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모든 시간은 서로 만난다

(오르막길 - 정인)

by 피알봇

13. 모든 시간은 서로 만난다.

(오르막길 - 정인)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우아하고 발랄하게, 명쾌하고 사랑스럽게 상황을 정리해 주는 방송인 최화정 씨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인생은 '기분관리'.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한 이 말을 짤로 보고, 무릎을 쳤다. 맞아. 인생은 기분관리야.


수능을 준비하고, 회사 면접시험을 준비하고,

잘한다고 내 승진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제대로 처신을 못하면 내 승진이 늦어지는 건 완전 100%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고,

내 마음같이 되지 않은 연애를 하며 도대체 어디까지가 내가 이해해 줄 수 있는 범위인지 기준을 잃고,

무례함이 불쑥 밀고 들어와서 유쾌한 상황을 정적으로 채우는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종종 평정심을 잃는다.


가끔은 오늘 하루의 일과에서 평정심을 잃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고려인 후손들은 호적도 없이 사는데 친일파가 식민사관을 정당한 듯 이야기하면 화가 뻗친다.

점점 연로해지시는, 뒤에서 바라보면 어깨가 한 줌이 되어가는 할머님들이

매주 수요시위에 나오셔야 하는, 변함없는 상황에 격양되었다가,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런 일에 흥분하는 내가 오지랖 덩어리인 거 같아서

시니컬한 자기 객관화로 빠져든다.


열심히 일한 사람보다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어필하느라 자리를 지킬 시간이 없는 사람이 승진을 먼저 하거나,

일 시키는 사람과 승진시키는 사람을 구분하며,

Show-up을 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두둔하며 편드는 간부를 만나거나,

노벨문학상을 원서로 읽을 수 있는 영광의 순간에도

굳이 스웨덴 한림원을 찾아가 역사왜곡이라고 시위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기사로 마주하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로 어그로 기사를 써서

성별 갈라치기에 나서는 기사를 마주하면 또... 화가 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존경하고 싶은 어른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른을 만날 때,

기꺼이 나의 경험을 나누어주고 싶은 후배보다는, 조금의 손해도 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이익만 주장하는 후배를 마주할 때는 밀려오는 당혹감에 당황한다.


명쾌하게 인과관계를 유추해 내기는 어렵지만,

내가 일반인 평균보다 화가 많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이 순간 단호함으로 선을 넘지 말 것을 단호하게 어필해야 하는 것인지,

좋은 말로 마무리하고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지,

매번 길을 잃는다.


수리영역 3번, 영어 듣기 평가 A 문항처럼... 답을 찾아 동그라미 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총집결된 것이 인생이라는 걸, '인류애'를 자꾸 지켜내게 만드는 순간을 마주하며 나는 아직도 배워가고 있다.


나를 피곤하게 하고 기빨리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스위치를 내려두고 신경을 끄는 것은

간단한 해결책 같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변화가 필요한 곳에는 작지만 목소리를 보태고,

연대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대전제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루한 레이스를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런 사회가 곧 나를 위한 안전망이라는 '거미줄 같이 얽혀있는' 관계를 잊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아시아 최초, 한국인 최초의 수식어를 달고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손에 쥐었던 윤여정 배우도

나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고 하시는 걸 듣고, 너무 안도가 되었다.

(저 멋진 언니도 모르는 게 있다니, 언니도 처음이라 모를 수 있댔어...

괜찮아 나도 처음이잖아. 괜찮아. 이런 자기 안심이랄까)


난 심지가 약하고, 귀가 얇은 사람이다.

매일 원고지 5장씩 빼먹지 않고 글을 쓰는 작가,

하루에 2시간씩 매일 연습을 하는 가수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거리에 관계없는 모든 마라토너들과

한 직업을 가지고 한결같이 성실하게 일해서 정년퇴직하는 사람들에 대한 팬심을 가지고 있다.


