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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 y Dec 28. 2023

팬덤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팬덤의 시대: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소속감의 심리학

사람의 편향은 언제 생길까? 1960년 후반, 사회 심리학자 앙리 타지펠은 64명의 소년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돈을 준다. 그룹을 구분 짓는 기준은 화면의 점이 실제보다 많거나 적다고 보거나,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그림 중 어느 것을 더 선호하는지다. 소년들은 주어진 돈을 마음이 가는 대로 나눠줄 수 있다. 실험에서 주어진 임의적인 기준임에도 자신과 비슷한 선택을 한 소년들에게 돈을 더 줬다. 집단의 경계가 무척 허술했지만, 소년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에 편향되었다. 무작위 동전 던지기로 집단이 결정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앙리 타지펠의 '최소 집단(minimal group)' 연구는 편향과 외부 집단에 대한 차별이 매우 쉽게 촉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주 작은 자극만 있어도 자신과 남을 분류하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선호한다. 타지펠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남들에게 동조하려는 이유를 '사회적 정체성 social identity'에서 찾는다.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집단 안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밖의 사람들과는 공유하지 않는 무언가로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고 협력해야 생존할 수 있던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도록 진화했고, 이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집단을 형성한다.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들게 했던 혼자만의 선호는, 아무리 그것에 대해 얘기해도 '나의 말을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인정받고, 외로움이 해소되고 안정감을 찾게 된다. 선호가 같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선호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찾고, 열정과 자아가 확장된다.  


무언가를 (미친듯이)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팬'이라는 명칭은 '광신자 fanatic'에서 파생됐다. '팬덤 fandom'은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팬들의 집단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하위문화처럼 여겨지지만, 팬덤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선호와 열정의 대상이 사람일 필요도, 실존할 필요도 없다.  


1893년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스의 죽음으로 마무리하려 했던 이야기가 <더 스트랜드 매거진>에 게재되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항의 표시로 잡지 구독을 취소했다. 증오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슬픔의 표시로 검은 완장을 차고 다닌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팬들의 열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단편소설과 연극에서 '몇백 번이나' 홈스를 부활시켰다. 결국 코난 도일은 1901년 셜록 홈스를 다시 살려내고 <배스커빌의 사냥개>를 선보였다. 셜록 홈스는 베이커가 221b 번지로 아직도 팬레터를 받는다.  


매년 9월 영국 바스(Bath)에서는 섭정 시대의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나 생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1971년 해산된 비틀스를 추억하며 밴드 공연, 전시, 이야기로 채운 비틀스 페스티벌 (International Beatleweek Festival)은 197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은 교류의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이제 국경을 초월한 팬덤은 실시간으로 모이고 활성화된다.  


정치는 선호를 공유한 집단의 충성심과 편애, 편견을 악용하기 좋은 곳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집단 심리를 습관적으로 악용했다. 멕시코인 ('마약상과 강간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증오'), 중국 등 지지자들이 폄하할 수 있는 외부 집단을 내세웠다. 고의로 적대감을 조성하는 환경에서는 외부 집단에 대한 증오가 불가피하다. 국가가 특정 공동체를 선호(예: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하거나, 제한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수단, 콩고)이나, 정치지도자의 인종/이념적 분열(히틀러)은 외부 집단을 적으로 돌린다.


집단에 속하게 되면 다른 집단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구별하고, 속한 집단의 성공과 명성을 추구한다. 대체로 속한 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고 관대해진다. 속한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나 정직성도 높다. 우리는 정치에 악용되는 사례들처럼 집단 밖의 타자를 배척하고 무너뜨림으로써 이를 달성하려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지만, 타자를 증오하지 않고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사랑할 수 있고 갈등 없이도 협력할 수 있다. 타자에게 더욱 친절하고 관대해지는 방향으로도 차별화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릇된 선호 대상의 존재(예: 총기 난사범 등 대량 살인범, 연쇄 살인범에 대한 팬덤)나, 정치 선동에 악용되거나, 다수의 선한 팬 사이의 극단적 소수일지라도 생명의 위협을 가하기까지 하는 '사생팬'과 같은 극단적인 팬덤도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선호와 소속감, '팬덤'의 존재가 부정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소속감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으며, 선호는 소속과 집단 형성의 기반이 된다. 중요한 것은 경계의 설정과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는 차별화의 방향이다.  


2005년 랭커스터대학교 심리학자 마크 레빈과 그 동료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 45명을 모집한다. 팬들은 캔버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며 조깅하다 다친 (척 하는) 사람을 마주친다. 조깅하는 사람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리버풀(맨체스터의 숙적)의 셔츠, 혹은 상표가 없는 평범한 셔츠를 입고 있다. 조깅하는 사람이 참가자들 팀의 옷을 입고 있을 때 참가자들이 도울 가능성은 3배 높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과 진행한 또 다른 실험에서는 스스로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 아닌 일반적인 축구 팬으로 생각하고, 응원하는 팀보다는 축구에 대한 사랑에 집중하라고 간단히 설명하며 독려했다. 자신의 선호에 기반하지만, 다른 사회적 정체성을 학습한 이들은 팀에 상관없이 축구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도왔다. 선호 집단의 경계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상표 없는 셔츠를 입은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언가를 아주 많이 좋아하면 그것을 공유하고 싶어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 캐서린 라슨, 팬 문화 연구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렵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나는 무엇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어하는가. 무언가에 대한 선호, 이에 기반한 집단과 팬덤은 많은 문제와 갈등의 시작이기도 하고 해결책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고 그들에게는 그들의 방식이 있다'는 존중과 인정, 집단 간의 경쟁보다는 집단 내의 협력으로,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루고 패자가 없이도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나와 나의 경계를 이해하고, 선 안과 밖으로 밀어내는 대신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고 이루어 나갈 수 있다면, 좋아하는 마음으로 모여 행동하는 팬덤은 분열된 사회의 구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제목: 《팬덤의 시대: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소속감의 심리학》(Fans)

지은이: 마이클 본드(Michael Bond)

출판: 어크로스(2023)

***  


이미지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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