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좋은 일은 추억이 되고, 안 좋은 일은 경험이

(걱정 말아요 그대 – 이적)

by 피알봇

11. 좋은 일은 추억이 되고, 안 좋은 일은 경험이 되고

(걱정 말아요 그대 – 이적)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 한 친구에게 바쁜데 건강 잘 챙기라고 안부를 전하며 영양제를 보내니,

평소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하는 그 친구는 "인생은 다 운인 거 같아"라고 회신을 했다.


월급루팡짓은 절대 못할 그 친구의 이런 체념적인 답변은 나에게도 신기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니, 그간 최선을 다하고, 디테일을 챙겼던 프로젝트들은 다 쉽지 않았는데

정말... 이번 프로젝트는 평소와 똑같이 준비했는데, 정말 다 똑같았는데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났다고.

누가 들어도 기뻐할 상황이지만, 이 친구는 기운이 빠진다고 했다. "배부른 소리 같지...?"라고 말하며.

성공의 공식이 있다면 그렇게 할 텐데, 이 정도 되면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 많다고 했다.


난 이 친구랑 공통점이 있는데, 성격이 급하다는 점이다.

업무를 할 때 성격이 급하면 어떤 단점이 있냐면... 일을 더 해야 하고 먼저 해야 하고

어느 순간 그 과정에 지는 것 같은 기분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보기보다 예민하고 안달하는 성격이라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보며 끊임없이 기사를 모니터링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그런 모습에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어나지 않은 위기관리 상황 발생에 대한 대응을 계속 곱씹는다...

좋은 말로 하면 시뮬레이션 정도 될까.

얼마나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고, 난 그 경우의 수를 통제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본다... 는... 기특한 마음을 가져볼 수도 있지만

업무와 일상의 스위치 온-오프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번아웃으로 직행하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우리는 업무 이외의 삶에서 더없이 나태하며, 상황과 공간만 허락한다면 대부분 누워있다.

대부분의 통화와 톡은 누워서 하는 절친사이랄까.


조직생활을 누군가와 경쟁하고 이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스판 위에서 나의 의지 없이 누군가에 이끌려서 포지션을 잡는 건 싫다. 싫다. 정말 싫다.

근데 이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큰 약점이 있었으니 성격이 급하다.

직장 생활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성격이 급하다는 건, 일을 벌이고, 만들고, 받아온다는 시발점이 되며,

누군가에게는 호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일을... 뭉개는 걸 못한다. 뭐랄까 빨리 업무분장을 하고 내가 할 부분을 정리해서 넘기는 편을 선호한다. 팀플을 할 때도, 내가 맡은 부분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보내려고 노력했고

(빨리 끝내 두고 마음 편히 나가서 뛰어놀아야지!!!)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도 서로의 업무분장을 정리해서, 업데이트를 한다.

J냐고? 노노노. 난 모든 순간에 즉흥과 흥분이 가득한 사람인데,

나 + @의 상황이 되면, 그저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나의 모든 영혼을 끌어모아 J 성향을 가동한다.

교육으로 사회화된 J처럼 보이는 P랄까.


어설프게 괜찮은 척을 하면서 서로의 업무분장을 예의 바르게 지켜내고자 노력하는 그 순간,

멈춰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빨리 정리를 하고 싶어 하는 나의 급한 성격과

이 회의를 끝내고자 하는 '적극성'으로 포장해,

나를 업무의 센터로 밀어 넣는 사람을 눈치채는 순간들이 있다. 자주 있다. 많이 있다.

나 스스로 내가 너무 하수라는 생각, 또 이런 식으로 나를 궁지로 몰았구나 하는 후회를 하며,

입에 과자를 물고 누군가에 대한 주어 없이 랩 같은 욕을 하며,

좋든 싫든 내 손에, 내 책임으로 떨어진 일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렇게 쓰면서 보니 참 괜찮은 사람 같지만... 과자를 물고 밤새 욕을 많이 한다)


데스노트에 그 사람의 초성을 쓰며, 자꾸 반복되면 다음에는 이름을 써주겠어- 이렇게 생각하며.

즐기는 자가 일류라고 스스로 세뇌시키며,

이런 시간들도 다 경력이라고 경험이라고, 직장생활 다 이런 거 아니겠냐고 견뎌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그 사람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내가 했다.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선배가 되고 팀장이 되고 관리자가 되고 보니,

누군가를 기다려주지 않고, 누군가에게 시행착오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드는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하, 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 인생인가.

