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h y Dec 04. 2022

마지막, 그리고 시작

12월의 소고(小考)

갑작스레 밀려온 찬 공기는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마지막 나뭇잎마저 떨어뜨렸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나무들이 줄지은 거리를 지나 카페로 들어섰다. 그곳을 지키는 이와 나만이 존재하는 카페에 바깥의 한산한 공기가 이어졌다.  


사무적일 그의 목소리는 지난번보다 밝았다. 기분 탓일까, 텀블러에 커피를 받고서는 노트북에 고개를 묻었다. 무리 지어 온 사람들과 그의 반가운 목소리가 섞인다. 오늘은, 카페가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자주 발을 들였던 것으로 짐작 가는 이들에게 메뉴에 없는 커피를 만들어주며 손사래를 친다. 이건 그냥 줄게요, 밝은 목소리가 이제는 달리 들린다. 


마음만 앞세워 간 빈소에서 친구의 흐느끼는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황망한 죽음을 맞이한 슬픔 앞에 나는 여전히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매일 기계가 만들어내는 먼 세상의 이야기 같았던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는 예고도 없이 나와 내 주변의 것이 되었다.  


자잘한 병치레로 병원을 자주 찾지만 유난한 한 해였다. 한 달을 제외하고 꼬박꼬박 챙겨 온 병원 영수증과 약봉투, 3달째 이어가고 있는 지금의 치료, 남들은 1주일 앓고 지난다는 병이 나에게는 왜 이리도 지난한가. 병원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에는 쉬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몸과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에게 울화가 일었다. 


아마, 이전부터 안 좋았을 거예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만 두고 본다면, 5-6년 정도 아주 큰 공포를 경험한 상태랄까, 바짝 긴장한 상태로 온 신경을 움켜쥐고 그렇게 지내온 것 같아요. 늘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그저 손목을 잠시 내어줬을 뿐인데, 한의사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불운하게도, 운 좋게도, 공교롭게도 생기는 여러 우연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저 멀리 어떤 나비의 날갯짓이나 길가던 이의 기침 한 번 같이 영문 모를 일들이 이어진 사슬이 내 삶을 지나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모른 척 못 본 체 덮어두려 했던 나와 너의 일들이 끝끝내 이어져 온 것일 수도 있다. 분절되어 있다고 생각한 삶들은 생각보다 더 자주,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의미와 맥락을 드러낸 개별의 현상과 사람은, 예고 없이 돌연 내 삶에 편입된다.  


나는 여전히 나에게 닿은 마지막이라는 맥락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스스로를 내몰고 있다. 모든 것은 결국 마지막에 닿게 된다는 생각에 압도된, 반추되지 못한 헛되고 헛된 날들이 몸과 마음에 쌓여가고, 가까스로 찾아낸 의미와 이유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졌다.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삶에는 끝이 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머지않아 모두 스러지고 망각된다.  

인생은 헛되다. 아무렇게나 살면 되지, 어떻게 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쁜 삶,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삶의 유한성과 관련한 허무의식을 이겨야 한다. 

###


내가 나를 구해야 한다는 말은, 절박한 심정으로 남긴 나의 기록으로 상기된다. 5년 전 여름, 마땅한 종이를 찾지 못해 티슈 한 장에 옮겨 둔 글귀였다. 무기력과 우울, 슬픔이 한데 뒤섞였던 시간, 위태롭게 버텨내던 삶을 향해 퍼부었던 '어떻게'와 '왜'라는 질문 사이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을 뒤적였다.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늘의 나는 그날의 나를 떠올리지 못했지만, 나는 나라는 맥락에서 머무르고 이어져 숨쉬고 있다.

  

그는 카페를 정리하고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나서는 길에 한참을 망설이다 서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겸연쩍은 인사에도 카페 주인은 스스럼없고 씩씩하다.  


지난하거나 무던하게 삶은 크고 작은 파고를 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셀 수 없이 많은 마지막과 시작을 지났다. 기어코 살아내고자 하지 않아도, 어렵게 내치려 하지 않아도, 생과 연은 이어지거나 마지막을 맞는다. 기왕이면, 연이 닿은 동안 맥락을 살피고 마음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헤어지는 길목에서 카페 주인처럼 씩씩한 감사를, 친절을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걸음걸음이 어지럽던 두어 달이었다. 당연했던 총총걸음이 감사하고 대견한, 마지막 달의 시작이다. 마음 가는 대로 많이 웃고, 많이 울어. 누군가가 나에게 들려준 말을 조심스레 건네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