로 감사한 마음. 그래서 다들 신을 찾고, 종교를 믿는구나 생각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엄마는 항상 자식들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본인이 응급실로 실려갔던 그 이후에도 우리 엄마의 기도 첫머리는 자식들을 위한 축원으로 시작한다.

자식들을 위해 매일 천배의 기도를 하고,

수험생을 위해 주말 내내 삼천번의 무릎을 꿇고 굽혔던 우리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수를 하게 된 내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가 재수를 해서, 엄마 기도가 안 이뤄진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면 어떡하지?'

엄마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는 네가, 행복하고, 건강하라고 기도를 하는 거다.

수능을 고득점 받게 해 달라는 게 아니야. 공부한 걸 당황하지 않고 잘 풀어내고, 혹시라도 네가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해도 괜찮다고 기도를 하는 거라고.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하는 엄마의 마음이 너에게 쌓여 어느 순간, 네가 너무 절실하고 필요한 순간에 너를 보호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2남 1녀 삼 남매의 엄마가 되었던 우리 엄마는 그렇게 자신의 기원과 소망, 축원과 응원을 담아 원기옥처럼 모아서 적립하고 계셨다.

반대급부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건 아니라지만, 내 자식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으로 간절하게, 매일을 한결같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공포,

생각할 수 없었던 무서움.

나에게 엄마란, 아마 많은 이들에게 모든 이들에게 '엄마'란 그런 존재일 거다.

신앙 같고, 공기 같고, 그리고 내 삶의 뿌리이자 흔들릴 때는 짚을 수 있는 땅과 같은 사람.

우리 엄마.


엄마와의 소소한 시간에 집중해야겠다.

의사가 장시간 비행은 엄마 몸에 무리가 간다니,

가까운 곳으로.

엄마가 온천을 좋아하시니 온천도 가고,

성지순례 가고 싶어 하셨지만 너무 머니, 엄마가 좋아하는 홍매화가 필 때 구례에도 한번 다녀와야겠다.

집 앞을 산책하고 같이 백화점을 가서 내가 고른 옷을 보면서 엄마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도 들어야지.

애프터눈티에 나온 디저트가 예뻐서 연신 사진을 찍는 엄마에게 '또 오면 되잖아 얼른 드세요'라고 나도 잔소리를 해보고,


사진 앞에서 한참을 사색에 잠기는 엄마를 위해 좋은 전시회도 검색해 봐야지.

내 소소한 일상에,

엄마의 시간에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을 담아야지.

이번에 가는 경주 여행에서는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야지

옆에서 오빠랑 남동생이 경쟁하듯 말해도 내가 제일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나이가 들어가고,

아는 게 많아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선입견이 생기고,

싫은 것들이 분명해져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한숨이 늘어가도.

여전히 엄마가 있어야 든든하다고,

그래서 오늘 하루가 길어도 엄마가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렇게 말씀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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