매년 사람에 대한 면역이 조금씩 늘고,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며 방심할 때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커가 나타나고, 그 조카가 때론 우리 팀원이 되기도 하고,

조커가 불러온 상황에 큰 데시벨로 목청 뽐내시며 화 내시는 나의 상사가 빌런으로 변신하고,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탓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없이 누군가는 머리를 조아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하는 순간에는

나를 지탱할 수 있도록... 통장에 잔고가 쌓일 틈도 없이 다음 여행지를 결제한다.

한국말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아니지 아니지.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으로 갈 거야... 이런 다짐을 하며.

기가 죽어있는 팀원을 달래고, 열이 받아 있는 상사의 기분을 풀어드리며,

그 와중에... 일은 또... 일도 해야 하는데 마감이 모레네? 하하하 이렇게 상황 파악도 하면서.

중간중간 달래서 퇴근시킨 막내가 내일 출근을 안 하면 어떡하지 소심한 고민도 해가며.


이게 게임이라면 그간 착실하게 쌓은 포인트로 새로운 나만의 필살기를 장만해서 다음 스테이지로 전진하겠지만... 이제 다음 판이 왕과의 대결이고, 이 게임의 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밤 사이에 자동 업데이트 된 게임은 어느새 나와 최종 판의 왕과의 사이에

수십 개의 스테이지가 추가 생성되어 있는 것이 인생.


누군가를 기다려주는 일,

누가 실수를 했을 때 나의 경험을 나눠주되 내 방법을 강요하지 않는 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일,

누군가의 시작과 시도를 응원하는 일,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조바심 내지 않는 것.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빌런이 될 수 있지만 (이미 빌런일 수도 있고)

영원한 빌런이 되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것이

나의 인생, 직장생활, 인간관계 추구미이다.


조바심보다는 기다림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자고 기도문처럼 읊조린다.

나 혼자 산다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부지런함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박나래가

좋은 일은 추억이 되고, 안 좋은 일은 경험이 된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따라서 말하며,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좋은 일은 추억이 되고, 안 좋은 일은 경험이 되고.

그래, 조급함에 진다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고,

조급함을 현명하게 이용하지 못했다고 스스로의 한계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팀원들이 스스로의 한계에 자책하게 두지도 않고,

그들의 성장을 몰아붙이지 않고,

이런 모든 과정이 그저 오늘 내가 마주하게 될 수많은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며.

의연하고 태연하게.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야지.


앞서 말한 그 친구는 자신의 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 성공한 프로젝트의 홍보담당이 되었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경력과 나이차이의 팀원들을 관리하고, 성장시키기도 했던

대단한 내 친구.

인생은 운-이라고 자조했지만, 난 그 친구가 모든 프로젝트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옆에서 보고 들었다.

그동안의 프로젝트를 통해 신입이었던 막내들은 차근차근 업무를 배웠고, 성장했고, 숙련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모여서 프로젝트의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한가한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는 와중에도 프로젝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쏟아냈던가.

그 친구에게 상기시켜 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너의 최선을, 그래서 비로소 얻게 된 지금의 성공을.


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력, 창작과 열정이 담긴 프로젝트가 모두 성공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한 프로젝트가 모두 잘되진 않지만,

성공한 프로젝트는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가능하다.

누군가 이야기해 준 노하우도,

성공한 사람의 노트를 슬쩍 곁눈질로 읽어봐도,

방법은 정해져 있더라.


인생의 모든 순간마다 최고의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나다운 선택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

최선의 노력을 통해서 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발전하는 것.


조급함을 가라앉힐 책을 한 권 고르고,

마음을 다독일 음악을 고르고,

차를 한잔 마시면서 생각한다.


나의 성장을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었던 선배들처럼,

나 역시 누군가의 성장을 기다려주고,

당장의 선택과 '끝을 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되어

뜸을 들이고, 아이디어를 숙성시켜,

독단적이지 않고, 상생할 수 있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만한 나의 계획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사람이 돼... 고 싶다.


추억과 경험으로 쌓여가는 우리의 일상,

너와 나의 인생이 모두 의미가 있으니.


* 퇴근한 줄 알았던 막내가, 쭈뼛거리며 커피와 간식을 사서 책상 위 끄트머리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이면지에 회의자료를 잘못 복사하고, 브랜드 로고를 잘못 넣어 선배의 고운 손이 뒷목을 잡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 인생인가. 오늘은 선배한테 안부 인사를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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