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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kko Oct 24. 2024

좀비지만 괜찮아

Chapter. 6 트라우마

맥주병이 방바닥에서 부서지는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 쨍그랑과는 또 다른 묵직한 파열음을 내며 그와 함께 안에 있던 액체가 거품을 내며 진득하게 바닥에 퍼진다. 그리고 맥주가 증발하며 나는 특유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남아있는 듯 선하다.

그 당시 삼일을 식음전폐하며 방구석에 움츠려 앉아있던 어린 나의 모습은, 아마 어른이 된 내가 가장 안아줘야 할 어린 시절의 나 자신 1순위로, 마음 한구석 검은 방에 아직도 웅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나는, 언제 그런 시기가 있었냐는 듯 구김살 없고 건장한 성인 남성으로 보란 듯이 성장했고, 결국에는 온 가족이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어쭙잖게나마 갖춰,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원인 모를 병환이, 현재 우리 가족의 가장 큰 고민이라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때는 삶의 의지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지만, 심연이라는 곳을 경험한 뒤, 내 몸은 이상해졌다. 확신은 없지만, 내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간 (소화불량 및 호흡불량으로 인한 소통불능) 은 어린 시절부터 분명히 존재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행복한 가족사진들로 이미 충분히 도배되어 그 빛마저 바랬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심지어 그 당시 현재 내 나이였던 부모님의 고뇌에 연민하며, 나보다는 그때의 어렸던 엄마를, 아빠를 더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생긴 이후로 살아왔던 시간 동안에 생긴 트라우마는 차곡차곡 내 기억에 쌓여왔다. 자유롭게 말하는 방법을 잃고, 말을 삼켜야 했던 성장기에 겪었던 감정의 소화불량들. 모두에게 추천받아 나갔던 반장선거에서 공약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낙방했던 일. 아침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들었던 핀잔. 해외출장만 하면 병세가 악화되고 급체하여 아무것도 먹지 못해도 웃는 얼굴로 거래처를 어텐드하며,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면담을 진행했던 기억들. 한창 재택근무를 하던 시기, 회의에서 영어가 나오지 않아 카메라를 끄고 구석에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때리며 자해했던 일.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 불편한 몸으로 인해 겪었던 시간들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을, 담담하게 회고하듯 쓸 수 있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서 어찌 됐든 성장한 내가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다면, 여러 가지 약을 먹어봐도 낫지 않던 몸의 불편함이, 요가와 필라테스, 그리고 새로 시도하게 된 약물처방으로 인해 크게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트라우마들을 뒤로하고, 나도 이제 인생의 제2막을 열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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