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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 y Mar 09. 2023

데스 스트랜딩

아포칼립스를 향하는 인류 구원의 택배, 진정한 연결의 의미

어느 날 '데스 스트랜딩(Death Stranding)'이라 불리는 영문 모를 괴현상으로 생사의 경계가 무너지고 문명이 파괴된다. 인류가 만든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타임폴(Timefall)'이라 불리는 비는 닿는 모든 것의 노화를 가속한다. 중년의 얼굴이 단 몇 분 만에 노인이 되고, 건물과 도로는 삭아버린다. 육신의 생을 다한 자들의 영혼은 일종의 림보 같은 공간인 '해변'을 거쳐 죽음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좌초된 자들(Beached Things, BT)'은 타임폴과 함께 곳곳에서 나타나 이승의 산 자들을 죽음으로 끌어당기고 도시를 날려버리는 규모의 폭발을 일으킨다. 겨우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는 지하 쉘터나 도시에 고립되고 단절되었다.  


사람과 사람, 문명이 단절된 포스트 데스 스트랜딩의 세계에서 밖으로 움직이는 유일한 생명체는 다름 아닌 포터, 즉 화물 배달원이다. 포터들은 도로마저 파괴된 땅을 두 발로 내디디며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이고 진 채 산과 강을 건너고 BT와 화물 도둑, 테러리스트를 피해 쉘터와 도시로 배달한다. 


주인공 샘 포터 브리지스는 한때 전설의 배달부로 불리던 포터다. BT를 감지할 수 있고, 죽어도 해변으로 이어지는 경계에서 생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귀환자에, BT에 대항할 수 있는 멸종 인자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지만, 제한된 장비와 척박한 환경을 오롯이 마주하고 두 발로 짐을 옮겨야 하는 점은 여타 포터와 다름이 없다. 죽지는 않지만 몇십에서 몇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게의 화물을 나르며 산과 바위에서 구르고 눈 속에 파묻히거나 BT에 자신의 혈액을 뿌려가며 싸우는 등 죽을 만큼 고생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삶의 의미를 잃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던 샘은 미합중국의 후신인 UCA (The United Cities of America, 미국 도시 연합)와 그 산하의 운송 업체인 브리지스에 다시금 얽혀 끊어진 네트워크를 잇고 국가를 재건하는 데 합류한다. 반강제로 합류한 국가 재건이라는 거대한 사업에도 그의 본업인 택배가 필수적이다. 샘의 발걸음을 따라 동부에서 서부로 도시 간 네트워크의 불이 밝혀지며, 도시의 재건과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배송된다.


<데스 스트랜딩>은 2019년 출시된 비디오 게임이다. 아포칼립스를 향해가는 극도로 고립된 인류와 세계를 주인공 샘을 움직여 '택배'라는 독특한 메커니즘으로 연결해가는 여정을 담았다. 비록 짜인 설정에 따라 움직이는 게임 캐릭터지만, 길이 없는 척박한 땅을 홀로 묵묵히 걸어가며 그가 닿은 사람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의 그것과 사뭇 다르지 않다. 독특하다 못해 극단적이라 생각한 게임의 설정은 전례 없는 강제적인 고립과 단절 속에서 '배달'에 의존해야 했던 코로나 시국의 웃지 못할 현실로 재현되기도 했다. 


게임 속 샘에게 다양한 물품의 배송이 의뢰된다. 의료기구나 식약품, 설비 자재와 같이 생존에 필요한 것부터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장난감에까지 이른다. 키보다 한참 높은 짐을 지고 길이 끊긴 골짜기 아래, 눈 속에 파묻힌 후미진 곳의 거처로 물품을 전달한다.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던 이들도 이내 샘에게 마음을 열고는, 어느덧 샘에게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칭찬과 감사의 말이 모이고 쌓여, 오늘 하루의 생존만을 생각하던 샘의 삶에도 보람과 의미가 다시금 생겨난다. 


나누고 연결된 사람들의 따뜻한 말과 이야기는 고립된 개별의 삶을 구원한다. <데스 스트랜딩>이 묻는 진정한 연결의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한 정보와 자극이, 사람과 사물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지만 편 가르기와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분열과 갈등이 가열되어, 되려 사람들이 점점 더 소외되고 고립되어가는 현실의 아이러니에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나는 내가 접한 세계의 총합이라는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담론에 매몰된 나에게, 샘의 여정은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오늘을 살아가며 나와 닿은 존재에 대한 감사와 친절을 잊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자 본질일 수 있음을 일깨운다. 


무례한 말과 행동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쏟아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작고 느슨한 친절과 선의가, 지치지 않고 마주한 오늘의 일상들이 하나둘 모여 우리를 연결하고 사람을 구하는 힘이 될 거라 믿는다. 언젠가 누군가가 무심결에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허우적대던 그날의 나를 구한 것처럼. 


오늘은 누구에게 어떤 표정과 말을 건넸는지 돌아본다. 힘겨운 하루 끝에도, 그래도 기왕이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얼굴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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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럽게 담지 못한게임 이야기

+ 게임에 나오는 '화물에 미친' 뮬이라는 도둑들만큼 국도 재건에 '미쳐' 있었더니, 어느덧 플레이타임이 100시간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미숙한 컨트롤로 대응하지 못하는 전투가 싫어 늘 도망이다. 긴 시간을 들인 국도는 사실은 가장 빠른 도주로...일지도. 


+ 그래픽이 압도적이다. 자연 묘사부터 배우들의 움직임과 표정까지 섬세하게 구현했다. 평이 엇갈린 복잡한 세계관과 이를 푸는 방식도 나는 괜찮았다. 한 편의 긴 영화 속에서 지낸 것 같았다. 엔딩에서는 물론 샘만큼 허공에 대놓고 소리를 지르고 싶기는 했다.  


+ '택배'라는 설정과 함께, 비동기식 연결이라는 방식 역시 독특하고 흥미롭다. 철저히 혼자 진행하는 게임 중 다른 세계의 '샘'들이 만든 구조물이나 던져주는 장비들이 종종 나타난다. 가로막힌 절벽 앞에서는 녹슬어가는 사다리도 반갑다. 누군가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들이 뒤를 따르는 이들을 돕는다. <데스 스트랜딩>이 서로를 구하는 연결의 힘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설정.  


+ 오랜 시간 몸 담은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온 개발자 코지마 히데오는 홀로 선 그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그를 지지해 온 사람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장르의 게임 <데스 스트랜딩>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데스 스트랜딩>과 샘의 여정과도 닮았다. 내년 출시를 목표로 한 후속편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궁금해진다. 


* 이미지 출처: 게임 플레이 화면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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