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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 y May 18. 2023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는 것'

함께 살기,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김한솔은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열여덟 살의 어느 날 레베르 시신경병증(Leber’s hereditary optic neuropathy) 판정을 받고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배우기를 주저하던 점자를 익히고, 맹학교, 나아가 일반 대학의 경영학과에 진학한다. 시각장애인은 어딘가 서툴고, 우울하고, 도와줘야 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스스로와 세상의 편견, 일상 곳곳의 벽에 무너졌다 서기를 반복한다. 책 <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은 부딪히고 좌절하고 다시금 일어서는 그의 여정을 진솔하게 담았다.


환승해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어.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도착한 지하철역이었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귀에 걸린 조그만 이어폰으로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들뜬 기분을 조잘조잘 풀어내며 흰 지팡이를 쥐고 서 있다. 책 속의 이야기가 곧장 눈앞의 우연한 현실로 이어졌다.


퇴근길의 역사는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들로 사방이 분주하다. 계단을 두고 방향을 달리하는, 앞이 보이는 이에게는 단순하지만 그에게는 한참 복잡할 환승 노선이다. 늘어나는 인파에 주저하다 도와줘도 될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곁을 걷는 동안 혹여 필요하지 않은 자의적인 '도움'으로 길을 익힐 시간과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인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로 목표한 지하철에 몸을 싣는 그의 모습과 내내 경쾌했던 목소리에 조금은 안도하며 역사를 나선다.  


김한솔과 그의 친구들이 겪은 문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울하고 서툰, 동정의 대상인 장애인'이라는 미디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편견을 넘어서도,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면서 돕고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안팎으로, 특히 스스로 턱없이 부족했다. 보이는 사람에게 '예쁘지 않아' 철거되는 점자 보도 블럭들, 이마저도 가로막은 킥보드와 매대, '시끄럽다'는 민원 때문에 소리를 꺼버린 신호등 음성 안내, 든든한 동반자이지만 언제나 거부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안내견들. 책을 읽고 나니 앞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주로 많은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은 더 불친절해 보인다.


2021년 말 기준으로 등록장애인은 전체 인구 대비 5.1%다. 장애 발생의 원인으로 사고, 질환 등 후천적인 원인이 80% 이상이다. 언제든 '너'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불안한 당위보다, 미처 살피지 못한 우리 중 여럿의 필요와 그로 인해 겪었을 일상의 불편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는 것(Leave no one behind)'. 극심한 경쟁, 양극화와 불평등을 초래해온 신자유주의 경제 중심 성장에서 탈피하고자 2015년 UN 총회에서 합의한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슬로건이다. 다양성과 포용성은 더 이상 감정적인 호소가 아닌, 모두의 생존에 대한 문제이자 시대적 과제로 대두됐다. 이에 비해 사회적인 이해와 공감은 여전히 부족하고, 많은 곳에서 장애가 없는 이들의 목소리와 편의가 우선된다.  


이해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편견에 맞서 부딪히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써낸 김한솔은 유튜버 '원샷한솔'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최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시각장애인 김진영은 "나라도 돌멩이 하나 치우는 느낌으로 싸우면 다음 사람이 편할 것"이라며 부당함에 지지 않고 맞서 왔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화는 기존 영화에 화면을 설명하는 음성 해설이나 대사, 음악, 소리 정보를 알려주는 자막을 더한다. 단차없는 바닥 마감이나 촉감 전시, 점자 블록, 음성 안내 등 장애 유무, 연령, 성별, 국적,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게 안전하고 편리한 전시 공간을 고민하는 유니버설 전시 디자인도 이해와 포용을 위한 노력의 한 예다.  


출처: 공공디자인 종합정보시스템, 전시시설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


오래 전 미국에 잠시 머물 때였다. 30분에 한 대 꼴로 오는 버스는 휠체어를 탄 승객을 태우기 위해 천천히 차체를 내리고, 휠체어가 안정적으로 고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출발했다. 모두가 평온한 얼굴이었던 아침 출근, 통학 버스에서 나는 홀로 초조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의 시선과 배움은 여전히 부족하고 편향적이다.  


장애,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나'들이 모여 건강하게 지낼 수 있고, 이를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조직과 사회는 강인하다. 이해와 공감, 다정함으로 분노와 혐오를 넘어 공존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각자도생의 각박함과 편가르기의 농간에도, 인간은 학습하고 변화할 수 있기에 희망적이다. 다정한 것이 결국 함께 살아남는다.


버스정류장의 점자블록과 음성 안내. 무심코 지나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눈이 되는 점자블록. 길가에 놓인 매대나 킥보드 등은 이에 의존해 걷는 이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인용  참고 자료 

1.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2021년 등록장애인 통계 발표>, 보건복지부, 2022/04/19,  http://www.mohw.go.kr/react/al/sal0301vw.jsp?PAR_MENU_ID=04&MENU_ID=0403&page=1&CONT_SEQ=371108#:~:text=2021%EB%85%84%EB%8F%84%20%EB%93%B1%EB%A1%9D%EC%9E%A5%EC%95%A0%EC%9D%B8%20%ED%98%84%ED%99%A9%3F,%EB%82%B4%EC%9A%A9%EC%9D%80%20%EB%8B%A4%EC%9D%8C%EA%B3%BC%20%EA%B0%99%EB%8B%A4.&text=('21%EB%85%84%20%EB%A7%90%20%EA%B8%B0%EC%A4%80),%EB%A7%8C%202%2C000%EB%AA%85%20%EC%A6%9D%EA%B0%80%ED%96%88%EB%8B%A4.


2.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복지패널조사, <장애 발생 원인 및 시기>, 통계청 (KOSIS), 2019 (갱신: 2021/09/07),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31&tblId=DT_33109_F37&conn_path=I2 


3. 김혜리, <시각장애인으로 변호사가 되기까지…그는 ‘싸움닭’이 됐다>, 경향신문, 2023/04/26.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4262137005#c2b  


4. UN Sustainable Development Goal, <Universal Values - Principle Two: Leave No One Behind>, UN Sustainable Development Group, https://unsdg.un.org/2030-agenda/universal-values/leave-no-one-behind  


5. '원샷한솔'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OneshotHansol/   


6.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시시설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 공공디자인 종합정보시스템, 2022

https://publicdesign.kr/archv/view/menu/892?thisPage=1&recordCnt=10&brdType=R&bbIdx=1000004895&idx=1000004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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