난 심지가 약하고, 귀가 얇고, 화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다)

매일 원고지를 성실하게 채우진 못하지만

항상 마음 한편에 불편하게- 오늘도 원고를 좀 써야 하는데, 일기라도 써야 하는데...라는 마음을 쟁여두고,

하루에 2시간씩 영어 공부를 하진 못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영어공부 유료앱 2개를 결제해서, 출근 시간 중간중간... 하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한다.

기록에 신경 쓰는 마라토너가 되진 못하지만,

출발과 동시에 분명히 후회하게 되리란 걸 알지만 또 10Km 마라톤을 신청해서

계속해서 나를 출발선에 서게 하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고,

한결같이 성실하게 내 업무에 최선을 다하진 못하지만

내공에 대한 존중이 있는 무림강호보다는

사기와 시기가 가득찬 계보 없는 춘추전국시대 같은 사무실에서 나의 품위를 잃지 않고자,

(직원들이 보고 있어... 품위를 잃지 말자...라고 끊임없이 다짐하며...)

빡침으로 마음이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모든 시간은 이어져있다는 걸 믿는다.

시간은 공(空)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도 믿는다.

나의 최선이 어느 순간 나 인생의 최고로 돌아올 거란걸 믿는다.

(설사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믿어보면 기분관리 차원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한 엄마에게 친절을 나눠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내가 손 뻗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기꺼이 나서려고 한다.

심장이 약한 엄마가 쓰러졌을 때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러주고, 보호자들에게 상황을 알려준 구급대원,

당황해서 그저 울고만 있는 나에게 '엄마 아프지 않게 마취해 드리겠다'라고 약속해 준, 나에게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속 캐릭터 같았던 너무 좋았던 마취과 선생님,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 긴장이 풀려 엉엉 우는 내 손을 다독여준 수간호사 선생님...

어쩌면 나 혼자 살 수 없기에 이어져 있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친절과 사랑과 배려와 나눔으로 나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굴고 싶은 순간에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건, 이어져있는 시간들을 엉키게 만들까 봐, 무서운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인생은 기분관리'라고 명언을 해주진 못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지금의 시간에 내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면,

내 인생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기준과 방식으로 채워 넣는다면,

까칠했지만 통찰력 좋았던 스티브잡스의 말처럼

내 시간들의, 내 인생의 순간이 점으로 연결되어 내가 가장 원했던,

나의 모습으로 이어질 것이란 걸 그저 믿기로 했다.




깔딱깔딱 너무 지치고 힘든 등산의 순간에,

금방 정상이다, 저기만 올라가면 정상이다, 5분만 가면 나온다...

그 말이 거짓말인걸 알지만, 30분이 지나도 정상 비슷한 걸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면, 어쩐지 야속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결국 그게 또 하나의 응원이고, 지지이고, 오늘 처음 보는 누군가라도 산에서 만난 스쳐가는 인연이 되었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건네는 덕담이라는 걸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들도 올라갈 때 받은 응원과 덕담을, 내려오는 길에 이렇게 나누는 거였단 걸,

나 역시 하산하는 길에 올라오는 이들에게 곧 정상이라고 거리를 짧게 부풀려 이야기하면서 깨달았다.


사무실에서 신규 직원들의 눈동자가 풀리고, 초점이 없어지는 걸 보면,

스스로 하고 있을 자책이 그들의 머리 위에 말풍선처럼 떠오르는 게 보이는... 연차가 되었다.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도 작아지고, 다음에 더 잘할 거라고 하면 다음에 이걸 또 해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그들의 시간을 나 역시 건너왔지만, 그 시간을 다시 견디라고 하면 또 견뎌낼 수 있을까.


다독임과 응원, 멘토링이 그들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좋은 선배가, 팀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일상이,

하지만 6시 지나면 가방 들고 제일 먼저 엘베로 뛰쳐나가는 나의 결기가,

그들의 시작에 그저, 참고할만한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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