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영원은 현재로 이루어진다

(바람이 부네요 – 이소라)

by 피알봇

20. 영원은 현재로 이루어진다

(바람이 부네요 – 이소라)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

세상엔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모두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마주 봐요

처음 태어난 이 별에서

사는 우리 손잡아요


에밀리 디킨슨은 "영원은 현재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떠 있어, 여름은 덥지-와 같은 진리이지만

그걸 누군가 정의해 주기 전까지는 없었던 사실인 것처럼, 이 문장은 나를 잠깐 멈추게 했다.


하루의 시작과 안전한 귀가 같은 당연한 것을 감사하게 느끼는 것,

가진 것이 늘어날수록 이 순간이 절실했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

상대방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지나간 인연 속에서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 것,

그때 그랬더라면...이라고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멈추는 스스로를 깨워서 지금에 집중하는 것,

머리가 복잡해지고 생각이 스스로를 잠식할 때 잠깐 눈을 감고 나에 집중하는 것.

모두 지금을, 현재를 잘 살아내기 위한 노력이다.


영원은 현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지금이 모여 영원이 된다라는 의미도 되지만,

지금이 영원이 될 수 있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 서로의 안부를 걱정했고, 어쩌면 모를 내일의 불확실성 속에서 담아만 뒀던,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 항상 우선순위의 상위에 두지 않았던 마음의 고백을 하곤 한다.




엄마의 수술실 앞에서 너무 무섭고, 무섭지만

혹시라도 내가 알아야 하는 것들을 놓칠까 봐, 그 놓친 것이 엄마의 수술에 영향을 줄까 봐

눈물이 계속 흐르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어느 새벽의 시간이 있었다.


코로나 기간이었고, 병원에는 PCR 음성 확인증이 있어야 가족당 1명만 보호자로

들어갈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업무상 주기적으로 PCR 검사를 받았던 내가, 대표로 들어갔다.

나머지 가족들은 병원에 들어올 수 없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새벽에 앰뷸런스로 이동한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걸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가족들과는 그룹통화를

하며 주의사항을 듣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의사 선생님이,

본인의 말에 집중을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얼굴이 다 젖도록 흥건하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여유도 없었던 나에게 앞으로의 수술에 대해서 설명해 주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프시지 않도록 제가 잘할게요"


무서웠던 그 새벽의 시간이, 감사한 시간을 거쳐 지금까지 쌓이면서

힘들고 막막한 순간에 그 한 자락의 위로를 떠올린다.

의연한 척 떨고 있는 환자의 보호자를 다독이고,

그 환자의 보호자에게 당신의 가족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책임지겠다고 말하던,

선생님의 눈빛을 떠올린다.


평상시에 기도를 열심히 할걸, 이렇게 어렵고 힘들 때만 기도를 한다고,

이기적이라고 하늘이 생각하면 어떡하나

내가 아는 모든 신을 부르고, 앞으로 정말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셀 수 없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다 보니 엄마의 수술이 끝났다고 화면에 떴다.

엄마를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나, 회복실은 어디에 있나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들이 다가와서 향후 일정을 차분하게 설명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계속 울고 있었나... 선생님이 나를 보고, 수술이 잘 끝났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주는데

그게 너무 안심이 되어서, 그 순간이 나에게 온 게 너무 감사해서... 가빠지는 호흡과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감사하다고,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내내 그렇게 울면서 말했다.


모든 의료진이 말했다. 엄마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친구와 차를 마시고 귀가하던 그 길에 뇌경색으로 쓰러졌지만

골든타임 안에 대학병원으로 신속하게 이송되었고,

엄마의 주치의 선생님이 새벽에 출근해서 긴급수술을 진행해 주셨다.

업무 때문에 받았던 PCR 음성결과가 있어서,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걸 가족 중에 한 명은 지켜볼 수 있었고,

그래서 온 가족들이 그룹콜로 진행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는 엄마는 '행운의 성지순례' 같은 존재가 되었고,

마취에서 깨어난 엄마는 무서워했을 딸을 안아주고, 다독였던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사의 기도를 하셨다.


다시 생각해도,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서, 천배, 삼천배의 기도를 숨 쉬듯 하셨던 엄마는

이제 당신을 살렸던 그 모든 순간에 대해서, 그 순간에 기적같이 곳곳에 존재해 줬던 그 모든 존재에 대해서

감사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모두가 우려하던 후유증 없이,

오늘도 아파트 지하 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가실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지셨다.


삶에 나태해지고 싶은 순간,

누군가 미워져서 그냥 미워하고 싶은 순간,

너무 무례한 이를 마주해 나도 같이 퍼붓고 싶어지는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환자 보호자로 가득한 병원 대기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본인이 울고 있는지 흐느끼는지도 모르고 있는 보호자의 눈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던, 의사 선생님을 떠올린다.

그때, 수술실 앞에서 정말 착하게, 바르게,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기도했던

나의 간절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런던 여행 중 숙소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회사 앞에서 난 교통사고 뉴스를 본 지인들이 나의 안전을 확인하는 카톡과 전화를 연달아 보내왔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그제야

내가 매일 점심을 먹으러 다닌 그 길에서 큰 사고가 나서

어떤 가정의 기둥이, 더 없을 사랑이, 부모에게 우주 같았을 자식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사고가 커서 놀랐어. 네가 한국에 없어서 다행이다...라고 쓰는데 이 문자를 쓰면서 괜히 마음이 무겁고 누군가에게 미안한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온 가족이 기도로 밤을 새웠던 그날,

그리고 엄마에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평범한 일상이 다시 존재할 수 있었던 그날,

잊지 말라고 3.1절. 8.15 광복절과 같은 기념일이 있는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겐 새로운 기념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감사와 환희에 찬 하루를 보내겠다는 다짐은... 쉽지 않다.

하루를 온전히 받아 내가 하루를 산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축복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때론 일상에 젖어 들어 잊고 살게 된다. 그게 인간이고, 그게 인생이지.


다만, 계절이 바뀌고, 카톡에 뜬 알람으로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고,

길 가다 한 번씩 생각났던 친구를 만나 멈춰 서서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매번 웨이팅이 길었던 식당에서 평소보다 조금 기다리고,

만원 버스에서 내 앞에 사람이 하차한 덕분에 의자에 앉아서 출근하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일상의 틈새에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위로를 나누고,

알지 못하는 이의 어려움을 위해 잠깐이라도 기도하고 응원하는 시간을 담아내는 삶이

누구보다 나에게 가장 좋은 삶이란 걸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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